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세종대왕의 리더쉽 글쓴이 신상구 날짜 2022.04.06 15:16
                                                                      세종대왕의 리더쉽    
    “왜 길가에 구경하는 백성이 한 명도 없는가?” 1444년(세종 26년) 5월 5일 청주 초수리에서 돌아오는 길에 세종이 한 말이다. 두 달 전 내려갈 때와 달리 관광(觀光)하는 백성이 안 보이는 이유를 승정원에 알아보게 했다. 조사 결과, 인민들의 왕의 수레 앞 하소연을 경기관찰사 이선(李宣)이 금지시켰음이 드러났다. 이 보고를 받은 세종은 “국가에서 사람을 보내 백성들의 이해를 살피려 하면, 수령들이 미리 단속해서 감춘다는 말을 내가 일찍이 들었는데, 이제 비로소 그 실상을 알았다”면서 자기 허물을 덮어 가리려는[欲掩己過·욕엄기과] 경기관찰사를 파직시켰다. 세종까지도 경험한 “옹폐(壅蔽)”, 즉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지도자의 눈과 귀를 가리는 일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흔히 발생하는 현상이다. 옹폐라는 말은 조선왕조실록에 333회나 검색된다.

조선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세종은 어떻게 옹폐의 장막에서 벗어났나? 첫째, 세종은 백성들의 실태를 잘 알고 있는 낮은 직급의 관리인 수령을 자주 만났다. 재위 기간 세종이 수령을 친견한 횟수는 무려 392회나 됐다(월 1.03회). 조선 왕조에서 왕이 지방 수령을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눈 것은 세종 때부터였다. “수령의 임무는 지극히 무겁다”면서 세종은 “내가 백성의 일을 직접 살필 수 없으므로 그대들을 보내는 것이니, 부디 백성 사랑하는 일을 힘써 행하라”고 당부하곤 했다.

   둘째, 세종은 관리들을 돌아가며 만나는 윤대(輪對)라는 제도를 도입해 국사를 보고받고 세세한 내용까지 파악했다. 재위 초반인 1425년(세종 7년) 6월 23일 예문관 대제학 변계량은 왕의 총명을 넓혀서[廣聰明·광총명] 왕의 눈과 귀를 가리고 막는 폐단[壅蔽之患·옹폐지환]을 없게 할 뿐 아니라, 신하들의 뛰어나고 그렇지 못한 점[群臣之賢否·군신지현부]까지도 임금이 헤아릴 수 있는[聖鑑·성감]” 윤대 제도 도입을 제안했다. 세종은 그 제안을 받아들여 약 4개월 뒤인 1425년 10월 6일부터 1437년(재위 19년)까지 거의 12년 동안 윤대를 거행했다. 윤대하는 신하들에게 세종은 “이 제도를 마련한 것은 임금의 과실(過失)과 시행하는 정책의 잘잘못[得失·득실]과, 민간의 어려운 사정[疾苦·질고], 그리고 신하들의 사사로움과 정대함[邪正·사정]을 듣기 위함”이며, 아울러 숨어 있는 인재를 뽑고자 함이니 소속 관청의 작은 문제까지 두루 아뢰라고 지시했다(세종실록 12년 윤12월 8일).

   셋째, 옹폐를 벗어나기 위해 세종이 가장 중시한 점은 어전회의의 활성화였다. 즉위 후 첫째로 한 말이 “의논하자”였던 세종은 신하들이 속에 있는 진실된 말을 다 하게 했다. 그는 경연이라는 세미나식 어전회의를 매주 한 번 이상 개최했다. 왕 앞에서 머리를 숙이거나 땅에 엎드리지 말고[無俛伏·무면복] 곧은 자세로 말하게 했다. 그럼에도 자유롭게 토론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세종은 “내가 의논하라고 한 것은 서로 논박하면서[互相論駁·호상논박], 각기 마음속에 쌓인 바는 진술하라[各陳所蘊·각진소온]”는 뜻이라면서 속말 꺼내기를 당부하곤 했다. 긴급 사안이 발생하면 관계자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會于一處·회우일처) 의논하게 하되, 일의 잘된 것과 잘못된 것을 모두 말하게 했다. 반대 의견이라도 끝까지 경청했으며, 토의가 미흡하면 종일토록 토론하게 했다(세종실록 1년 12월 17일).

