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의 비밀
"선조들에게 옥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다양한 옥의 아름다움과
숨겨진 의미를 알아볼까요?"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가진 돌
옥은 일찍부터 진귀한 보석으로 여겨졌습니다. 단단한 재질에 아름다운 색깔을 가졌고, 구하기 어렵다는 희귀성 때문이었죠. 옥이라고 하면 보통 [백색]이나 [암녹색]을 띠는 연옥(軟玉)과 경옥(硬玉)을 떠올리기 쉽지만, 우리나라 여러 유적에서는 암석의 일종이면서 진한 [청록색]을 띠는 천하석(天河石)이나 수정·호박·홍옥수·흑옥·유리 등 다양한 재질의 구슬들이 발견됐습니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이를 모두 포괄해 옥이라고 부르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옥은 신석기 시대 유적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고성 문암리 유적에서 동그랗게 생긴 고리 모양의 옥이 발견된 것이죠. 귀걸이로 사용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옥은 신석기 시대 주로 몸을 치장하던 용도로 사용됐죠.
청동기 시대로 들어서며 옥은 권력자들의 권위와 신성함을 높여주는 상징물로 활용됩니다. 청동기 시대 때의 고인돌이나 돌널무덤에서는 천하석으로 만든 '굽은옥'[曲玉]과 벽옥으로 만든 '대롱옥'[管玉]이 주로 발견됐죠. 옥으로 만든 화살촉이 나오기도 합니다.
초기 철기 시대의 무덤에서는 청동검과 청동거울·굽은옥이 세트로 발견됐는데, 보통 검(劍)·경(鏡)·옥(玉)을 제사장이 가진 세 가지 신성한 보물로 부르죠. 무기인 청동검은 힘과 권력을 상징하고, 햇빛을 반사할 수 있는 청동거울은 태양을 상징합니다. 여기에 더해 푸른빛이 도는 옥은 사악한 기운을 없애 주며 제사장의 신성함을 높인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죠. 당시 지도자들은 이런 귀한 물건들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서, 다른 사람과 자신을 차별화했습니다. 그러면서 권력을 꾀할 수 있었죠.
금이나 비단보다 귀한 보석, 구슬
중국의 역사책 '삼국지'에는 3세기 무렵 한반도 중부와 남부 지역의 이야기가 일부 담겨 있습니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대목이 나오죠. 마한 사람들이 "영주(瑛珠)를 보물로 여겨 옷에 꿰매어 장식하기도 하고, 목이나 귀에 달기도 하지만 금은(金銀)과 비단은 보배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기록의 '영주'는 구슬이나 옥을 가리키죠.
이 기록에 남아있는 것처럼 삼한의 무덤 대다수에서는 막대한 양의 구슬이 출토됐지만, 금이나 은으로 만든 장신구는 거의 출토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발견된 구슬이 너무 많아 정확히는 알기 어렵지만, 100만 점이 넘을 것으로 예상돼죠. 이런 구슬들은 대부분 목걸이나 귀걸이로 사용됐습니다. 또 옷에 매달린 형태로 발견되기도 하고, 시신 주변에 뿌려지거나 그릇에 담긴 채 발견되기도 했죠.
한반도 중부 이남에서 금이나 은을 사용한 건 삼한 사회가 백제와 신라·가야로 발전한 4세기 이후부터입니다. 하지만 그 뒤에도 구슬을 장신구로 사용하는 풍습은 계속 이어졌죠. 지역마다 선호하는 구슬이 조금씩 달랐습니다. 백제 유적에서는 다양한 색깔의 유리구슬이 가장 많이 발견되고 있죠. 김해에서는 유독 수정으로 만든 다면체 옥이 많이 발견되고, 경주에서는 유리그릇을 비롯한 장신구가 더 많습니다.
이에 반해 고구려 유적에서는 구슬이 거의 출토되지 않았죠. 삼국지에 따르면, 고구려 사람들은 공적인 모임을 할 때 비단에 수놓은 옷을 입고 장식을 금과 옥으로 했다고 합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백제나 신라·가야와 달리 구슬을 그다지 애용하지 않았던 것이죠.
