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바보 이덕무의 죽음과 깨뜨리지 못한 서얼 차별
창덕궁 주합루에서 바라본 후원 전경. 정조는 주합루 1층에 규장각을 만들고 친위 학자 세력을 키웠다. 그 가운데 서얼출신 검서관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과 서이수도 있었다. 하지만 훗날 정조는 이 서얼 출신들을 "배우(광대)로 기른다"라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이덕무는 그 발언이 있고 일년 뒤에 죽었다. /박종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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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에서 이성으로, 이름을 바꾼 왕
정조가 즉위한 1776년 5월 22일 조선 정부는 호조에 속한 공무원 산학산원(算學算員) 명칭을 주학계사(籌學計士)로 바꿨다. 충남 논산에 있는 이산(尼山)이라는 지명은 이성(尼城)으로 고쳤다.(1776년 5월 22일 ‘정조실록’) 정조 이름은 ‘李祘’이었는데, 이 ‘祘’자 발음이 ‘산’이었다. 그래서 같은 발음인 ‘산학산원’과 ‘이산’의 ‘산’을 바꿔버린 것이다.(박철상, ‘서재에 살다’, 문학동네, 2014, p26)
1800년 7월 정조가 죽고 즉위한 아들 순조는 ‘이성(尼城)’으로 개칭된 이산을 이번에는 ‘노성(魯城)’으로 고쳤다. “선왕 이름과 음이 비슷하다”는 이유였다. 9일 뒤 대사헌 이성보(李城輔)가 자기 이름을 ‘직보(直輔)’로 개명하게 해달라고 상소했다. 이 또한 정조와 이름 발음이 같다는 게 이유였다.(1800년 8월 20일, 29일 ‘순조실록’) 이보다 4년 전인 1796년, 정조 명에 의해 편찬된 중국어 발음사전 ‘어정규장전운(御定奎章全韻)’에는 이 ‘祘’을 ‘임금 이름에 쓰는 글자(御諱·어휘)’라고 소개하고 그 발음을 ‘셩(省)’이라고 적고 있다. 스스로 자손 번성을 위해 자손이 많은 서성(徐渻·1558~1631)이라는 인물 이름으로 발음을 교정했다는 분석도 있다.(안대회, ‘정조 어휘의 개정: 이산과 이성’, 한국문화 52,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10)
이름을 스스로 바꿀 정도로 변화에 적극적이었던 왕, 정조였고 실제로 많은 변화가 그 시대에 벌어졌다. 오늘 할 이야기는 그 변화 가운데 조선 망국 때까지 사회를 갉아먹었던 서얼(庶孼) 문제와 책 바보 이덕무 이야기다.
'어제규장정운'에 표기된 '祘'의 발음. '셩(생)'으로 기록돼 있다./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박종인의 땅의 歷史] 293. 책 바보 이덕무의 죽음과 깨뜨리지 못한 서얼 차별
첩 자식도 관직에 등용하라
즉위 이듬해인 1777년 3월 21일 정조는 문무관 인사 담당 부서인 이조와 병조에 이리 명했다. “첩 자식 숫자가 몇 억만 되겠느냐. 그중에 쓰임이 될 사람이 있을 터인데 쓰지 않았으니 모두 바짝 마르고 누렇게 뜬 얼굴로 나란히 죽고 말 것이다. 등용하라.”(1777년 3월 21일 ‘정조실록’)
어명을 받은 이조는 서둘러 서얼 등용 대책 보고서를 올렸다. 보고서는 이렇게 시작했다. ‘처음 한 사람의 건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지만 결국은 백년의 고질적인 폐단이 되고 말았다.’
그 ‘처음 한 사람’ 이름은 서선(徐選)이다. 1415년 6월 25일 태종에게 우부대언 서선이 “서얼 출신은 관직 금지” 진언을 올렸다. “정도전 같은 패악한 서얼 출신 무리가 나오지 않도록 아예 서얼의 벼슬을 막아야 한다”는 명분으로, 정적이었던 정도전이 서얼 출신임을 이용해 이를 조선 왕국 정책으로 제안한 것이다.(박지원, ‘연암집’ 3, 서얼소통을 청하는 소) 이는 경국대전에 규정됐고, 조선시대 모든 첩 자식은 홍길동처럼 법적으로 유리 천장에 눌리고 사슬에 얽매인 2등 백성으로 살았다.
그 첩 자식들을 관직에 등용하라는 파격적인 어명이었다.
