제목 민경배 목사의 '한국역사 그 뒷이야기' 글쓴이 신상구 날짜 2021.04.06 16:18

                                                                   민경배 목사의 '한국역사 그 뒷이야기'

  

​    한국교회는 그 역사가 기적과 경이로 차 있다. 1879년 매크레오드(L. MacLeod)라는 사람이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10지파’ 라고 하는, 아주 흥미진진한 책을 하나 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픽션일 뿐이라고 덮어두고 만다. 그런데 그 책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그 열 지파가 한국사람일 것이라는 것을 설득시키노라고 애쓴, 그런 책이다.

​    1879년이면 개신교가 들어오기 7년 전의 일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천주교의 경우를 두고 한 이야기라고 되어 있다.

​    천주교회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785년인데, 1791년의 신해교난에서 1871년의 신미교난에 이르기까지 다섯 차례에 걸친 전국적 소탕작전에 가혹한 박해를 겪었다. 그리고 수만 명이 순교의 피를 흘렸다. 그 책은 그런 것을 알고 쓴 책이다.

​    그런 천주교인들의 수난과 순교는 당시 이미 세계에 알려져 있었다. 가령 1872년의 세계적인 종합잡지 ‘에딘바라 리뷰’는 벌써 기독교가 한국인의 마음에 뿌려져 영원히 지워지지 아니할 생명력으로 살아 있다고 대서특필한 일이 있다. 138년 전의 일이다.

​    이광수는 책을 많이 읽은 현대 유수의 문인이다. 그만한 글을 쓴 깊은 사상의 문인도 드물 것이다. 그런데 그는 천주교인들의 순교역사를 읽고 나서 가슴이 뭉클했다. 그리고 이런 글을 남긴다. “내 혈관 속에도 이런 순교자의 피가 흐르거니 하면 큰 긍지를 느낍니다.”

​    개신교는 천주교보다 꼭 1백 년 후에 입국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개신교도 그 처음 접촉은 저 멀리 1832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렇다면 우리 개신교도 그 역사가 177년은 되는 셈이다.

​    그렇게 시작한 한국교회인데, 정식 선교 15년 남짓 지나서 1910년,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에서 국제선교회가 모였을 때 벌써 세계교회 전체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그 한 분과위원회에서는 한국교회 성장이 세계역사의 기적이라는 보고서를 낸다. 그뿐만이 아니다. 당시 다른 보고서나 책을 보더라도 한국교회의 성장이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경이적 발전이라던가, 로맨틱하기까지 한, 근대사의 신비라고 해서, 이구동성으로 격찬하고 있었다.

​    그렇게 말할 만한 이유가 많았다.

​    가령, 선교사들은 한국에 첫발을 내딛으면서 그들이 처음 복음을 들고 오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이미 기독교신자들이 많았다. 심지어 성경책도 일부나마 번역 간행되고 있었다. 저들 스스로가 전도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성경책을 전국에 다니면서 보급하고 판매하는 이들도 많았다. 저 벽지 솔내라는 곳에서는 자기들이 벌써 한 집을 마련해 예배를 보고 있었다. 더구나 그 솔내교회는 인도에 기근이 나자 연보를 해서 구제금으로 송금하고 있었다.

​    얼마 후 세계교회는 세계를 금세기 안에 기독교화시킬 수 있다고 외친다. 한국을 보면 그것을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한국교회, 세계의 교회로 자리잡고 있었다.

​    신라 때에 기독교가 들어왔는가

​    한동안 기독교가 신라 때에 들어왔었다는 말들이 많았다. 역사에는 실증되지 아니한 많은 사건들이 유쾌하게 흘러넘칠 때가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이런 것이다.

​    그런 소문은 역사의 사실을 왜곡하고 조작하는 잡류들의 위증으로 한때 기승을 부린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위증이라는 것이 생판 아무 것도 없는 데서 생겨나지는 않는다.

    이 뒷이야기의 근원은 멀리 5세기 초반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네스토리우스라고 하는 아주 경건한 신학자가 예수님이 두 성품, 곧 신성과 인성 두 가지를 각각 따로 가지고 있다는 주장을 하였다. 정통의 교리는 예수님이 한 인격으로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분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의 주장은 곧 이단으로 정죄된다.

​    이단자들은 절대로 자기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그들 나름대로 그 주장으로 순교까지도 한다. 그 수가 정말 엄청나다. 네스토리우스 역시 자기 생각이 옳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것이 로마제국 안에서 수용되지 않는다면, 외국에 가서라도 그 신앙을 확산시키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래서 페르시아에 가서 신학교를 세우고, 많은 선교사들을 사방에 보낸다. 그것이 중국의 당나라까지 파급되어 온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근세에 선교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기 전까지는, 대개 이단들이 해외에 선교사를 많이 보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들의 흔적이 아직 도처에 남아 있다.

​    당나라 수도인 장안에서 네스토리우스파는 그 이름을 경교, 곧 빛의 종교라고 해서 굉장한 발전을 거둔다. 황제 태종까지 경청하고, 조정의 고관들까지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당대의 석학인 위증이나 방현령과 같은 거물들이 신앙을 고백하고, 장안에는 수십 개의 교회당까지 세워졌다고 한다.

