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정치 배신한 세종의 인재들
“상께서 훙(薨)하셨다.”
세종이 재위 32년에 돌아가셨다는 1450년 2월의 실록 기사다. 이 기사를 함께 읽은 세종실록 강독 멤버들 사이에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4년 넘게 격주로 읽어온 실록 속 세종은 대부분 진중한 모습으로, 또 때론 ‘그다음은 무얼까’라는 기대를 불러일으키며 우리 곁에 있었다. 그런 세종이 갑자기 무너져 내렸다. 어떤 분은 “마치 거대한 산이 갑자기 ‘쿵’ 하며 땅 밑으로 꺼지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나 역시 이 부분을 읽을 때면 ‘저렇게 가시면 안 되는데…, 훈민정음 후속 사업 등 진행 중인 일은 어찌하라고…, 세자가 아직 준비 안 되었는데…’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먼저 든다. 그런데 열일곱 번째 완독한 요즘은 ‘무거운 삶의 무게, 정치의 압박으로부터 비로소 풀려나셨구나’ 하는 안도감이 더 크다. 세종 스스로도 훙서(薨逝·왕의 죽음)하기 불과 일 년 전에 “요즘 내가 분노 발작을 수시로 한다. 지금까지는 겨우 정신줄을 붙잡고 있지만, 시간이 더 흘러 혼미해지면 그조차도 안 될 수 있으니, 경들은 알라”고 고백하기도 했다(세종실록 31년 1월 27일).
말년의 세종을 가장 힘들게 한 것은 건강 문제도, 가족 문제도 아니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세종이 즉위하면서 공들여 만든 ‘인재의 저수지’이자 가장 든든한 지지 기반인 집현전 출신 관리들이었다. 정창손, 이현로, 박팽년의 아버지 박중림, 하위지의 형 하강지, 그리고 당대 최고의 수학자 이순지 등은 힘 있는 부서에 배치된 후 뇌물 받고 채용하기, 다른 사람 노비를 내 것으로 만들기, 관곡 빼돌리기 등 온갖 비리에 개입했다. ‘이 나라는 전하의 것이 아니라 조상들께서 물려주신 것’이라면서 대놓고 왕을 반박하기도 했다.
왕의 총애를 믿고 자의적으로 움직이는 그들을 저지하거나 만족시킬 방법은 없었다. 그게 권력의 속성이기도 하다. 동지 집단이 최고 권력자를 배반하는 일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조선 후기 정조를 결정적으로 배신한 세도정치의 주역 김조순은 정조가 가장 아끼고 키운 초계문신 출신이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세종이 ‘특별한 예로 대우[禮待·예대]’하던 집현전 학사들이 어떤 계기로 ‘실지의 일에 쓸모없는 선비[迂儒·우유]’로 전락했을까? 나는 그 원인이 세종 자신에게 있다고 본다. 재위 21년 후반부터 세종은 경연을 중단했다. 경연은 세종이 집현전 학사들의 도움으로 매월 5회가량 연 국정 토론장이었다. 집현전 학사 등 젊은 인재들이 고전에 기반해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면, 그 자리에 참석한 재상들이 경륜에 기반해 정책으로 만들고, 국왕이 결정해서 추진하는 곳이 경연이었다. 그런 자리가 사라지면서 일차적으로 재상들이 타격을 입었다. 젊은 인재들과의 토론을 통해 새로운 정책 아이디어를 들을 기회가 사라져버렸다. 재위 말년의 정승 하연은 ‘공사(公事)를 망령되게’ 일으키다가 백성의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이른바 ‘집현좌파’로 불리는, 그저 비판적이고 원리주의적인 지식인들이 다수 등장한 것도 이 즈음이었다. ‘실지의 일에 쓸모없는 선비’라는 세종의 비판에서 보듯이, 경연이 중단되면서 사리(事理), 즉 일에 기반한 이치를 살피고, 일[事]과 이치[理]의 균형을 잡아가려던 지적 노력이 무뎌졌다. 이치를 따지지 않고 일만 성사시키면 된다는 사공적(事功的) 태도도 문제지만, 일에서 동떨어진 이치만을 고집하는 원리주의적 자세는 국가 경영에 치명적이었다. 변경(邊境)을 침입하는 오랑캐에게도 철저하게 ‘인(仁)과 의(義)’의 관점에서 결정해야만 하고 속임수를 써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그 예다.
집현전 부수찬 하위지의 이중적 태도는 공과 사를 혼동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과거시험 답안지에 왕의 호불(護佛)행위를 비판하지 못하는 언관들은 자격이 없다고 써서 사헌부 관리들을 사퇴시켰던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직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진실되게 충간하는 신하를 포용해야 “산림(山林)의 거친 논의”, 즉 보통 사람들의 의견이 왕에게 수렴될 수 있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자기 형이 수령 재직 시 관청 곡식을 횡령한 혐의에 대해서는 ‘꾸며진 말’이라고 부정했다. 형조의 조사로 형의 유죄가 밝혀지자, 이번에는 형 옥바라지를 해야 한다며 사직서를 냈다.
사를 위해 공을 저버린 그의 행위는 사리(事理) 분별을 최우선으로 배우는 집현전 학풍에서 벗어난 모습이었고, 왕의 한탄을 자아냈다. 믿었던 도끼로부터 발등 찍히는 일을 예방하기 위해 선제적으로 측근을 관리했던 태종과 대조되는, 그래서 더욱 쓸쓸하게 느껴지는 세종의 말년이었다.
<참고문헌>
1. 박현모, "세종의 정치 배반한 세종의 인재들", 조선일보, 2022.6.28일자. A2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