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핀란드 만하임과 한국 윤보선의 공통점과 상이점 글쓴이 신상구 날짜 2022.01.30 03:54

                                                 핀란드 만하임과 한국 윤보선의 공통점과 상이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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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반 순록을 돌보고 있는 핀란드의 수렵 유목민 사미족. 핀란드 국부로 불리는 칼 만하임은 러시아 식민지 시절 실크로드 일대를 탐사하며 조국의 뿌리를 찾으려 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picryl.com]


   유라시아의 양쪽 끝에 있는 한국과 핀란드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의외로 공통점이 많다. 두 나라 모두 오랜 기간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다가 2차대전 전후에 독립했다. 우랄-알타이어 일파들로 예전부터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또 다른 공통점이 있으니, 두 나라 모두 독립 전후한 상황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대통령을 배출했다. 한국의 제2대 대통령인 윤보선은 영국 에든버러대 고고학과를 졸업했고, 핀란드의 국부인 칼 만하임은 실크로드를 탐사한 탐험가 출신이다.

   지금도 흔치 않은 직업인 고고학과 관련 있는 사람이 이 두 나라에서 대통령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과거 역사와 문화재를 통해서 자주독립의 의지를 불태우고자 했기 때문이다. 박물관의 유물 뒤에 숨어있는 치열했던 문화재 전쟁의 뒷이야기를 달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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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여행 중 현지 주민들과 함께한 칼 만하임(왼쪽에서 셋째). [사진 위키피디아, picryl.com]


   칼 구스타프 만하임(1867~1951)은 2차대전 전화 속에서 핀란드의 독립을 지켜낸 대표적인 영웅이다. 그가 젊은 시절에 핀란드는 스웨덴과 러시아에 종속됐던 식민지로 마치 일제강점기 일본군에 복무했던 한국인처럼 만하임은 러시아 장교로 근무했다. 그는 러·일전쟁에도 참여했으며 능력을 인정받아 러시아 군대의 고위 장교직에도 올랐다.

   러·일 전쟁 패배 이후 아시아 진출의 전략적 가치를 인식한 제정러시아는 만하임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린다. 러시아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베이징에 이르는 길을 정탐하라는 것이었다. 바로 당시 세계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실크로드를 의미한다. 일찍이 19세기부터 러시아와 영국은 실크로드를 둘러싼 ‘그레이트 게임’을 벌인 바 있다. 러시아는 그 관심을 중국으로 이르는 길로 확대했고, 그 첨병으로 젊은 장교 만하임을 발탁했다. 1906~1908년까지 만하임의 탐험대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중앙아시아, 신장 위구르 자치주, 티베트를 거쳐 베이징까지의 길을 탐사했다.

   만하임이 목숨을 건 험난한 여정을 자청한 목적은 사실 다른 데 있었다. 비록 스웨덴어와 러시아어에 더 능통했고 정작 핀란드어는 서툴렀지만 만하임은 핀란드인이었다. 그에게 조국 핀란드가 부탁한 또 다른 임무가 있었다. 바로 헬싱키(핀란드의 수도) 박물관에 전시할 핀란드인의 기원과 역사를 밝혀줄 동아시아 역사 유물을 최대한 많이 수집해오라는 것이었다. 그는 탐사 결과 사진 1500여장과 유물 1000여 점을 수집했다. 왜 핀란드인은 자신들의 기원을 동아시아에서 찾으려고 했을까. 그 시작은 그들의 언어였다.

                                                  우랄-알타이어족, 그 기원과 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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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반 유목생활을 한 핀란드 사미족. [사진 위키피디아, picryl.com]


   흔히 한국어의 기원을 이야기하면 빠짐없이 등장하는 이야기가 ‘우랄-알타이어족’이다. 우랄-알타이어족설은 핀란드 학자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그 처음은 19세기 핀란드 학자 마티아스 카스트렌(1813~1851)으로, 핀란드 언어는 시베리아의 여러 원주민과 비슷하여 같은 어족이라고 밝혔다. 그의 뒤를 이은 핀란드의 또 다른 학자 구스타프 람스테트(1873~1950)가 한국어도 우랄-알타이어족에 속한다고 주장한 것에 유래했다.

   사실 이때 ‘알타이’라는 말을 붙인 이유는 알타이가 시베리아에서 가장 중심에 위치한, 가장 유명한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한국인의 기원을 알타이 지역이라고 생각하는 오해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여하튼 우랄-알타이어족 이론은 100여 년 전의 불충분한 자료로 정립된 것이기 때문에 지금 그것을 그대로 믿는 학자는 없다. 여러 나라 언어를 하나로 묶는 ‘어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유럽의 주요한 언어인 ‘인도-유럽어군’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까닭이다. 광활한 유라시아에는 맞지 않는 이론을 억지로 시베리아와 한국의 언어에 끼워 맞춘 격이었다.