​    이런 경교의 성공은 아마도 그 신학에서 찾아봐야 할 것이다. 예수님이 인간성을 따로 가지고 있었다는 교리이니까, 그 훌륭한 인간성의 주장이 중국 전통의 휴머니즘 같은 것에 호소했을 가능성이 크다.

​    그런 생각은 아주 위험한 것이다. 훌륭한 인물들이란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세상이다. 아닌 게 아니라, 영국의 석학 버트란드 러셀도 세계 거대인물로 공자나 소크라테스와 예수를 동격으로 열거하고 있었다.

​     그런데 문제는 신라에까지 이 경교가 들어왔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당시 신라와 당은 외교상으로 매우 친근한 사이였다. 그래서 그 교섭이 잦았다. 김춘추가 장안에 간 일은 많았다. 그는 얼마 후에 신라의 태종무열왕이 된다. 그런 왕래가 한창이던 때에, 신라인들이 그 당시 성황을 이루던 경교를 무심하게 보아 넘길 리가 없다.

​     더구나 유명한 로서아의 중국학자 파라디우스가 경교를 연구하면서, 경교발전의 가장 확실한 근거로서 한 권의 책을 들었는데, 그것은 한국인이 쓴 책이었다. 정하상이라는 19세기 초의 한국인 학자가 쓴 책이었다. 한국인이 경교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증거다.

​     신라 때에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왔었다는 것을 증명을 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별난 수단을 다 썼다. 영국의 저명한 세계여행가이자 탐험가인 엘리자베스 고든이 그중 한 사람이다. 내력은 이렇다.

​     당나라에 기독교에 들어왔었다는 것을 확증하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라고 하는 거대한 비석이 1625년 옛 당나라 서울인 장안에서 발견되었다. 거기에는 네스토리우스파의 한 수도사 아브라함이란 사람이 장안에 처음 오게 된 일이라든가, 그의 사역 그리고 당나라 안에서의 포교 상태가 자세하게 새겨져 있었다.

​     그런데 고든이란 여자가 갑자기 금강산의 장안사라는 절에서 1917년 그와 꼭 같은 비석을 발굴했다고 장광설하였다. 세계 거대신문들은 대서특필하였다. 장안사라고 하는 이름 자체가 당나라 서울 이름을 딴 것이 아니던가. 이로써 신라 때에 기독교가 들어왔었다는 사실이 입증되는 듯하였다. 그런데 그것이 날조된 것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고든이 그 모조비석을 본인이 만들어 밤중에 거기 몰래 갖다가 심어 놓았던 것이다. 희대의 사기극은 이렇게 들통이 났다.

​     신라 때에 기독교가 들어왔었다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반길 일은 절대 아니다. 그런 이단이 만일 들어와서 뿌리를 깊이 박았더라면, 후에 정통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에 심각한 갈등으로 많은 시련을 겪었을 것이다. 지금 근동에 있는 잡종의 군소 동방교회처럼 복음적 기독교의 발전에 커다란 방해가 되었을 것이다.

​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그 경교의 신라 입국을 뒷받침할 만한 몇 가지 사례들이 있다는 점이다. 가령 장보고는 신라의 해운 영역을 인도양까지 확대한 인물로, 세계가 추앙하고 있다. 당시는 형산강이 포항에서 경주까지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그의 항해는 거기에서 저 멀리 페르시아까지 이르고 있었던 터라 신라에서는 페르시아의 상품이 팔리고, 시리아에서는 신라의 상품들이 거래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그가 페르시아에서 당시 유행하던 네스토리아 종교에 흥미를 가졌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우리의 아리랑이 페르시아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들은 일이 있다. 가설이겠지만 흥미롭다.

​     다른 하나는 불국사 경내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 돌십자가이다. 김양선 교수가 그것을 주장했는데, 백낙준 박사는 이것을 의심하여 서로 점잖게 다툰 일이 있다.

​     다 옛날 이야기들인데, ‘성불사 깊은 밤에 그윽한 풍경소리’ 이 노래는 이은상 작사에 홍난파가 작곡한 것이다. 그런데 이 풍경의 모양은 생선이 매달린 모양새이다. 생선이 불교와 그렇게 깊은 관계가 있는지 잘 모르거니와, 기독교와는 확실히 인연이 깊다.

​     확인되지 않은 것들이지만 저 석굴암의 팔복신장상, 금강역사, 사천왕상, 이런 이들의 모습이 인도사람의 것이라기보다는 페르시아계일 것이라는 설이 있다. 우람하고 힘 있는 육체가 그렇다.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들은 아직은 유쾌한 가설로 끝나고 있다. 그리고 사실 그때 이런 이단이 들어오지 않았던 것은 천만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십자군, 몽골 그리고 코리아

​    중세 십자군 전쟁은 세계역사를 바꾸는 역할을 하였다. 동서양 교섭이 시작되어 세계가 비로소 한 덩어리의 단위로 등장한 것이다. 동시에 많은 문학을 낳기도 하였다. 셰익스피어의 거작들은 십자군 전쟁을 배경으로 한 것이 많다. 콜럼버스도 성지 회복을 위한 우회항로를 찾으러 나섰다가 미국을 발견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     그뿐이랴. 그때 한국도 역사의 무대 위에 처음 그 얼굴을 내민다. 그것도 기독교를 통해서이다. 그 내력은 흥미롭다.

