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컨 ‘뉴 아틀란티스’
행복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토머스 모어가 ‘유토피아’에서 제시한 답은 우리의 욕망을 절제하여 물질적 필요를 최소한으로 충족하는 대신 고차원의 정신적 수양을 추구하는 쪽에 가깝다<1월 4일 자 A34면 유토피아(상)>. 약 한 세기 뒤에 베이컨은 일견 매우 다른 답을 제시한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을 굳이 억제할 것이 아니라 충분히 충족시키는 길을 찾자는 것이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과학의 힘이다. 그런데 이때 과학은 물질적 측면뿐 아니라 강한 종교성을 동시에 띠고 있다. 이러한 생각을 소설 형식으로 구상화한 작품이 ‘새로운 아틀란티스’(1626)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1561~1626)은 1561년 런던에서 대법관 니컬러스 베이컨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엘리자베스 1세와 제임스 1세 두 국왕의 시대에 걸쳐 국회의원, 검찰총장, 대법관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고위 정치인이면서 동시에 최고 수준의 학자라는 점은 모어와 유사하다. 하지만 고상한 기품의 소유자인 모어와 달리 베이컨은 권모술수에 능하고 자신의 야욕을 위해 배신 행위도 불사하는 저열한 정치꾼이었다. 결국 뇌물 수수 혐의로 의회에서 탄핵당하여 모든 직위를 박탈당하고 막대한 벌금까지 물어야 하는 최악의 상황에 내몰렸다. 그의 연구와 저술은 이런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이런 저급한 성품의 소유자가 근대 과학 방법론의 효시가 되는 위대한 철학자가 된 사실을 보면, 말하기 불편하지만 꼭 선한 사람만 사회에 기여하는 건 아닌 듯하다.
1620년에 출간된 주저(主著) ‘신기관(Novum Organum)’은 인류의 모든 지식 체계를 정리하고 앞으로 어떤 지식을 어떻게 보충해야 하는지 밝힌다는 야심 찬 기획이었다. 그의 생각에 일반적인 명제에서 출발하여 다음 명제로 나아가는 지난 시대의 아리스토텔레스적 연역법은 새로운 지식을 창출해 나가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그보다는 실험과 관찰로 개별 사례들에 대한 지식을 쌓아나가면서 점차 일반적인 명제를 이끌어내는 귀납법이야말로 새로운 앎을 열어가는 최선의 방식이다. ‘새로운 아틀란티스’는 이런 철학적 내용을 쉽게 풀어서 표현하고자 한 작품이다.
소설의 스토리는 매우 단순하다. 중국과 일본을 향해 페루에서 출항한 배가 바다 한가운데에서 조난당했다가 인근 섬에 상륙하게 된다. 벤살렘이라 부르는 이 섬나라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선택받은 사람들이 세상의 진리를 밝히는 작업에 매진하는 곳이다. 신세계와 구세계 모두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다른 어느 나라도 이곳을 알지 못하는 곳이니, 이 섬은 유토피아 문학의 무대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Nowhere)’의 한 변형이다. 이 나라를 통치하는 최고 기구는 솔로몬학술원이라는 학술 기관이다.
주인공 일행은 학술원 회원 한 명의 도움을 받아 이 나라에서 진행 중인 연구 분야들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그 내용을 보면 400년 전 저자의 상상력이 너무나 풍부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할 정도다. 예컨대 ‘천국의 물’이라 불리는 음료수를 마시면 건강이 증진되고 생명이 연장된다. 유성 체계를 모방하고 그 운동을 보여주는 거대한 건물에서는 눈과 우박, 비를 인공적으로 내리게 할 수 있으며, 천둥이 일고 번개가 치도록 만들 수 있다. 한번 먹고 나면 다음에 오랫동안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는 고기나 빵, 음료수도 개발했다. 모든 종류의 빛과 색채를 실험하고 설명할 수 있는 연구실도 있다. 미세한 물체를 잘 볼 수 있는 현미경을 이용하여 세포도 정밀하게 관찰한다. 심지어 오늘날 진행 중인 유전자 클로닝(복제)을 연상케 하는 연구도 보인다. 이 기관의 연구 활동은 농학, 의학, 생물학, 식품학, 약학, 재료공학, 기계공학, 광학, 수학 등 실로 거의 모든 과학 및 공학 분야를 아우르고 있다. 그 덕분에 이 섬 주민들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영위한다.