   인의 장막을 벗어나기 위한 세종의 노력은 재위 기간 내내 지속적으로 이뤄졌다. 재위 7년째인 1425년 7월에 그는 “가뭄이 너무 심하다. 기후가 순조롭지 못하여 이러하니, 장차 벼농사 형편을 나가보리라”하면서 서대문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금년 벼농사는 꽤 잘 되었다는 주위 관리들의 말과 달리 논들이 말라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것을 본 세종은 “오늘 이곳에 와 보니 실로 눈물이 날 지경이다”라면서 관리들의 거짓 보고를 탄식했다. 이날 행차에 세종은 다만 그날 당번인 호위군관만 거느리고 다니면서, 벼가 잘 되지 못한 곳을 보면 반드시 말을 멈추고 농부에게 까닭을 물었다고 한다[問於農夫·문어농부]. 경호를 최소화하고 단기 필마로 백성들 속으로 들어간 세종은 들판의 농부들에게 무엇이 제일 아쉬우며, 어떤 것을 도와주면 좋을지를 물었다.

   이제 곧 새 대통령이 대한민국호를 이끌게 된다. 거의 모든 최고 권력자가 놓쳤던 점이 옹폐의 장막이었다. 현장을 찾아가 문제의 원인을 발견하고, 백성과 더불어 문제를 풀어나갔던 세종의 지혜에서 배우길 바란다.
                                                                             <참고문헌>
   1. 박현모, "세종은 어떻게 인의 장막을 극복했나?",  조선일보, 2022.4.5일자. A33면. 


시청자 게시판

2,426개(27/122페이지)
시청자 게시판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시청자 게시판> 운영원칙을 알려드립니다. 박한 75251 2018.04.12
1905 조롱당한 선조와 그 장자 임해군의 악행 사진 신상구 1397 2022.06.19
1904 한국 문학, 노벨 문학상 수상 인프라 수준 신상구 534 2022.06.18
1903 고대의 축제 사진 신상구 705 2022.06.18
1902 6·10 만세 운동 사진 신상구 936 2022.06.11
1901 경제, 존경받는 기업인이 많아져야 한다 사진 신상구 658 2022.06.08
1900 <특별기고> 6월 호국보훈의 달의 역사적 의의와 제67회 현충 사진 신상구 728 2022.06.08
1899 윤서열 대통령의 제67회 현충일 추념사 전문 신상구 496 2022.06.07
1898 한암당 이유립의 생애와 업적 사진 신상구 713 2022.06.05
1897 백가의 반란과 동성왕의 죽음 사진 신상구 1298 2022.06.03
1896 연금개혁을 통한 복지의 지속가능성 확보 사진 신상구 552 2022.06.02
1895 30년간 천착했던 모네의 수련, 용산에 피다 사진 신상구 690 2022.06.01
1894 부여 ‘신동엽문학관’ 문학 성지로 자리매김 신상구 872 2022.06.01
1893 우리 아이들에게 삶을 즐길 권리를 되찾아 줍시다 [1] 신상구 829 2022.05.28
1892 과거는 유교국가 떠받치는 인재풀, 조선판 능력주의 사진 신상구 541 2022.05.28
1891 ‘청주대 출신’ 성악가 연광철, 대통령 취임식서 ‘애국가’ 사진 신상구 916 2022.05.27
1890 인간적이라는 것 사진 신상구 557 2022.05.27
1889 1세대 건축가 김중업 탄생 100주년 사진 신상구 724 2022.05.27
1888 중국에도 이름 떨친 한석봉(한호) 이야기 사진 신상구 816 2022.05.26
1887 <특별기고> 의암 손병희 선생의 생애와 업적과 100주기 추도 사진 신상구 1181 2022.05.26
1886 선조가 명나라 망명을 포기한 이유 사진 신상구 1326 2022.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