​     십자군 전쟁은 성지 팔레스타인 회복을 위해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15차 이상의 원정을 통해서도 결국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도 사실 그때 베니스 상인 돈달라의 농간으로 조각조각 쪼개어져 역사에서 사라지고 만다. 통탄할 만한 일이다. 돈달라의 묘비가 지금 이스탄불의 옛 소피아성당 이슬람박물관 2층에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슬람으로서는 그의 공로가 엄청나기 때문이다. 그 묘비는 필자가 2006년 7월말에 가서 확인했다.

​     십자군전쟁은 교회에 실패의 아픔을 주었다. 그런데 묘한 일이 생겼다. 전쟁의 참화와 좌절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동방에서 굉장한 기마군단 곧 칭기즈칸의 몽골군이 유럽 전체를 휩쓸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이슬람 국가들과 헝가리를 거쳐 폴란드와 핀란드까지 파죽지세로 정복해 갔다.

​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은 묘하게도 상반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세계의 심판이 다가섰다는 공포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희생하면서도 회복하지 못하였던 성지의 이슬람 세력을 괴멸한 이 동방의 군사들을 향한 감사의 감정이었다.

​     교황 인노센트 4세는 몽골의 수도에 사절단을 파견해 칭기즈칸을 만나 감사를 전하게 하려했다. 1246년 그 첫 사절단이 몽골을 행해 떠났다. 그러나 유럽에서 몽골로 가는 길에는 험준한 고비가 가로 놓여 있었다. 바로 고비사막이었다. 그들은 고비사막을 건너는 도중에 죽었다. 그 황량한 길을 다음 사절이 가고, 또 실패하고 또 죽고 하기를 반복하였다.

​     그러다가 마침내 1253년 5월 콘스탄티노풀을 떠난 윌리람 루브르크 일행이 그 고비를 넘었다. 그리고 몽골의 수도에 이르러, 당시 통치자 바투의 아들 사르탁을 만났던 것이다. 이렇게 감격의 시간을 가진 루브르크가 왕실을 나섰을 때의 일이다. 그 뜰을 걸어갈 때 한 여인이 다가섰다. 그리고 그를 멈추게 한 후에 지팡이 끝으로 생선 모양을 그렸다.

​     그 여인은 기독교인었다! 둘이 얼마나 울었을까. 이 세계의 끝 저 동방의 벽지에 어떻게 복음의 씨앗이 흘러갔을까. 자기가 처음 간 줄 알았는데!

​     루브르크는 몽골 곧 원나라가 고려함정을 동원하여 일본을 습격하려고 할 때 압록강까지 왔었다. 그리고 압록강 건너편에 고려가 있다는 글을 교황청에 써 보냈다. 고려 곧 코리아가 서양에 알려지게 된 첫 순간이다.

​     우리나라 이름 코리아는 이렇게 기독교를 통해 세계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     예수의 이름 권세여!

​     한국기독교에서 최초의 순교자는 누구일까. 임진왜란을 거치고 나서 얼마 후에 우리나라 최초의 순교자가 생겼다. 17세기 초반, 그것도 일본에서의 일이다. 일본에 포로로 잡혀간 이들 중에서 21명이나 순교의 면류관을 쓴 것이다. 순교자가 그만큼이었으면 신도 수는 수백 명에 이르렀다는 짐작이 가능하다.

​     한국인들이 정말 언제부터 기독교인이 되었던가. 임진왜란은 일본의 히데요시가 1592년 일으킨 참혹한 한국 정벌의 전란이었다. 그런데 묘한 일은 여기에 기독교가 개입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도요토미는 일본 안에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는 기독교인 군사들을 처리할 방법을 궁리한 것이다. 그만큼 기독교인, 곧 가톨릭 교인의 세력이 일본의 정세에 위협으로 느껴졌다는 이야기이다. 도요토미는 이들 위험세력을 조선정벌에 투입하기로 했다. 이기면 좋고, 지더라도 그런 군사들을 제거하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     일본의 기독교 군사들은 고니시 곧 어거스틴이라고 하는 세례명을 가진 장군 휘하에 있었다. 우리가 임진왜란 TV 드라마를 볼 때 일본군사들이 어깨 뒤 작대기에 십자가 깃발을 휘날리며 싸우던 모습을 본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바로 그들이다.

​     당시 조선에 건너왔던 15만 명의 일본 군사들 중에서 15%는 기독교 군사들이었다고 한다. 더구나 7년 후에 일본 군사들이 다 본국으로 철수할 때 기독인 군사들은 극소수 아니면 전부 다 귀환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사실 그들도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도요토미의 희생이었지 않았던가.

​     그런데 이 기독교군단의 초청을 받아 한국땅을 밟았던 신부가 있었다. 예수회의 세스페데스사가 그 사람이다. 그는 한 반년쯤 있다가 일본에 돌아가는 길에, 일본군이 잡아가는 조선인 포로들의 처참한 광경을 목도한다. 그 수는 어림잡아 5만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들은 노예로도 팔리고 있었다.