2년 뒤인 1779년 정조 친위 학자집단인 규장각에 책을 교정하고 검수하는 ‘검서관’이라는 직제가 신설됐다. 초대 검서관 4명은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서이수였다. 모두 서얼이었다. 당연했다. 처음부터 ‘서얼 가운데 문예가 있는 사람 4명’이 등용 대상이었으니까.(1779년 3월 27일 ‘정조실록’)
이덕무(38)가 가장 나이가 많았고, 유득공(31), 서이수(30), 박제가(29)는 또래였다. 모두 세간에 문장가로 이름 알려진 서얼들이었고, 사는 곳도 대사동(大寺洞·현 인사동 부근)으로 같았다. ‘찾아가면 집에 돌아가는 것을 까마득히 잊고 열흘이고 한 달이고 머무는’ 그런 사이였다.(박제가, ‘정유각문집’ 1, 백탑청연집 서)
영민하되 불우했던 그 첩 자식들에게 출세 길이 열렸다. 이들과 친했던 연암 박지원은 “가히 특이한 일이나(可謂奇矣·가위기의) 진기한 재주가 있는 사람들이니 버림받지 않았고(盛世抱珍自無遺捐·성세포진자무유연), 이제 굶어 죽지는 않겠다”라고 기뻐했다.(박지원, ‘연암집’ 3, 홍대용에게 보내는 편지3)
이덕무의 기쁨
정조에게 학문은 지적 탐구 대상이며 정치 수단이었다. 스스로를 군주와 스승이 합친 군사(君師)라 부르고, 스스로를 모든 지식과 지혜가 발원하는 ‘만 갈래 강을 비추는 밝은 달의 늙은 주인(萬川明月主人翁·만천명월주인옹)’이라고 불렀다.
그를 지원하는 핵심 조직이 규장각이다. 즉위하던 1776년 창덕궁 후원에 설립한 규장각에서 정조는 학자들을 매를 때리며 가르쳤다. 1781년 궐내각사로 이전할 때까지 규장각은 역대 왕 기록을 보관한 주합루 1층에서 왕실 기록은 물론 청나라 서적까지 망라한 도서관 겸 학술기관으로 기능했다.
‘네 검서관이 꼬리를 물며 열흘에 한 번 숙직을 할 만큼’(이덕무, ‘청장관전서’ 12, 희시료우(戱示寮友)) 일은 고됐다. 게다가 겨우 몸이나 지탱할 정도로 몸집이 가냘팠다.(‘청장관전서’, 윤행임, ‘아정유고’ 서) 하지만 이덕무는 열심히 즐겁게 일했다. “지존(至尊)께서 좋은 벼슬을 내리셨으니 과거 급제와 다를 바 없다”며 과거 응시도 하지 않고 일했다.(‘청장관전서’, 간본 아정유고 8, 선고부군(先考府君)의 유사(遺事))
이덕무 글씨. 서얼 출신으로 정조에 의해 규장각 검서관에 임명된 이덕무는 스스로 '책 읽는 바보' 간서치라 불렀다. /국립중앙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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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서치와 고금도서집성
이덕무는 독서광이었다. 그가 짧게 자서전을 썼는데 제목이 간서치(看書痴), ‘책 읽는 바보’였다. ‘그의 방은 매우 작았다. 동, 서, 남으로 창이 났는데 해를 따라 밝은 곳에서 책을 읽었다. 심오한 뜻을 깨치면 매우 기뻐서 일어나 왔다 갔다 하는데, 마치 갈까마귀가 짖는 듯하였다. 조용히 아무 소리도 없이 눈을 크게 뜨고 멀거니 보기도 하고, 혹은 꿈꾸는 사람처럼 혼자서 중얼거리기도 하니 사람들은 간서치라 했다.’(‘청장관전서’ 4, 간서치전)
1777년 정조 명에 의해 청나라 백과사전 ‘고금도서집성’이 수입됐다. 5000권이 넘는 이 책은 규장각에 보관됐고, 왕과 규장각 각신만 열람할 수 있었다. 이듬해 이덕무가 사신단원으로 청나라에 갔는데, 빠져 있던 몇 권을 찾아냈다. 이에 정조가 특별히 그에게 열람을 허락하니 ‘손수 그 5000여 책을 열람해 평생 안목을 저버리지 않게 되었다.’(‘청장권전서’ 57, 앙엽기 4)