바닷길 건너온 유리구슬
우리나라는 기원후 2세기 무렵부터 유리구슬을 자체적으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전엔 모두 무역으로 들여왔죠. 서울 풍납토성이나 해남 군곡리 조개 더미에서는 유리를 만드는 데 사용한 거푸집이 발견되기도 했죠. 하지만 초기의 유리 제작용 거푸집은 깨진 유리를 분말 형태로 만든 다음 재활용하는 데 사용하는 정도였습니다.
본격적으로 유리가 생산된 건 6~7세기 무렵이죠. 특히 백제의 왕궁이 있었던 익산 왕궁리 유적은 대규모 유리 공방의 흔적이 발견된 곳으로 유명합니다. 구슬을 특별히 좋아한 마한이나 백제 사람들은 해상 실크로드를 이용해서 유리구슬과 유리 제작에 필요한 원료를 수입했죠. 실크로드라고 하면 보통 넓은 초원과 사막을 따라 무리지어 움직이는 낙타 행렬을 떠올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고대에는 초원길과 다른 중요한 무역로가 있었으니, 바로 해상 실크로드를 말하는 것이죠.
한반도 서남부 지역에서 성장한 마한과 백제는 새롭게 열린 해상 실크로드 교역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유리구슬은 주요 교역품이었죠. 예를 들어 붉고 투명한 색깔의 홍옥수(紅玉髓)는 인도를 비롯한 남아시아에서 주로 생산됐는데, 동남아시아와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왔습니다. 마한 지역에서만 지금까지 4000점 이상의 홍옥수 구슬이 발견됐는데, 1~2세기에는 김포·서산·고창 등 서해안을 따라 분포하다가 3~4세기가 되며 점차 내륙으로 확산되는 모습이 확인되죠.
유리구슬 위에 금박을 입힌 다음, 그 위에 다시 유리로 코팅해서 두 겹의 층을 가진 구슬도 있습니다. 금박유리옥으로 불리죠. 기원전 3세기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처음 만들어져서 주변 지역으로 전파됐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기원전 1세기부터 유통되기 시작했습니다. 금박유리옥은 가야 지역에서 거의 발견되지 않고 마한·백제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됐는데, 이들이 생산과 유통의 주체였던 것 같죠.
공주 무령왕릉에서는 3만점이 넘는 유리구슬이 발견됐습니다. 다양한 모양에 주황색·황색·녹색·적갈색 등 색깔도 다양했죠. 성분도 조금씩 다르고 만드는 데 여러 기술도 동원됐는데, 성분 분석 결과 유리를 만드는 원료에 포함된 납의 산지가 태국이라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백제가 중국 남조뿐 아니라 동남아시아 여러 국가와 활발하게 교류했던 것을 짐작할 수 있죠.
쉼표처럼 생긴 굽은옥
곡옥(曲玉)으로도 불리는 '굽은옥'은 초승달 모양에 한쪽 끝에는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목걸이 장식으로 주로 활용됐죠. 중국이나 아시아 일부 국가에도 이와 비슷한 형태의 굽은옥이 발견되긴 하지만, 굽은옥은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크게 유행했습니다. 그 형태와 의미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죠. 생명의 탄생을 의미하는 태아라거나 여성인 달을 상징하는 초승달, 음양을 나타내는 태극, 맹수의 용맹을 상징하는 송곳니 등 다양한 설이 있습니다.
굽은옥은 흙이나 유리·경옥·수정·홍옥 등 다양한 재료로 만들어졌는데, 특히 5세기 무렵부터는 비취색을 띤 경옥으로 많이 만들었죠. 비취색 경옥은 미얀마와 일본 등에서만 생산됐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원석이 수입됐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참고문헌>
1. 이병호, " [옥(玉)] 신석기 시대부터 장신구로 사용···삼국 시대엔 금·은보다 귀했죠", 조선일보, 2022.1.27일자. A2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