​     포르투갈의 선교사들은 이 가련한 포로들을 위해서 복음으로 영생의 길을 열어 주려고 하였다.

​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말이 통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집을 떠나 쓸쓸하고 낯선 땅에서 가혹하게 시달리던 이들에게, 선교사들의 간곡하고도 떨리는 음성이 가슴에 들어왔다. 그들 눈가에 흐르는 눈물이 목을 메이게 하였다. 그들은 예수라고 하는 이름, 그리스도라고 하는 그 이름은 알아들었다. 그것만이 들렸다. 그 이름이 캄캄한 방 한 가운데 환히 한줄기 비치는 빛으로 그들 가슴을 메워왔다. 그들은 알았다. 예수님이 구세주인 것을, 그 이름만으로 알았다.

​     예수의 이름 권세여!

​     그들은 이렇게 수없이 부르짖고 손을 높이 뻗고 있었다. 예수의 이름 권세여, 엎드리세. 천사들!

​     그때 일본에서는 이 예수님의 이름 하나로 수천 명이 예수를 붙들게 되었다. 그리고 수백 명이 감옥에 갇히고, 그리고 21명이 순교하였다.

​     18세기에 이미 복음은 들어와 있었다?

​     임진왜란이 한참이던 1594년 한국에 들어온 스페인 선교사 세스페데스는 한국인과 접촉 없이 금방 돌아갔다. 한국의 기독교역사와는 무관한 행보였다.

​     실제로 한국에 처음 천주교가 들어온 날은 1785년으로 한다. 그리고 꼭 백년 뒤 1885년 우리 프로테스탄트교가 들어온다. 이것이 한국초대교회 역사의 공식적인 첫 장이다.

​     그런데 참 묘한 일이 생긴다. 1758년, 그러니까 천주교가 들어오기 28년 전에 조정의 공식문서인 국조보감에 천주교가 강원도 산골짜기에 전파되고 있다는 보고가 실린다. 이것은 굉장한 사건이다. 당시는 기독교가 금지되어 있었던 때라 목을 당당히 쳐들고 기독교가 들어왔을 리 없다. 숨어서 비밀리에 퍼져나간 것이다. 사실 지방의 관원들이나 심지어 관찰사가 설사 그런 기미를 챘다고 하더라도 숨기기에 바빴을 것이다. 잘못하면 제 목이 달아날 판이었기 때문이다.

​     그런데 강원도는 지금도 아직 벽지다. 거리도 멀고 산들도 많다. 교통이 불편하다. 수양대군이 단종을 정배 보냈다는 곳이 강원도 영월이었다. 1700년대라고 한다면 그곳은 그야말로 벽지였다. 그런데 그때 벌써 거기까지 복음이 숨어서 퍼져갔다는 말이다.

​     조정에서까지 그런 사실을 알게 된 것이 1758년이라고 한다면, 그보다 이미 수십 년 전에 복음이 우리나라에 들어왔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 아닌가. 누가, 어떤 사람이 이런 벽지까지 복음을 들고 갔을까? 무엇 하는 사람들이었을까? 그들 이름은 후대에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하늘나라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돼 있을 것이다.

​     이름 없는 사람들. 교회 역사에는 그런 무명의 사람들이 즐비하다. 처음 바울이 로마인에게 편지를 쓸 때, 그는 가보지도 못한 로마의 기독교인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었다. 누가 그 로마까지 복음을 들고 갔는지 아직은 알 길이 없다. 앞서 살펴본 몽골의 경우도 그렇다. 루브르크는 자기가 맨 처음 거기 간 줄 알았다. 그 전에 갔던 사람들은 다 도중에 죽었다. 그런데 그 궁전 뜰에서 여자 기독교인을 만나지 않았던가.

​     이 산골짝, 아득하게 먼 지방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시골 사람들에 대해서 조정은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방치한 것이다. 당시 선비들이 많이 살던 전라도에서는 단 두 사람이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해서 조정에서는 어마어마한 종교 박해에 나섰다. 그런데 강원도에 대해서는 왜 방치했을까?

​     당시 저 먼 벽지의 백성들은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요, 따라서 신앙도 체계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 세대가 지나가면 그 신앙은 저절로 끊기고 만다. 그런 것을 가지고 미리 박해를 하면서까지 민심을 어지럽힐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선비들이 믿을 때에는 다르다. 신념이 서고, 남을 설득할 수 있는 조리가 서게 된다. 그것은 영속하고 후대에 계승된다. 조정은 그런 것이 위험하다고 본 것이다.

​     두 사람의 뚜렷한 신앙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타나야 온 나라가 떠들썩할 것인가.