책으로 마음은 부유했다. 가난 탈출은 하지 못했다. 그래서 ‘’맹자’ 일곱 권을 팔아 밥을 잔뜩 해먹고 유득공에게 자랑을 했다. 유득공 또한 오래 굶었던 터라 즉시 ‘좌씨전’을 팔아 같이 술을 먹었다. 맹자가 밥 지어주고 좌구생이 술 권해주었으니 우리는 두 사람을 한없이 찬송했다. 책을 팔아 취포(醉飽·취함과 배부름)를 도모함이 솔직한 일임을 알았다. 서글프다.’(‘청장관전서’, 간본 아정유고 6, 이서구에게 주는 편지)
서얼을 위한, 서얼만을 위한
이덕무는 청나라에도 알려진 시인이었다.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과 함께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이라는 시집을 출간한 ‘사가시인(四家詩人)’이었다. 그 덕에 파격적인 벼슬을 얻은 것이고. 하지만 검서관은 최말단인 9품에 불과했다. 게다가 적자는 응시하지도 않는, ‘서얼을 위해 신설된 벼슬’이었다. 1779년 가을 정조가 검서관들에게 시를 지으라 명했다. 넷 가운데 이덕무 시가 1등으로 뽑혔다. 정조는 수시로 과거 시험지를 직접 채점하던 왕이었지만, 이번에는 채점자가 왕이 아니었다. 왕이 아니라 규장각 각신(閣臣)들이었다.(‘청장관전서’ 20, 아정유고 12, ‘규장각팔경’)
이런저런 한계 속에 미관말직에 만족하며 책으로 마음을 불리던 서얼들에게 어느 날 날벼락이 떨어졌다.
문체반정과 이덕무의 슬픔과 죽음
1791년 10월 정조가 명말청초 문집 수입을 금지시켰다.(1791년 10월 24일 ‘정조실록’) 정조는 성리학을 제외한 모든 학문을 ‘이단’으로 규정한 뒤 “아득히 옛 사람인 공자를 다시 밝히려면 요즘 유행하는 문체를 금지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름하여 ‘문체반정’이다. 청동기시대인 공자 시대 필법을 부활시키면 민간 뒷골목에서 유행하는 패관(稗官) 문체로 전파되는 서학(西學)을 억누를 수 있다는 논리다. ‘열하일기’를 쓴 박지원이 패관문학 주동자로 지목돼 경고를 받았다.
1787년 패관소설을 읽은 규장각 문신들이 적발돼 반성문을 쓰기도 했다. 우아한 고문체로 반성문을 제출한 김조순은 훗날 정조의 사돈이 되어 세도정치 문을 열었다. 문체반정을 선언하고 한 달 뒤인 11월 12일 정조는 홍문관과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된 서양 서적을 태워버리라 명했다.(1791년 11월 12일 ‘정조실록’)
청나라 사행 경험이 있는 네 검서관은 그 패관문학에 매료된 문인들이었다. 서양 서적 분서령이 떨어지기 엿새 전, 정조가 어전회의를 소집하고 이렇게 말했다. “이덕무, 박제가 무리는 문체가 전적으로 패관과 소품에서 나왔다. 이들을 규장각에 두었다고 해서 내가 그 문장을 좋아하는 줄 아는데, 아니다. 이들의 처지가 남들과 다르기 때문에 나는 이들을 배우로 기른다(予實俳畜之·여실배휵지).”(‘홍재전서’ 165, 일득록 5 문학 5: 1791년 11월 6일 ‘일성록’)
충격적인 말이었다. ‘쓰임이 있는데 쓰지 않은 인재’라고 적극 중용하라 했던 그 서얼들이 정조에게는 다름아닌 광대였던 것이다. 1년이 갓 지난 1793년 정월 25일 아침, ‘지존(至尊)께서 내리신 좋은 벼슬’에 기뻐하다 광대 취급을 받은 소심한 이덕무가 조용히 죽었다. 정조 이름 ‘祘’을 ‘산’에서 ‘성’으로 바꾼 ‘어정규장전운(御定奎章全韻)’ 제작을 막 끝낸 때였다.(박지원, ‘연암집’ 3, 형암(炯菴) 행장(行狀)) 1777년 정조 명에 의해 만든 서얼 등용 보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분수를 모르고 명분을 괴란시키는 서얼은 적자 능멸죄로 다스린다.’
<참고문헌> 1. 박종인, "책 팔아 잔뜩 밥해 먹고 자랑하고 나니 서글퍼졌소", 조선일보, 2022.3.2일자. A3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