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암당 이유립의 생애와 업적
한암당 이유립(李裕岦,1907∼1986)은 어린시절부터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환단고기를 전수받아 대중화시켰으며, 한민족의 올바른 역사찾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국가보훈처로부터 독립운동가로 서훈을 받지 못해 안타깝다.
그는 1907년 평안북도 삭주의 철성(鐵城) 이씨 가문에서 이암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독립운동가 관집(觀楫)이고, 어머니는 태인백씨(泰仁白氏)이다. 자는 채영(采英) 또는 중정(中正), 호는 한암당(寒闇堂)·정산초인(靜山樵人)·단하산인(檀下山人)·호상포객(湖上逋客)·단학동인(檀鶴洞人)이다.
유년기에는 한문을 익히고, 1915년 오동진(吳東振)이 비밀로 가르치는 구한국군(舊韓國軍)의 노래와 행진연습을 받았으며, 1919년 신안동(新安洞)에서 태극기를 들고 조선독립만세운동에 가담하는 등 배일애국사상이 강하였다.
같은 해 만주 관전현(寬甸縣) 홍석납자(紅石拉子)에 이거, 3년여를 머무르면서 이기(李沂)가 창도한 단학회(檀學會)에서 주관하는 배달의숙(倍達義塾)에 입학, 계연수(桂延壽)·최시흥(崔時興)·오동진 등의 강의를 듣는 한편, 1921년 조선독립소년단(朝鮮獨立少年團) 조직활동에 참가하여 단장이 되었다. 이때 이름은 이채영(李采英)이었다. 이로부터 의민사(義民社)·천마산대(天摩山隊) 등 항일단체의 소년통신원으로 뽑혀 국내의 통신연락을 도왔다.
1923년 종정산(倧靜山) 아래 정곡(井谷)에 초막을 짓고 독서에 열중하면서 야학당을 설치하고 청소년들의 야간교육을 실시하였다.
1924년 삭주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입학하여 1927년 21세에 6년제를 졸업하였는데, 재학중에도 천마산대 소년별동대격인 삼육회(三育會)를 조직, 방과 후에 역사·체육·노작활동 등 특별연수를 하였다. 학교를 마친 뒤 한동안 만주일대를 유력하다가 1930년 고향에 돌아와서 이기의 신교육종지를 실천할 목적으로 삼육사(三育社)를 조직, 위원장이 되어 농촌자력진흥, 청소년자유교양, 국제동향의 비판, 회람잡지 발행 등을 실시하다가, 일제로부터 강제해산을 당하면서 한때 천마산에 입산하였다.
1933년 경기도 시흥에 안순환(安淳煥)이 세운 명교학원(明敎學院, 일명 朝鮮儒學會)에 입회, 유학을 수습하면서 이상룡(李相龍)의 《대동광의 大同廣義》, 이기의 《유서》, 량치차오(梁啓超)의 《음빙실전집 飲氷室全集》을 연구하는 한편, 대종교(大倧敎)의 남도본사와 시흥 녹동에 있는 단군교본부의 활동상황을 주시, 보다 더 강력한 민족적 이념을 탐색하고 조선유학회 기관지인 《일월시보 日月時報》의 주필이 되기도 하였다.
1939년 이상유(李尙游)의 희사금으로 신풍학원(新豊學院)을 설립, 학감 겸 교사로 근무하였으나, 학생들의 신사참배 불응과 창씨개명 불응 등 배일행위로 지적되어 폐교조처를 당하였다.
1945년 4월 건국동맹(建國同盟)의 평안북도 삭주책을 맡았는데, 전봉천(全鳳天)의 〈대동아전쟁거부론〉 삐라살포사건에 관련되어 구령포 일본헌병대의 문초를 받던 중 광복을 맞았다. 그해 9월 압록강국민학교장과 풍민조합장(豊民組合長), 대한근로국민회 문화부장의 직에 피임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그해 10월 3일 천마산제전대회에서 독립운동가 이용담(李龍潭)의 주재로 결성된 단학회(檀學會)의 기관지 《태극 太極》의 주간으로 피임되었으나, 1946년 1월 발행 신년호에 게재된 〈신탁통치반대론〉이 문제가 되어 구금, 폐간되었다. 즉 소련군 반출양곡 제지 등을 내세워 군중궐기대회를 책동하였다는 청우당 정치부의 허위고발에 의해서였다. 삭주검찰소에 구금된 지 2개월 만에 무혐의로 출감되었다.
1948년 5월 월남 도중 해주에서 붙잡혔다가 4개월 만에 출감, 그해 추석 다음날 밤에 월남하였다.
1963년 5월, 이전에 조직되었던 단학회를 계승하여 단단학회(檀檀學會)의 명칭으로 조직을 확대하고, 3대회장이 되어 본부를 대전시 은행동 자택에 두고 기관지 《커발한》을 발행하였다. 1969년 강화도 마니산에 환인(桓因)·환웅(桓雄)·환검(桓儉) 등 국조 삼성을 받드는 개천각을 세우고 대영절(大迎節)과 개천절의 제천행사를 하였다.
경향신문 86년 4월 18일자
1973년 서울에 이거 《광개토성릉비문역주 廣開土聖陵碑文譯註》·《세계문명동원론 世界文明同源論》을 펴내고, 1976년 《커발한문화사상사》 I·II를 발간하였으며, 그해 10월 박창암(朴蒼巖)·안호상(安浩相)·문정창(文定昌)·임승국(林承國) 등과 함께 국사찾기협의회를 조직, 잡지 《자유 自由》에 기고하였으며,
1983년 《한암당이유립사학총서》를 간행하였다. 평생을 배달민족의 역사와 사상연구에 몰두하였다. 1986년 그동안 정리된 《대배달민족사》 5권이 간행되었다.
한암당 이유립 선생은 대전광역시 중구 은행동에 위치한 한암당에서 11명의 제자를 양성했다. 수제자는 한암당 이유립 평전인 《백년의 여정》(상생출판, 2009.11.18)의 저자인 단석(檀石) 양종현(梁宗鉉, ?-2022)이다. 그는 충청문화역사연구소 신상구 소장(국학박사 2호)의 안내로 증산도에 입도해 선화동 도장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지병으로 백세요양병원과 보람요양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다가 2022년 5월 21일 밤 11시 30분에 타계했다. 5월 23일 평화원 장례식장에서 유가족인 아들 1명과 증산도 신도 다수가 참여한 가운데 발인해 그의 시신은 논산 진달래 묘원에 안장되었다. 장례식 비용은 유가족이 지불하고, 요양병원 치료비는 증산도에서 부담했다고 한다. 특히 증산도 안경전 종도사께서 장례식장에 참여해 유가족 대표인 아들에게 금일봉을 하사해 자리를 빛내주었다고 한다.
<필자 신상구 국학박사 약력>
.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출생
.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 경제학사, 충남대 교육대학원 사회교육학 석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과 국학박사 2호
. 향토사학자, 시인, 문학평론가, 민속학자, 칼럼니스트
. 통일문학상, 전국 향토문화 논문공모 대상(국무총리상) 수상
. 학술논문「태안지역 무속인들의 종이 오리기 공예에 대한 일고찰」등 119편.
. 대표 저서 :『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도서출판 근화,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