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끈질긴 근대화 시도, 결국 성공, 동양 3국 지
300. 갑오년 삼국지 운명의 청일전쟁⑧/끝 시모노세키조약과 종전
시모노세키 풍경(風景) 1: 승자
일본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 부두에는 ‘춘범루(春帆樓)’라는 연회장이 있다. 복어 요리 전문 요리점이다. 일본어로는 ‘슌판로’라고 읽는다. 분관은 기념관이다. 기념관 이름은 ‘일청강화기념관(日淸講和記念館)’이다. 1895년 4월 17일 이홍장이 이끄는 청나라 협상단과 이토 히로부미가 대표인 일본 협상단이 청일전쟁 강화조약을 체결한 장소다. 그 협상 테이블이 복원돼 있다. 안내문에 따르면, 협정 당시 가구와 물품은 지역 유지들에게 선물로 줬다가 매년 체결 기념일이 되면 춘범루에서 공개 행사를 가졌다. 춘범루 입구에는 전쟁과 협상을 주도한 일본 내각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와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 흉상이 서 있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300. 갑오년 삼국지 운명의 청일전쟁⑧/끝 시모노세키조약과 종전
시모노세키 풍경 2: 패자
기념관 광장 건너편에는 산등성이를 따라 작은 포장길이 나 있다. 길 이름은 ‘이홍장도(李鴻章道)’다. 1895년 3월 19일 시모노세키에 도착한 청나라 협상단은 다음 날 여기 춘범루에서 협상을 시작했다. 협상 닷새째인 3월 24일 이홍장이 미치광이 극우 괴한한테 총격을 받았다. 얼굴을 다친 이홍장은 보름이 넘은 4월 10일에야 회담에 참석했다. 그때 보안과 안전을 위해 큰길 대신 숙소인 인접사(引接寺)에서 춘범루까지 왕복했던 소로가 이 이홍장도다. 안내문은 이홍장도가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소개한다.
시모노세키 풍경 3: 희생자
기념관 건너편 해변 아미타사공원(阿弥陀寺公園)에는 찾는 이 드문 기념비가 서 있다. ‘조선통신사 상륙엄류지지(朝鮮通信使上陸淹留之地)’ 기념비다. 1607년부터 1764년까지 11차례 대마도를 거쳐 여기 시모노세키에 상륙한 뒤 에도(현 도쿄)까지 에도막부를 찾았던 조선통신사를 기념하는 기념물이다. 2001년 한국 포천 화강석을 가져와 만든 이 기념비에는 중·한·일·영 4개국어로 이렇게 적혀 있다. “선진 문화국인 조선의 문화 사절로서 세련된 학문, 화려한 예술, 뛰어난 문화의 향을 전했다.”
1895년 1월 정신 못 차린 중국
이미 1894년 가을부터 중국에는 곧 전쟁이 평화적으로 끝나리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것도 ‘11월 7일 이전’이라고 날짜까지 박힌 소문이 돌았다. 국가 존망이 걸린 전쟁이었지만, 평화적 조기 종전을 원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날은 음력 10월 10일로 서태후 환갑연이 예정된 날이었다.
환갑연은 주력 군사인 북양함대 건설 예산까지 전용하며 준비한 이벤트였다. 만주족이 아닌 한족이며 개혁파인 이홍장을 못 미더워하던 권력층도 차츰 종전(終戰)을 위해 이홍장에게 모든 권한을 맡기는 쪽으로 여론이 형성됐다. 책임도 함께.(권혁수, ‘이홍장의 조선인식과 정책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사논문, 1999, p307)
환갑잔치는 예정대로 치렀다. 잔치에는 조선 정부가 보낸 사신단도 참석했다. 사신단 부단장은 조선 왕비 민씨 조카인 민영철이었다.(1894년 음4월 24일 ‘고종실록’) 그리고 11월 15일 이홍장은 측근 장지동(張之洞) 의견을 좇아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종전 대가로 조선을 포기한다.’(‘電稿’3, ‘江督張來電’ 등: 권혁수, 앞 논문, p308, 재인용)
1895년 1월 착각 속 조선
그리고 이듬해 3월 이홍장 일행이 시모노세키를 찾았다. 사전 협상에서 이미 조선 독립과 전쟁 피해 배상 및 영토 할양이라는 종전 조건이 제시된 상태였다. 조선 독립은 1895년 1월 27일 일본 대본영 어전회의에서 강화조건 제1조항으로 결정된 사항이었다. 국제관계 속 조선은 이렇게 조선이 빠진 중일 양국 회담장에서 나올 서류 한 장에 그 운명이 달려 있었다. 일본 결정 사흘 뒤인 1월 30일 조선정부는 내무아문령을 통해 “아직도 청나라를 사모하는 부도덕한 역적은 처벌한다”고 발표했다.(1895년 음1월 5일 ‘고종실록’) 이 발표가 일본 결정과 어떤 직접적 관계가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 사이 고종은 “청나라 국경에 군사를 강화하라”는 상소를 받아들이고, 총리대신 김홍집은 “일본의 승리로 조선왕국 독립권이 인정됐으니 칙사를 파견하자”고 제안했다. 고종은 “개선한 일본군에 음식을 내려주라”고 답했다.(1895년 음2월 2일, 12일 ‘고종실록’) 분명히 전쟁의 결과 조선은 공식적으로 500년 속국 상태에서 벗어나긴 했는데, 어딘가 궁색하고 어색했다. 일본 천황이 대본영 장성들과 함께 조선 독립을 약속한 의도를 고종과 갑오정부는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500년 학정 개혁’이라는 국내 모순 타파에 몰두한 개혁정부는 일본이 가지고 있던 제국주의적 의도를 읽지 못했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10년 넘도록 청나라로부터 직접 통제를 받은 고종 또한 사대로부터 해방된 권력 행사를 꿈꿨을 뿐이었다.