​     황사영, 그는 순교자인가 반역자인가

​     가령, 고집 센 아버지와 예수를 잘 믿는 아들이 있다 하자.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의 신앙생활을 끊으려고 한다. 아들은 아버지 말보다도 신앙을 지켜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힘이 센, 예수를 믿는 다른 어른에게 아버지를 주먹으로 혼내달라고 하는 편지를 보낸다. 정 안되면 아버지를 내쫓고 예수 잘 믿는 사람으로 아버지를 대신하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     천주교 신앙을 좇던 황사영이란 청년이 있었다. 그가 1801년 그의 나이 26세에 북경 주교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 대개 이런 것이었다. 가혹한 박해를 피하여 충북 제천의 배론이란 곳에 숨어살던 명석한 두뇌의 황사영은 신경과민 때문인지는 몰라도, 북경 주교에게 일종의 탄원서 같은 것을 보낸다. 폭 62센티미터, 길이 38센티미터 가량의 비단에 1만3천여의 글자를 깨알같이 써놓은 기밀문서이다. 황사영백서라는 것이 그것이다. 한 글자 한 글자가 활자체처럼 정밀한 글씨이다. 그 밀서를 가지고 가던 교인이 황해도 해안가에서 출범 직전에 체포되고, 그리고 얼마 후에 황사영도 체포되었다.

​     그런데 거기에는 상상도 못할 엄청난 반역으로 비칠 만한 글이 들어 있었다. 한국교회의 어려운 실정과 심지어 한국의 나라 형편 전체를 자세하게 알리고 더 나아가 군사력은 세계에서 꼴찌라고 제보한다. 거기까지도 괜찮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천주교 국가들이 연합군을 편성하여 군함 수백 척에 정병 5~6만 명, 그리고 대포들을 가득 싣고 와서 우리나라를 쳐부수라고 호소한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신교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그런 제안이었다. 우리나라가 망하여 그 모양이 없어져도 성교인 천주교에는 해로울 것이 없다는 말이다. 누가 그런 말을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한 말이라고 하겠는가.

​     어느 나라든지 그런 음모를 보고 방치할 나라는 없다. 제 나라를 남보고 치라니! 조야는 그 분노를 삭이지 못하였다. 황사영은 대역모반의 대죄로 능지처사의 처형을 당했다. 가산은 몰수되고 그 어머니는 거제도에, 처는 제주도에, 자녀들은 추자도에 각각 유배의 형을 받았다. 실로 그 가족들이 당한 고초는 말로 형언하기 어려웠다.

​     그뿐이 아니다. 그 백서 때문에 전국에 다시 극렬한 박해가 터져, 3백 명이 넘는 교인이 순교의 피를 흘렸다. 이 백서는 현재 로마 교황청에 보존되고 있다. 1894년 이 백서를 입수한 당시 서울교구장 뮤텔 주교도 그 음모의 대부분이 환상적이고 또 위험천만한 것이었다고 솔직하게 시인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순수한 동기는 의심할 사람이 없다. 방법이 문제였다.

​     황사영은 수재였다. 17살에 진사에 급제하였다. 그래서 정조에게 칭찬도 듣고 축하금까지 받고 있었다. 그리고 저 유명한 정약용의 형인 정약현의 사위었다.

​     황사영은 순교자인가, 패역자인가.

​     초대교회에서는 순교의 진실성조사위원회라는 것을 두고 있었다. 신앙인으로 죽게 되었을 때에 간혹 순교자의 빛을 흐리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해서 조치한 고육지책이었다.

​     정하상은 한국인의 천주교를 꿈꿨다

​     가톨릭교회는 세계적 교회라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천주교회라고 부른다. 중국에서 쓰던 말을 그대로 옮겨 쓴 것이다.

​     ‘천주교’라는 말은 기독교로서는 좀 이상하게 들린다. 서양 가톨릭교회는 로마 가톨릭교회라고만 한다. 그렇게 쓰게 된 내력이 무엇일까.

​     중국에 온 가톨릭선교사들은 굴지의 인물들이었다. 그 중의 하나가 마테오 릿치라고 하는 대석학이다. 그는 중국에 서양과학과 기술을 처음 전파한 인물로 숭앙을 받았다. 그런데 그가 기독교의 교리를 해석하는 책을 하나 냈다. 바로 ‘천주실의’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한때는 ‘천학실의’라고 해서 하늘에 대한 참된 가르침이란 뜻으로 쓰인 때도 있었다.

​     그런데 첫눈에도 여기에 그리스도가 빠진 것이 눈에 띈다. 선교적인 입장에서 중국인들에게 익숙한 상제, 곧 하늘의 신과 연결시키려던 의도가 이렇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기독론보다 신론을 더 중요하게 보았다는 증거이다. 그래서 천주교라고 했다.

​     천주교를 우리나라에 한국적인 종교로 심으려고 애썼던 사람이 하나 있었다. 정하상이 바로 그 사람이다. 정하상은 정약용의 형 정약종의 아들로, 그 삼촌 정약현의 사위가 황사영이다. 황사영이 반역죄로 죽고 나서 39년이 흘렀다. 조정의 암투, 서양선교사들의 대거 밀입국 적발 등 혼란 속에서 1839년 무서운 박해가 다시 터졌다. 순교의 이슬로 사라져간 교인들은 처음에는 즐거이 죽어갔다고 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양처럼 죽어갔다고 한다. 황사영 때보다 훨씬 침착해졌다는 이야기이다.