   핀란드인이 우랄-알타이어 이론을 정립했던 숨은 배경은 단순한 역사 연구가 아니라 그들의 정체성을 밝히려는 희망이었다. 당시 핀란드인은 슬라브 계통의 러시아와 북게르만어 계통의 스웨덴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들과 완전히 다른 아시아에서 기원한 핀란드인의 정체성은 2차대전을 거쳐 그들의 독립으로 이어지는 원동력이 됐다.

   실크로드 탐사 이후 만하임은 군인으로 복무하면서 러시아와의 겨울 전쟁을 주도하여 힘들게 독립을 지켜내는 주역이 됐고, 지금도 국부로 추앙받고 있다. 점령군 러시아의 고급장교에서 독립영웅으로 거듭난 계기는 바로 실크로드 탐사였다. 만하임의 머나먼 실크로드 원정은 핀란드의 기원을 밝히고 독자성을 찾는 길이었다. 그는 수오미(핀란드를 스스로 부르는 말)인이 스웨덴과 러시아 사이에서 제3의 노선을 걸으며 조국 독립을 일구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한국 최초의 고고학 전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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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 만하임


   우리나라 제2대 대통령인 윤보선(1897~1990)은 1923년 영국으로 유학을 가서 1930년에 에든버러대 고고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고학 전공자였다. 그는 왜 힘들게 유학을 떠나서 지금도 보기 드문 고고학을 전공으로 택했을까.

   윤 대통령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인간의 본성을 연구하고 정치적인 성향을 알기 위해서는 고고학만한 학문이 없다고 생각했다. 식민지 상황에서 일본이 가르치는 역사가 제대로 됐을 리가 없었다. 그는 새롭게 발굴되는 과거의 유물을 통하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고자 했다. 그가 유학 후에 한국에 돌아와서 고고학과 유물 보존에 힘쓸 수 있었다면 그의 가치가 더욱 빛났을 것이다.

   만하임과 달리 윤보선은 한국에 돌아와서 고고학과 관련한 활동을 할 수 없었다. 당시 한국을 지배한 일제는 모든 문화재 발굴에서 한국인을 철저하게 배제했다. 윤보선 이후로 일제강점기 중에 도유호·김재원 등 몇 명이 더 고고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그들도 해방이 되고 난 후에야 비로소 우리 문화재를 조사할 수 있었다.

                                                     독립국가의 상징인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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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국주의는 다른 나라의 문화재를 전리품처럼 경쟁적으로 훔쳐왔다. 그리고 약탈당한 문화재는 반대로 그들로부터 독립하는 신생국가의 자존심과 독립국가의 정체성이 됐다. 핀란드·터키·한국과 같은 신생 독립국은 공통으로 과거의 역사와 문화재를 그들을 하나로 만드는 구심점으로 사용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신라 금관이 대표적이다. 1921년에 경주 금관총에서 금관과 황금유물이 발굴되자 일제 관리들은 일부를 일본으로 빼돌리고 다른 신라 고분도 도굴하기에 바빴다. 반면에 경주 시민들은 우리 역사의 상징인 신라 금관을 지키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모금하여 전시실을 만들어 헌납했다. 식민지의 문화재를 둘러싸고 한국과 일본 간에 보이지 않는 경쟁이 벌어졌다. 이렇듯 문화재는 결코 과거의 골동품이나 박물관 전시품이 아니다. 특히 20세기 이후엔 식민지와 독립국 간의 전쟁터와 같았다.

                                                      과거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

   지금도 문화재를 둘러싼 한·일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 20세기에는 수천 년 전의 역사를 두고 분쟁이 있었다면 지금은 그 분쟁이 근대 이후로 확산하고 있다. 몇 년 전 일본은 군함도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올리면서 그들의 속셈을 드러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되 한국인 강제동원의 역사를 명기한다는 조건으로 통과가 됐다.

   하지만 일본은 그 약속을 전혀 지키지 않았다. 강제동원 부분을 삭제하고 홍보하며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최근에도 사도광산에 ‘세계문화유산’ 테두리를 덮어서 그들의 침략을 호도하려 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의 기억이 희미해지는 지금 일본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라는 제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한다. 이렇듯 문화재는 단순히 흘러간 흔적이 아니라 지금 우리와 이어지는 현재진행형의 역사다. 핀란드나 한국 같은 신흥국가 대통령들이 고고학과 인연이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셈이다.
                                                                       <참고문헌>
   1. 강인욱, "핀란드 만하임과 한국 윤보선...같은 공부, 다른 길", 중앙일보, 2022.1.28일자.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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