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의암 손병희 선생의 생애와 업적과 100주기 추도제
1. 의암 손병희 선생의 생애와 업적
2022년 5월 19일은 천도교(동학) 지도자이자 항일독립운동가인 손병희(孫秉熙) 선생 순도와 순국 100주년이 되는 아주 뜻 깊은 날이다.
손병희는 1861년 4월 8일 충청도 청주목 산외이면 대주리(현 충북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금암리)에서 부친 손두흥(孫斗興)과 모친 경주 최 씨(慶州崔氏) 사이의 4남(孫秉坤, 孫秉熙, 孫秉欽, 孫秉權) 1녀(孫召史)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손두흥(孫斗興)은 세금징수를 담당하는 향리였고, 모친 최 씨는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본관은 밀양(密陽), 초명은 손응구(孫應九), 족보명은 손상현(孫祥鉉), 자(字)는 응구(應九), 호는 소소거사(笑笑居士), 도호(道號)는 의암(義菴), 이명은 손규동(孫奎東) · 이상헌(李祥憲)이다.
1882년 조카인 송암(松庵) 손천민(孫天民, ?-1900)의 권유로 동학에 입도했는데, 이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동학의 교리 때문이었다. 3년 뒤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1827-1898)을 만나 그의 수제자가 되었다. 최시형 선생은 일부러 손병희에게 어려운 문제를 풀게 했는데, 정성껏 문제를 풀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고 제자로 받아들였다 한다. 계몽사에서 펴낸 어린이 그림 위인전기 손병희에 따르면, 최시형 선생은 손병희에게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나무처럼 꿋꿋할 것을 가르쳤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는 북접 소속으로서 남접의 전봉준(全琫準, 1855-1895)과 함께 관군에 맞서 싸웠으며, 관군과 일본군의 폭력으로 수많은 신도들이 순도(殉道, 순교)를 했다. 관군의 추격을 피해 원산과 관서지방으로 피신한 그는 동학농민혁명 실패로 무너진 동학의 재건과 포교 활동에 큰 공을 세움으로써 1897년 정신적 스승이었던 최시형 선생의 뒤를 이은 제3대 교주가 되었다. 한편 관에 자수한 최시형은 이듬해 혹세무민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함으로써 순도한다. 이후 손병희는 동학운동의 지도자만이 아닌 근대화 운동의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독립협회 인사 등 개화파 인물들과 만나서 일부는 동학에 입교시켰으며, 이들로부터 개화사상을 받아들였다.
그러던 와중에 동학에 대한 탄압이 거세지면서 먼저 동학에 입교하여, 자신에게 포교했던 조카 손천민이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탄압을 피해 손병희 선생은 안경장수로 변장하여 중국에 피신했으나 '손병희의 망명을 받아들이지 말라'는 조선정부의 압력으로 중국에서 살 수 없어 1901년 일본으로 망명했다. 일본에서 같은 망명자 신분이었던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 · 애당(愛堂) 권동진(權東鎭, 1861-1947) · 자순(子純) 박영효(朴泳孝, 1861-1939) · 기원(杞園) 조희연(趙羲淵, 1856-1915) 등 개화파 전직 관료들과 교류하였고, 상하이와 도쿄 등을 돌아보면서 인재 양성이 시급함을 깨달았다.
이에 따라 1903년부터 24명의 똑똑한 청년들을 선발하여 일본에 유학시키게 된다. 망명 중 신문기고 등으로 내정개혁론과 근대화론을 설파하다가 1904년에는 갑진개혁운동을 일으켜 애당(愛堂) 권동진(權東鎭, 1861-1947),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과 더불어 진보회를 조직했다. 회원들에게 머리를 자르고 개화복을 입을 것을 명하는 등 개화 운동의 확산을 위한 단체였다.
동학교도 즉, 천도교 신도라면 무조건 잡아갈 정도로 천도교를 극심히 탄압하던 대한제국이 외세의 간섭으로 무기력해진 상황이 벌어졌다. 그래서 손병희는 1905년에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1906년 일본에서 귀국했다. 또한 천도교 내부에서는 일진회(一進會)의 연사(蓮史)송병준(宋秉畯, 1858-1925) ·대유(大有) 이용구(李容九,1868-1912)와 기타 세력 간의 반목이 심해져서, 손병희는 친일 조직인 일진회 인물들에게 출교 처분을 내림으로써 이들과 결별한다. 그 다음 교령 자리를 박인호에게 승계하고 교육 사업(보성전문학교, 동덕여학단 인수)과 출판사업에 관심을 쏟다가, 1919년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3·1 운동을 주도했다. 기미독립선언서 낭독 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병보석으로 출옥한 후 1922년 5월 19일 가족들이 보는 가운데 서울특별시 종로구 숭인동 상춘원(常春園)에서 61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의 시신은 충북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금암리에 안장되었다.
저서로는『삼전론(三戰論)』(1902),『명리전(明理傳)』(1903) 등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첫째 부인 현풍 곽 씨, 둘째 부인 홍응화, 셋째 부인 주옥경과 결혼해 슬하에 딸 5명을 두었다.
독립운동가인 손병흠(孫秉欽)은 동생이고, 동학 대접주 송암(松庵) 손천민(孫天民, ?-1900)은 이복 조카이며, 어린이 운동으로 유명한 소파(小波) 방정환(方定煥, 1899-1931)은 셋째 사위이다. 동학 제2대 교주인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1827-1898)은 이복 자형이다.
2. 의암 손병희 선생 순국 100주기 추도제
국가보훈처는 지난 5월 18일 손병희 선생 순국 100주기 추도제가 5월 19일 오전 9시 서울 강북구 봉황각과 종로구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 2부로 나뉘어 개최되었다고 밝혔다.
천도교(교령 박상종)와 ㈔민족대표33인기념사업회(이사장 김재옥) 주관으로 진행된 이번 행사에는 유족, 천도교 회원, 기념사업회원, 이남우 국가보훈처 차장을 비롯한 각계 인사와 일반 시민 등 400여명이 참석했다.
1부는 의암성사 묘소 참례와 추모제, 2부는 2022년 동학학회 춘계 학술대회와 공연 순으로 진행되었다. 의암성사 묘소 참례는 묘소가 위치한 봉황각에서 오전 9시부터 90분간, 추모제는 중앙대교당에서 11시부터 50분간 이어졌다. 2022년 동학학회 춘계 학술대회는 ‘의암 손병희의 역사적 재조명’이라는 주제로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 열렸다. 끝으로 손병희 선생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일반 시민이 동참해 열리는 공연이 개최되었다.
국가보훈처는 손병희 선생의 유해가 안장된 수유리 묘역을 2021년 1월 국가관리묘역으로 지정했으며 올해 순국 100주기를 맞아 묘역 정비 공사를 이달 중 마무리할 예정이다.
<필자 신상구 국학박사 약력>
.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출생
.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 경제학사, 충남대 교육대학원 사회교육학 석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과 국학박사 2호
. 향토사학자, 시인, 문학평론가, 민속학자, 칼럼니스트
. 통일문학상, 전국 향토문화 논문공모 대상(국무총리상) 수상
. 학술논문「태안지역 무속인들의 종이 오리기 공예에 대한 일고찰」등 119편.
. 대표 저서 :『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도서출판 근화,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