​     그는 중국을 여덟 번이나 드나들면서 교황청에 한국에 목자를 보내줄 것을 요구했다. 그 열망이 이루어져서 1831년 9월 조선에 교구가 설립됐다. 북경교구에서 독립한다는 교황의 교서가 전달된 것이다. 종교적인 차원이라 할지라도, 한국이 중국에서 독립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천주교가 한국인의 것이 된 건 정하상의 노력 때문이었다.

​     정하상이 한 일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상재상서’라는, 초유의 변증서를 당시 재상에게 올리는 형식으로 썼다. 그 글은 전부 3천 4백자 정도의 간소한 책이지만 그 논리와 변론 및 방법론이 아주 우수하고 명쾌하여, 향후 아세아 전역의 천주교신학교에서 교리학의 교재로 쓰였던 것이다.

​     그는 황사영을 의식하고, 천주교가 한국인의 신앙이 될 수 있고 천주교인들은 다 임금과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애소하였다. 십계명을 자세히 풀이한 것도 그 까닭이었다. 당시 조정이 불교를 기피하는 정책을 쓰고 있어서, 천주교 역시 불교와 전혀 다르다는 점을 명석하게 천명하였다.

​     그는 그 책의 결론부분에서 임금에게 눈물로 호소하고 있다.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만이 어찌 홀로 임금의 자녀들이 아니리이까.” 천주교인들 역시 충효의 규범에 어긋남이 없다는 그의 외침은 한국천주교 역사의 첫 장에 대서특필되고 있다.

​     로버트 토마스, 순교자인가 모험가인가?

​     1890년대 강서지방을 순회 전도하던 모페트 목사가 어느 주막집에서 쉬고 있는데, 방안 사방 벽에 성경책을 뜯어 붙인 벽지가 눈에 띄었다. 그 사정을 주인에게 물었더니 몇 십 년 전 대동강에서 피살된 서양 사람이 건네준 것을 그렇게 벽지로 썼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는 돈을 주고 그것들을 도려냈다.

​     1866년 9월 5일 평양의 대동강에서 순교한 로버트 토마스 목사가 바로 그 서양인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로 기록된 사람이다.

​     그런데 그에 대한 평판이 복잡하다. 북한의 대동강가에 있는 대동문에는 그 참변 이후 줄곧 토마스 목사가 편승하고 왔다가 격침당한 제너럴 셔먼호의 닻줄이 전시되고 있었다. 지금도 있을 것이다.

​     더구나 현재 평양의 대동강변에는 거대한 자연석으로 제너럴 셔먼호 격침기념비가 사람크기 4배 정도의 높이로 서 있다. 거기에는 김일성의 증조부 김응우가 소위 이 미국 해적선을 침몰시킨 장본인으로 찬양되고 있다. 미국 제국주의의 첫 한국침공을 물리쳤다는 선전용이다. 북한에서 토마스는 미국 침략의 장본인이다.

​      그런데 그뿐이 아니다. 토마스 목사를 중국에 파송했던 영국의 런던선교회도 그 방대한 두 권의 역사서 가운데 단 한 줄, “토마스가 대동강에 빠져 죽은 것 같다”는 말만 남긴다. 토마스가 가지 말라는 한국에 가기 위해서 런던선교회에 사직서를 내고 무단으로 임지를 떠났다는 것 때문이다. 더구나 런던선교회 도서관의 사서였던 프레쳐 여사는 필자가 방문하였을 때 자신이 쓴 논문 하나를 주었는데, 그 타이틀은 ‘말을 듣지 않는, 버릇없는 토마스’였다.

     천주교회도 그를 싫어했다. 그는 대동강에서 현지 관리가 따지는 말에 자기는 악명의 천주교회와 같은 사람이 아니고, 프로테스탄트의 훌륭한 교리를 전도하는 사람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고종실록은 이 사건을 매일 기록했는데, 물론 외국 선박의 침략 무법으로 거침없이 매도하고 있다.

​     과연 토마스는 이런 말을 들어도 되는 사람인가. 그의 아버지가 목회하던 영국 웨일즈의 하노바 회중교회에 가면 그 교회 바람벽에 우리에게 익숙한 그의 걸려 있다. 그리고 그 옆에 기념패가 걸려 있다. 거기 욥기의 글이 쓰여 있다. “나의 날이 다 갔고, 내 경영, 내 마음의 사모하는 바가 다 끊어졌구나.”

​     그가 중국에 도착하고 얼마 안 되어 함께 온 아내는 세상을 떠났고 그는 현지 선교사들과도 사이가 안좋아 중국을 떠나고 싶어했다. 모험심이 강한 토마스는 항해 목적이 모호한 미국선박 제너럴 셔먼호가 한국에 간다는 소문을 듣고 여기 편승, 천주교 박해로 소란한 한국을 향했던 것이다. 당시로서는 한국에 오는 길이 군함 아니면 상선이었다. 순교할 때 그의 나이 스물여섯이었다.

​     그는 한국에 복음의 씨앗을 심다가 순교한 첫 선교사다. 그것은 사실이고 진실이다. 그런데 그에 대한 평가는 매우 다르다. 바로 이런 평가를 받으면서 선교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인 것이다.

​     교회 안에 갈등은 언제부터 있었나?

