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단상
세상살이가 그다지 바쁘지 않은데도 친구 만나는 일이 쉽지 않다. 몇 년 동안 못 보다가 경조사 때나 반가운 얼굴들을 만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세월의 흐름에 따라 경조사의 내용도 달라지는 것 같다. 몇 년 전만 해도 부모의 상가를 찾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부모가 아닌 친구의 상가를 찾는 일이 많아졌다. 어디 친구뿐이랴. 후배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도 가끔 접한다. 세상에는 순서대로 왔지만 가는 데에는 순서가 없는 모양이다.
몇 년 전에 아주 친한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 어렸을 때 한동네에 살았던 그 친구는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내밀한 이야기, 부끄러운 비밀까지도 다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친구였다. 서로 다른 지역에 살아서 잘 만나지는 못했지만 전화로는 자주 소식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그 친구가 하루아침에 저세상으로 가 버렸다. 그때 처음 든 생각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였다. 평소에 인간이란 온갖 불확실성 속에 대책 없이 방치된 존재라고 믿어 왔지만, 이런 비보는 애초에 내 사전에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마지막 카톡에 답장이라도 해 줄걸…. 때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가족의 상실감이 무엇보다 크겠지만, 나 역시 한동안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를 잃었다는 상실감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아무리 사람의 앞일은 모른다지만, 그 친구가 그렇게 황망히 세상을 떠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친구와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2013년 여름이었다. 오랜만이었지만 별로 중요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냥 수다만 떨었던 것 같다. 세상에. 수다만 떨다니. 어떻게 친구와의 마지막 만남을 수다로 허비할 수 있지? 억장이 무너진다.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다. 내 앞에 놓인 친구의 ‘실체적 죽음’이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고 보면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아직 죽음을 생각할 나이는 아니라고 여겼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오만한 착각이었는지 곧 알게 되었다. 그 후로도 친구, 후배, 선배의 죽음이 줄줄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 죽음들은 하나같이 나에게 “이제 너도 죽음을 생각할 나이야”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오늘 아침, 그다지 가깝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멀지도 않은 누군가의 부고를 접했다. 이제는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내 곁에 죽음이 성큼 다가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리하여 나는 참으로 성가신 일이기는 하지만, ‘죽음’에 대한 내 생각을 정리할 필요를 느낀다. 일종의 죽음에 대한 입장문이라고나 할까.
독일의 작가 헤르만 헤세는 죽음을 ‘영원한 잠’에 비유한 ‘잠자리에 들 때’라는 시를 썼다. 아내가 정신병에 걸린 데다가 그 자신도 병이 든 상태에서 쓴 시이다. 여기에서 그는 낮 동안 너무 힘들게 일했으니 이제는 별밤을 맞은 어린아이처럼 영원한 잠 속으로 침잠하고 싶다고 얘기한다. 헤세가 말년에 쓴 이 아름다운 시에, 역시 말년을 맞은 작곡가 리하르트 게오르크 슈트라우스(1864∼1949)가 곡을 붙였다. 그 작품이 ‘네 개의 마지막 노래’의 세 번째 곡인 ‘잠자리에 들 때’이다.
헤세나 슈트라우스나 모두 죽음을 이승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슈트라우스는 ‘속박에서 벗어난 내 영혼은 자유롭게 하늘로 날아오르리’라는 가사에다 정말로 하늘을 훨훨 나는 것 같은 분위기의 선율을 붙였다. 나는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점점 사라지는 것을 느낀다. 죽음은 영원한 잠, 영원한 휴식이니까. 그냥 존재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니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아일랜드 민요 ‘오! 대니 보이’는 ‘나는 당신이 나에게 올 때까지 그저 평화롭게 잠자고 있을게요(I simply sleep in peace, until you come to me)’라는 가사로 끝난다. 죽음을 맞았을 때, 내가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문장 중에 ‘심플리(simply)’라는 단어가 특히 마음에 든다. 나는 그렇게 아무 걱정 없이 ‘그저’ 편안하게 잠들어 있을 것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내 친구도 아마 편안하게 잠자고 있을 것이다. 육체는 스러지고, 남는 것은 기억뿐이다. 나는 점점 희미해지는 기억의 조각들을 끄집어내 친구와 함께했던 소중한 시간들을 열심히 추억하고 있다. 나는 내세를 믿지 않기에 친구에게 ‘다시 만날 때까지’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설사 내가 죽는다 하더라도 우리가 다시 만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친구와 같은 상태 즉, 존재의 무(無)로 돌아갈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에서 무한한 친근감, 동료 의식을 느낀다.
나는 살아 있는 동안 단 일 분 일 초의 시간도 낭비하지 않고 충분히 ‘살아 있음’을 누릴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홀연히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다. 하지만 사실 ‘홀연히’ 사라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시점에서 내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 죽음으로 이르는 과정이 너무 고통스럽지 않기를, 너무 고통스러워 ‘살아 있음’ 자체를 저주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것뿐이다.
<참고문헌>
1. 진회숙, "살며 생각하며", 문화일보, 2022.1.28일자. 3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