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세계사] "불편하지만 불행하진 않다"… 꿈 향해 끊임없이 나아갔죠
▲ 헬렌 켈러는 19개월째 되던 때 청각과 시각을 잃었어요. 이로 인해 언어장애를 겪게 됐죠. 하지만 가정교사인 앤 설리번의 가르침 속에서 지적·정신적 성장을 이뤄갑니다. 사진은 켈러(왼쪽)와 설리번의 모습. /위키피디아
매년 4월 20일은 '장애인의 날'입니다. 1981년 우리나라에서 제정했어요. 그런가 하면 유엔(UN·국제연합)이 1992년 지정한 '국제 장애인의 날'도 있는데요. 매년 12월 3일 세계 각국에서 행사를 개최하고 있죠. 세계 역사에는 장애를 극복하고 놀라운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 많은데요. 이들의 삶을 살펴볼까요.
휠체어에서 우주를 상상한 천재
스티븐 호킹은 1942년 영국의 옥스퍼드셔에서 태어났어요. 수학과 물리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1959년 17세에 옥스퍼드대 자연과학 전공 장학생으로 선발됐고, 케임브리지대에서 물리학을 전공했어요.
그러다 그는 갑자기 몸의 움직임이 둔해지는 것을 느꼈고, 스물한 살에 병원에서 '루게릭병' 선고를 받습니다. 이 병은 근육이 점점 수축되다가 마침내 수축이 심장 근육에까지 이르면 사망하는 병이에요.
이후 호킹은 심한 우울증을 앓았어요. 하지만 그는 "나는 사형선고를 받았고 지금은 집행유예 기간이다. 하지만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다"며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삶의 의미를 찾기 시작한 거예요.
그는 휠체어에 앉아서도 온 정신을 우주의 신비를 밝히는 데 쏟아부었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기반으로 "우주의 시공간이 빅뱅으로 탄생해서 블랙홀로 사라진다"는 이론을 폈어요. 근육이 마비돼 책 한 장조차 넘기기 힘든 상황에서도 암산으로 수학 문제를 풀면서 끊임없이 연구했죠. 이후 호킹은 "블랙홀이 물질을 빨아들일 뿐만 아니라 뱉어내기도 한다"는 '호킹 복사' 이론을 제안해 물리학계에 큰 업적을 남겼어요.
그는 43세 때 폐렴으로 기관절개술을 받고 목소리를 완전히 잃어요. 그러자 손가락으로 키보드를 치는 방식 등으로 의사소통을 했어요. 루게릭병이 심해져 얼굴 근육을 제외한 온몸이 마비된 뒤에는 얼굴 근육과 눈동자의 움직임을 음성으로 변환하는 컴퓨터 장치를 사용하며 연구를 계속했어요. 그가 1분에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6~10개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1988년에는 우주 탄생의 비밀과 블랙홀에 대한 자신의 학문적 결실을 담은 '시간의 역사'라는 대중 과학서도 출간했어요.
그는 특유의 유머와 유쾌함을 잃지 않았어요. 2006년 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선글라스를 끼고 가발을 써도 이 휠체어 때문에 나인 것이 다 들통나고 만다"며 농담을 하기도 했죠. 호킹은 2012년 런던 패럴림픽 개막식에서 "발밑을 내려다보지 말고 고개를 들어 별을 바라보라"며 "우리는 모두 다르다. 표준적인 인류라는 것은 없지만, 모두 똑같은 인간 정신을 공유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자신의 마음속에서만큼은 자유로웠다고 한 그는 2018년 76세로 세상을 떠나 웨스트민스터사원의 아이작 뉴턴과 다윈 곁에 안치됐습니다.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한계 극복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로 칭송받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1770년 독일 본에서 태어났어요. 그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지만 궁정가수로 활동했던 아버지 밑에서 지나치게 엄격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음악 교육을 받았죠.
그러다 20대 후반 그에게 난청이 찾아왔어요. 왼쪽 귀부터 높은음을 듣지 못하게 되다가, 결국 청력을 완전히 상실한 거예요. 베토벤은 처음엔 사람들 만나는 것을 꺼리고 말수도 줄어들었다고 해요. 음악가로서 고뇌와 절망에 빠진 그는 32세 때 유서까지 썼죠.