​     교회 안에 갈등이 있다는 사실은 듣기 거북하다. 사랑과 용서를 말하는 교회가 스스로 갈등에 시달린다는 것이 이해하기 힘들다. ‘갈등’이란 같은 그룹 안에서의 대결을 두고 하는 말이다.

​     하지만 교회 안에는 처음부터 갈등이 있어왔다. 베드로와 바울도 서로 생각이 달라서 다툰 일이 있으며, 루터와 츠빙글리는 언성을 높였고, 올리버 크롬웰은 조지 폭스와 관계가 좋지 않았다.

​     한국에 복음을 전한 선교사로 잘 알려진 알렌과 언더우드는 언쟁을 자주 하였다. 평양의 사무엘 마펫과 서울의 언더우드는 평생 그 감정의 골이 깊었다. 연희전문학교 설립문제가 평양과 서울 선교사들 전체의 감정문제로까지 파장이 커졌던 것이다.

​     우리는 교파가 나뉘게 된 신학적인 논쟁을 두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갈등이 아니다. 논쟁이고 주장이다.

​     우리나라 천주교가 중국에서 그 교구를 독립할 때 문제가 시끄러웠다. 1839년 9월 9일의 일이다. 지난 5천 년 동안 한국은 여러 방면에서 중국에 시달려왔는데, 그에 대한 독립의 한 모습으로 천주교 조선교구가 북경교구에서 독립을 한 것이다. 교황 그레고리 16세가 그런 대사를 이루어 냈다.

​     그런데 그런 경사스러운 사건에도 갈등이 있었다. 그것은 교황이 조선 제1대 주교로 부르기에라는 프랑스 신부를 임명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     당시 한국을 비롯한 동양의 선교는 포르투갈 신부들이 맡게 되어 있었다. 그 내력은 멀리 149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교황청은 신흥 해운국인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경쟁을 가라 앉히기 위해서 세계를 양분하여 그 지역을 배분한 일이 있다. 그때 대서양 서쪽은 스페인이 맡았고, 그 동쪽 곧 아세아는 포르투갈이 맡았다. 그래서 동양에는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     그렇다면 당연히 조선의 독립된 교구 주교도 포르투갈 신부가 임명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엉뚱하게도 프랑스 신부가 임명되었던 것이다.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반대가 거세었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     그런데다가 중국교회 역시 이런 조선교구의 독립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조선이 중국의 종속관계 속에 있는 형편으로 감히 독립을 하다니. 중국교회의 방해도 극열하였다. 조선에 들어와 있었던 중국신부는 교인들을 부추겨 반대운동까지 벌였다.

​     부르기에 주교는 결국 이 모든 방해와 반대에 부닫쳐 압록강을 건너오지 못하고 만주 땅에서 세상을 떠나고 만다. 한국교회가 주교를 거부한 것이다.

​     당시는 한국교회는 핍박을 받고 있었다. 순교자들이 수백 명을 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이런 갈등으로 지새다니 이해하기가 힘들다. 밖의 핍박이 심할수록 안에서는 더욱 결속을 다져야 할 것이 아닌가. 죽음을 각오하고 믿었던 우리 천주교인들인데 이런 갈등에 휘말려야했던 내력이 구슬프다.

​     교회도 어쩔 수 없는 인간들의 모임이라는 생각이 든다. 은총만이 교회를 거룩하게 한다.

​     교회 안에 갈등이 있다는 사실은 듣기 거북하다. 사랑과 용서를 말하는 교회가 스스로 갈등에 시달린다는 것이 이해하기 힘들다. ‘갈등’이란 같은 그룹 안에서의 대결을 두고 하는 말이다.

​     하지만 교회 안에는 처음부터 갈등이 있어왔다. 베드로와 바울도 서로 생각이 달라서 다툰 일이 있으며, 루터와 츠빙글리는 언성을 높였고, 올리버 크롬웰은 조지 폭스와 관계가 좋지 않았다.

​     한국에 복음을 전한 선교사로 잘 알려진 알렌과 언더우드는 언쟁을 자주 하였다. 평양의 사무엘 마펫과 서울의 언더우드는 평생 그 감정의 골이 깊었다. 연희전문학교 설립문제가 평양과 서울 선교사들 전체의 감정문제로까지 파장이 커졌던 것이다.

​     우리는 교파가 나뉘게 된 신학적인 논쟁을 두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갈등이 아니다. 논쟁이고 주장이다.

​     우리나라 천주교가 중국에서 그 교구를 독립할 때 문제가 시끄러웠다. 1839년 9월 9일의 일이다. 지난 5천 년 동안 한국은 여러 방면에서 중국에 시달려왔는데, 그에 대한 독립의 한 모습으로 천주교 조선교구가 북경교구에서 독립을 한 것이다. 교황 그레고리 16세가 그런 대사를 이루어 냈다.