그렇지만 과학기술의 발달이 오직 물질적 복리 증진만 목표로 하는 건 아니다. 솔로몬학술원이 스스로 천명한 핵심 임무는 “사물의 진정한 본질을 발견”하는 것이며, “피조물을 창조한 신의 영광을 더욱 밝게 드러내면서 동시에 인간이 이 피조물들을 더욱 값지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이들이 수행하는 연구의 근본적 성격은 신의 창조 작업을 이어받아 피조물을 더욱 값지게 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신의 ‘창조(creation)’를 이어받아 제2의 창조 혹은 ‘재창조(re-creation)’ 작업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인간이 신을 대신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의무는 신의 뜻을 잘 살펴서 자연을 관리하고 나아가서 개선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합리적으로 만드셨고, 따라서 우주는 법칙적으로 돌아간다. 오늘 해가 동쪽에서 떴다가 돌연 내일 서쪽에서 뜨지는 않는다. 따라서 신의 뜻은 매번 계시를 통해 직접 알려주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성 자체도 하느님이 인간에게 심어준 능력이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은 하느님의 뜻을 이 땅에 구현하는 힘이다.
이런 연유로 ‘새로운 아틀란티스’는 흔히 최초의 과학 유토피아 작품이라고 하지만 막상 읽어보면 종교적·신화적 분위기가 물씬 난다. 베이컨에게 과학기술은 결코 종교의 대체물이 아니다. 베이컨의 학문을 신학적으로 해석한다면 원죄로 인한 타락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 인간은 원래 하느님이 부여해 주었던 능력을 많이 잃었고 황폐화된 세상에서 고통스럽게 살게 되었다. 그렇지만 인간은 이런 황량한 상태 그대로 지내는 게 아니라 우리의 잃어버린 능력을 복원하고, 이 세상을 더욱 살기 좋은 곳으로 개선해 나가면서 하느님의 부름을 기다려야 한다. 과학기술은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준비하는 신성한 힘이다.
오늘날에는 종교와 과학이 흔히 서로 충돌하곤 한다. 창조인가 진화인가 하는 식의 논쟁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렇지만 사실 근대 초 시점에서 과학은 본래 신앙과 대척되는 게 아니었다. 과학은 진리를 밝히면서 동시에 세상을 복되게 하는 것이며, 신의 은총과 계시를 더욱 값지게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근대 과학은 안심하고 종교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발전의 길을 갈 수 있게 되었다. 과학기술이 신앙을 돈독하게 하는 진정한 길이라는 ‘보장’을 받았기 때문에 오히려 종교에서 독립하여 활동할 수 있는 자유를 얻은 것이다. 현대 과학은 스스로 독자적인 기반을 주장하며, 종교와는 무관한 분야로 성장했다. 바로 이와 같은 과학기술의 발전이 서구 문명이 근대 세계의 패권을 차지하게 된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앞으로 세계 문명을 근본적으로 틀 지우는 힘은 대개 과학기술에서 나올 것이다. 과학기술이 유토피아를 만들어준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이 세상을 이해하고 개선하는 막강한 힘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런 점들을 놓고 볼 때 장차 우리 사회를 이끌어갈 지도자는 편협한 정치 논리에 맞추어 과학기술을 왜곡하는 부류가 아니라 반대로 과학기술의 큰 흐름을 이해하고 북돋을 줄 아는 인물이어야 할 것이다.
[신의 형상]
아담이 맨눈으로 우주를 볼 수 있듯이 인간에겐 망원경 있어
창세기는 인간이 ‘신의 형상(imago dei)’에 따라 만들어졌다고 한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세기 1:27~28)
이 구절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단순히 인간과 신의 ‘모습’이 닮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이 마치 신과 유사한 정도로 신성하고 영원불멸한 존재라는 의미라고 해석했다. 우주 만물을 관리하려면 의당 그런 정도의 능력을 필요로 하지 않겠는가. 중세와 근대 초의 한 신학적 해석에 따르면, 타락 이전에 인간은 아주 놀라운 능력을 보유했는데, 이는 영적으로 성스러울 뿐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뛰어난 능력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 영국의 작가이자 철학자 조셉 글랜빌(Joseph Glanvill·1636~1680)은 ‘아담은 망원경 없이 우주를 볼 수 있다’고 표현했다. 그런데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 인간은 그런 뛰어난 능력을 상실했다. 이제 인간은 무력한 상태에서 고통스럽고 힘들게 살아가야 한다. 그렇다 해도 인간은 신이 부여한 특출한 능력인 이성을 부분적으로 간직하고 있다. 이것으로 인간은 원래의 탁월한 능력을 조금씩 되찾을 수 있고, 황폐한 이 세상을 개선해 갈 수 있다. 그 힘이 곧 과학이고 그것을 세상에 구체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이 기술이다. 아담이 맨눈으로 우주 전체를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오늘날 과학자는 망원경으로 그 비슷한 일을 할 수 있다. 인간에게는 ‘신의 형상’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참고문헌>
1. 주경철, "생명 연장하는 물, 인공 눈, 비...400년 전 예측한 과학 유토피아", 조선일보, 2022.1.18일자. A3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