치유 불능한 청 황실 부패
종전 협상은 사전 협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청일 양국 대표단은 절대 다수 미국과 유럽 유학파로 구성됐다. 일본은 대표인 이토 히로부미 본인부터 영국과 독일 유학파였다. 중국 일등참찬관 마건충은 1882년 임오군란 당시 흥선대원군을 납치할 때 배석했었고, 그해 조선이 미국과 조약을 맺을 때도 상국(上國) 감독으로 참관했던 인물이었다.
그런 ‘상국’이 근대 강국 일본과 참으로 굴욕적인 종전을 했다. 조약 1조는 속국 조선 독립이었고 치러야 할 배상금은 은화 2억냥과 요동반도, 대만 할양이었다. 훗날 3국간섭으로 요동반도를 돌려받은 중국은 그 대가로 은화 3000만냥을 추가로 배상해야 했다. 이홍장은 조선 독립을 조건으로 대만 유지를 주장했지만 중국은 조선도 대만도 잃었다.
그리고 중국은 ‘근대(近代)’로 가는 동력 또한 완전히 상실했다. 3년 치 세출 예산에 달하는 배상금을 갚기 위해 청 황실은 막대한 외채를 도입했다. 그럼에도 황실은 서태후 유락 시설인 이화원 공사를 속개했다. 서태후 명에 의해 ‘수입산 아편에 붙는 아편세’를 전액 이화원 공사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1898년에는 외국산과 국내산 아편 전매시장을 설치해 정부가 직접 구매해 판매하기로 결정했다. “악마의 풀(惡卉·악훼)”이라는 상소가 올라왔지만 무용지물이었다.(戚其章, ‘颐和園工程與北洋海軍’, 社會科學戰線 1989(04), 吉林省社會科學院) 청조 부패는 그 어떤 약으로도 고칠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해 있었다. 춘범루 옆 ‘이홍장도’는 중상을 입은 그 천자국을 상징했다.
초대받지 못한 옛 손님, 조선
이미 임진왜란 10년 전인 1582년 10대 소년 4명을 바티칸에 파견해 유럽을 목격한 일본이었다. 1641년 나가사키에 개설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통해 유럽 학문과 정보를 수입해 서양 근대 문물을 접해왔던 나라가 일본이었다. 19세기 서양 제국주의가 아시아를 집어삼킬 때 강병과 부국을 국가 정책으로 택해 근대화 작업에 뛰어든 일본이었다.
춘범루 건너편 조선통신사 기념비문은 ‘화려’ ‘찬란’ ‘선진’ 따위 미사여구로 가득하다. 하지만 18세기 이후 문화와 문명의 선진성은 일본으로 넘어갔다. 돈을 써가며 얻을 정보도 학문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1811년 이후 일본은 조선통신사를 더 이상 받지 않았다. 1881년 고종이 일본에 보낸 조사시찰단(신사유람단) 단원 어윤중은 조선보다 훨씬 강한 일본을 목격하고 이리 말했다. “이웃 나라의 강함은 우리나라에 복이 아니다(隣國之强 非我國之福也·인국지강 비아국지복야).”(어윤중, ‘종정연표’ 2, 1881년 12월 14일)
일본이 자기 마음대로 가지고 놀기 위해 조선을 독립시켰고, 조선은 그리 되었다. 협상 타결 두 달 뒤 고종은 “조선 독립을 경축하라”며 독립기념일 제정을 명했다.(1895년 음5월 10일 ‘고종실록’) 얼토당토않은 착각이었다. 일본 정부는 배상금으로 4년치 국가예산을 확보하고 교육과 추가 군비 확장으로 나갔다. 그 결과는 10년 뒤 모두가 무모하다고 했던 러일전쟁 도발과 아무도 예상 못 한 전쟁 승리였다. 권력에 집착하며 그 10년을 낭비한 조선 권력층은 주어진 독립을 무(無)로 돌려버렸고, 조선 백성은 독립을 상실했다. 여기까지가 1894년 여름 시작해 1895년 봄 완료된 동아시아 삼국지, 청일전쟁 이야기다.
<참고문헌>
1. 박종인, "끈질기게 근대화를 시도한 일보니 시대를 주도했다", 조선일보, 2022.5.4일자. A3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