그런데 베토벤은 유서를 쓰면서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던 음악에 대한 열정을 깨닫습니다. "내가 가진 예술적 재능을 펼칠 수 있다면 설령 내 운명이 아무리 가혹할지라도 죽고 싶지는 않다."
베토벤은 내면세계에 침잠(沈潛)하며 작곡에 치열하게 매달리기 시작했어요. 조화성을 추구한 당시 음악에 맞서, 예측 불허의 리듬과 불협화음, 유연성으로 과감한 자유와 일탈을 보여줬죠. 바이올린 소나타인 '크로이처', 교향곡 3번 '영웅', 교향곡 5번 '운명' 등의 걸작이 쏟아져 나왔어요.
그는 1827년 57세로 세상을 떠난 후에도 슈베르트·브람스·바그너 등 수많은 음악가에게 많은 영향을 줍니다. 전 세계에서는 지금까지도 그의 곡이 끊임없이 연주되고 있죠.
장애인 위한 사회운동에 뛰어들어
1880년 미국 앨라배마주에서 태어난 헬렌 켈러는 19개월째 되던 때 뇌척수막염을 심하게 앓고, 후유증으로 청력과 시력을 잃었어요. 이로 인해 언어장애를 겪게 됐죠. 이 때문에 대여섯 살 때까지 사람을 할퀴거나 때리는 정도로밖에 의사 표현을 하지 못했다고 해요.
켈러가 6살 때 어머니 케이트 애덤스 켈러는 퍼킨스 맹아 학교를 통해 앤 설리번(1866~1936)을 가정교사로 모셔 옵니다. 설리번은 켈러의 손바닥에 글씨를 쓰는 방식으로 언어를 가르쳤어요. 그녀의 헌신적인 가르침 속에서 켈러는 지적·정신적으로 놀라운 성장을 이루기 시작했죠.
켈러는 호레스만 청각 장애 학교를 다니려고 10살 때 뉴욕으로 이사했어요. 그 후 목의 진동과 입의 모양을 만지며 느끼는 방법으로 발성법도 배우게 됐죠. 1904년에는 래드클리프 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합니다. 1908년에는 촉각과 미각·후각을 통해 세상을 알아 간 과정을 담은 저서 '내가 사는 세상'을 출간했죠.
그는 사회운동에도 뛰어들었어요. 장애인을 위한 사회적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며 정치인들을 설득하고, 매사추세츠주 사회당에 입당해 여성의 참정권 운동도 지지했어요. 켈러의 행보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그녀의 신체적 장애를 조롱하는 인신공격을 퍼붓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어요. "나는 노동자를 착취하는 공장과 빈민가를 방문했다. 볼 수 없을지라도 냄새는 분명히 맡을 수 있었다. 사회적으로 눈이 안 보이고 귀가 안 들리는 것이 더 심각한 병이다."
켈러는 1961년 고질적인 뇌졸중 증상으로 공적인 생활에서 은퇴했어요. 1964년 린든 존슨 대통령에게 미국의 최고 시민상인 '대통령 자유 훈장'을 받은 그녀는 1968년 코네티컷주에서 88세로 생을 마감했어요. "장애는 불편하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아니다"라는 그녀의 말은 삶에 대한 그녀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피터팬 창조한 왜소증 작가]
스코틀랜드 작가 제임스 배리는 성장이 더딘 왜소증 때문에 늘 아이 취급을 받았어요. 하지만 그는 이런 경험을 통해 자라지 않는 아이인 '피터팬'을 창조해냈죠. 전설적인 복싱 영웅 무하마드 알리는 선수 생활 때의 후유증으로 퇴행성 뇌 질환인 파킨슨병을 앓게 됐어요. 하지만 쉴 새 없이 흔들리는 몸으로도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개회식 때 성화 최종 주자로 나서 전 세계인에게 뭉클한 감동을 줬습니다.
- ▲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청력을 잃었지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로 칭송받아요. /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