​     그런데 그런 경사스러운 사건에도 갈등이 있었다. 그것은 교황이 조선 제1대 주교로 부르기에라는 프랑스 신부를 임명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     당시 한국을 비롯한 동양의 선교는 포르투갈 신부들이 맡게 되어 있었다. 그 내력은 멀리 149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교황청은 신흥 해운국인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경쟁을 가라 앉히기 위해서 세계를 양분하여 그 지역을 배분한 일이 있다. 그때 대서양 서쪽은 스페인이 맡았고, 그 동쪽 곧 아세아는 포르투갈이 맡았다. 그래서 동양에는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     그렇다면 당연히 조선의 독립된 교구 주교도 포르투갈 신부가 임명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엉뚱하게도 프랑스 신부가 임명되었던 것이다.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반대가 거세었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     그런데다가 중국교회 역시 이런 조선교구의 독립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조선이 중국의 종속관계 속에 있는 형편으로 감히 독립을 하다니. 중국교회의 방해도 극열하였다. 조선에 들어와 있었던 중국신부는 교인들을 부추겨 반대운동까지 벌였다.

​     부르기에 주교는 결국 이 모든 방해와 반대에 부닫쳐 압록강을 건너오지 못하고 만주 땅에서 세상을 떠나고 만다. 한국교회가 주교를 거부한 것이다.

​     당시는 한국교회는 핍박을 받고 있었다. 순교자들이 수백 명을 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이런 갈등으로 지새다니 이해하기가 힘들다. 밖의 핍박이 심할수록 안에서는 더욱 결속을 다져야 할 것이 아닌가. 죽음을 각오하고 믿었던 우리 천주교인들인데 이런 갈등에 휘말려야했던 내력이 구슬프다.

​     교회도 어쩔 수 없는 인간들의 모임이라는 생각이 든다. 은총만이 교회를 거룩하게 한다.

​     서양인 선교사 귀츨라프가 남기고 간 것

​     1832년 7월 하순 폭풍우가 매섭게 치던 날이다. 충청남도의 고대도, 안면도 앞바다에 있는 조그마한 섬에 서양선박이 하나 광풍에 밀려 들어왔다. 배 안에는 특별한 사람이 한 명 타고 있었다. 칼 귀츨라프라는 선교사였다. 이 선박은 화란의 동인도회사 소속 선박으로 한국의 해안까지 왔다가 그런 변을 당한 것이다.

​     옛날 선교사들이 선교하러 해외에 나갈 때 타고 가는 배는 둘 중 하나였다. 상선 또는 군함이다. 토마스 목사도 상선을 타고 왔던 것이다. 근대에 선교가 서양의 식민지 확장과 관계있다는 모함과 악담의 근거가 이것이다.

​     귀츨라프는 1826년 런던선교회의 파송으로 시암(Siam) 곧 지금의 월남에 왔던,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     선교사는 항상 최고의 인재가 선발돼야 한다. 당시 동양에 왔던 서양 선교사들은 놀라울 정도의 학문과 인품, 신앙이 출중한 인물들이었다. 귀츨라프 역시 목사요, 의사이며, 어학의 천재였다. 세계 지리 역사에 능통한 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중국어와 시암어, 그리고 일본어로 성경을 번역하였던, 보기 드문 천재적 어학자였다.

​     동인도회사는 그런 그를 필요로 했고 선교가 목적이었던 그 또한 동양에 가는 유일한 교통기관이었던 그 회사의 선박에 통역 겸 의사로 탑승하였던 것이다.

     그는 한국에 있는 동안 장연의 장산곶과 백령도, 강경지방까지 순방한 것으로 기록돼 있으나, 얼마나 오래 머물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두 달 정도가 아니었을까 추측할 뿐이다. 그곳 교회들 가운데 귀츨라프의 탐방 유적을 만든 곳이 있다.

​     그는 한국에 머무는 동안 만나는 사람에게마다 한문성경책을 주었다. 그들 중 한 명이라도 그 성경책을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었다면…. 그 귀한 역사의 흔적들을 우리는 왜 보존하지 못했을까!

​     그의 공로는 그가 세계 안에서의 한국의 위치를 처음 일깨워준 데 있었다. 그는 제주도를 답사하고는 그 아름다움에 숨일 막힐 정도로 매혹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예리한 눈으로 그 세계적 위치를 알아보고는 제주도가 세계 자유무역의 중심지가 될 수 있다는 예언을 한 것이다. 놀라운 비전이다. 그 비전이 실현되는 모습을 지금 우리가 보고 있지 아니한가.

​     더 나아가 그는 한국의 지리적 자연적 풍요와 우리 민족의 총명에 놀랐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 확신한다. 그리고는 한국인의 무관심으로 이 아름다운 국토가 방치되는 것에 가슴 아파한다. 천혜의 자원이 개발되는 것은 오직 복음이 들어오는 날에만 가능하다고 확신하였다. 그는 이 땅이 기독교로 세계 굴지의 나라가 될 것이라고 외치며 떠났다. 그의 말은 백번 천번 옳았다.

​     우리가 가진 소중한 것을 알게 해준 것이 기독교이다. 1882년 우리나라와 영국이 수호조약을 맺을 때 영국 대표였던 하래스 파카 경은 그의 조카였다. 귀츨라프는 후에 북경의 영국공사관 상무관으로 봉직하면서 아시아 개발에 지대한 공적을 남겼다.  

​                                                                                    <참고문헌>

     1. 성경환, "민경배 목사의 '한국역사 그 뒷이야기'", 2021.3.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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