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후 전투에서 조선·명나라 연합군 10만명이 후금 3만 병력에 大敗
사르후 전투
▲ ①사르후 전투를 묘사한 17세기 그림. 후금의 기병(왼편)과 명의 보병(오른편)이 격렬히 싸우고 있어요. ②후금을 세운 누르하치의 초상. ③팔기군(八旗軍)이 늘어선 모습을 그린 그림. ④국립진주박물관이 유튜브 채널에 공개한 단편영화 ‘사르후 전투’의 한 장면. /위키피디아·국립진주박물관
지난 8일 경남 국립진주박물관은 공식 유튜브 채널에 공개한 단편 영화 '사르후 전투'의 조회 수가 100만을 돌파했다고 밝혔어요. 조회 수 100만 돌파는 국립박물관 첫 사례이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깊어요. 이 작품은 기존 영상과 달리 전문 작가의 시나리오, 적절한 컴퓨터 그래픽 활용, 정교한 고증을 거친 소품, 현직 연극배우 섭외 등의 노력을 기울여 작품성을 최대한 끌어올린 것으로 알려졌죠. 그렇다면 '사르후 전투'는 무엇이고, 어떤 역사적 의미가 있을까요?
후금(後金)의 등장
사르후 전투는 1619년 무순(撫順·현재 중국 랴오닝성 푸순시) 일대에서 조선·명나라 연합군과 후금군이 벌인 전투예요. '사르후(薩爾滸)'는 무순 근처의 지명을 뜻해요. 이 전투는 광해군이 중립 외교의 한 사례로 알려져 있죠. 조선은 명에 사대의 예(禮)를 행해야 했기에 원군(援軍)을 파병했으나, 떠오르는 강자였던 후금의 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고 결국 후금에 항복했어요. 이 전투는 한국사뿐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 역사의 판도를 바꾼 중요한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후금이 대승(大勝)을 거두며 만주 지역을 장악하는 기점이 됐으니까요.
후금을 세운 만주족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12~13세기 금나라를 건설했던 여진족을 만날 수 있어요. 금나라는 고려를 위협하고 거란을 무너뜨릴 정도로 유라시아 동부 지역을 강력히 지배했죠. 하지만 금나라는 몽골에 멸망했고, 몽골이 세운 원나라가 무너진 이후에도 여진족은 여러 집단으로 분열된 상태로 남아 있었어요. 그러던 중 누르하치라는 인물이 나타나 1616년 다시 여진을 통일합니다. 그래서 이들이 세운 나라는 금(金)나라를 이었다고 해서 '후금(後金)'이라고 불러요.
후금은 명나라와 충돌을 피할 수 없었어요. 누르하치는 1618년 명나라에 '일곱 가지 한(恨)'이 있다고 주장하며 전면전을 선포했는데, 강력한 후금 군대를 마주한 무순성은 바로 항복했죠. 누르하치는 훗날을 대비해 무순성을 파괴하고 주민도 모두 포로로 끌고 갔어요. 그런데 사실 이때 누르하치의 목적은 만주 지역의 패권을 차지하는 것이었지, 명나라를 멸망시키는 건 아니었어요. 후금은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하기 위해 교역로를 확대하고 포로를 확보하려고 했죠. 포로를 확보하면 노동력을 충당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교역의 요충지였던 무순성을 먼저 공격한 것이었습니다.
조선과 명나라, 후금에 대적하다
누르하치가 전면전을 선포하자 명나라는 몽골뿐 아니라 다른 이웃 나라와 연합군을 형성했어요. 이때 조선은 강홍립·김응서·김응하 같은 장수를 포함해 약 1만3000 병력을 보냈는데, 이들 중 무려 3500명이 조총(鳥銃·긴 화승총) 부대 소속이었죠. 하지만 광해군은 원병을 보내면서도 '중국 장수의 말을 그대로 따르지 말고 전쟁에서 패하지 않을 수 있는 수단을 취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조·명 연합군은 총 10만여 병력으로 후금군에 대항했어요. 병력은 동서남북 군대 넷으로 분산돼 후금의 수도 허투알라를 향해 진격했죠. 조·명 연합군의 계획은 분산된 병력을 허투알라에서 다시 합쳐 우세한 화력으로 공성전(攻城戰·성이나 요새를 빼앗고자 벌이는 싸움)을 펼치는 것이었어요. 누르하치는 지세(地勢)에 밝고 전투력이 강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지만, 병력이 약 3만이었기에 수적으로는 조·명 연합군에 뒤졌어요. 그러나 누르하치는 엄청난 기동력과 정보력으로 네 군대가 합동 작전을 펼치기도 전에 하나씩 격파해 나갔습니다.
조·명 연합군의 서로군(西路軍)을 이끌던 두송이라는 장군은 총사령관의 지시를 무시하고 제일 먼저 후금군 공격에 나섰다가 크게 패했어요. 북로군(北路軍)을 이끌던 마림은 이 소식을 듣고 대비 태세를 갖췄으나 후금군에 격파당했죠. 남로군(南路軍)은 아군의 전멸 소식을 듣고 일단 후퇴했는데, 동로군(東路軍)은 미처 후퇴하지 못했어요. 후금군은 동로군을 향해 진격했습니다. 동로군에는 조선군도 포함돼 있었는데 조선군은 부차라는 지역에서 크게 졌어요. 이 지역이 평원이었기 때문에 기병이 강력했던 후금군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좋은 환경이었고, 이 상황에서 모래바람이 불어 조선군이 가지고 있던 조총마저 무용지물이 되었죠.
결국 이곳에서 조선군은 약 9000명이 전사했고, 살아남은 조선군은 투항했습니다. 나흘 만에 네 군대 가운데 세 군대가 전멸한 거죠. 명나라 기록에 따르면 사르후 전투에서 군사 4만5000명 이상이 전사했다고 해요. 반면 후금군은 사망자가 거의 없었습니다. 명나라로서는 엄청난 손실이자 결정적인 패배였어요.
청(淸)으로 발돋움하다
승패를 가른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명나라 말기의 정치가이자 학자였던 서광계는 사르후 전투에서 명나라 군대가 참패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분석했어요. 그는 당시 명군이 무기·작전·정탐 능력 등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요소 가운데 어느 것 하나 후금군보다 나은 점이 없었다고 신랄하게 평가했어요. 심지어 명군은 패전 책임도 지휘관 개인에게 떠넘겼다고 해요. 후금은 이 틈을 타 명군 지휘관들을 향해 '투항자를 우대한다'고 선포했고, 실제로 그들을 우대함으로써 많은 명군 지휘관이 후금에 투항해버렸죠.
후금에는 '팔기군(八旗軍)'이라는 강력한 군대가 있었습니다. '팔기'란 여덟 깃발을 뜻하는데 한 기(旗) 아래에는 약 7500명 정도가 속해 있었어요. 이 조직은 단순한 군사 조직이 아니라 행정·사회 조직이었어요. 행정·납세·군역 모두 이 단위로 움직였기 때문이에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가 팔기의 구성원이 됐습니다. 언제든 전원 공격, 전원 수비를 펼칠 수 있는 이 군대는 후금이 성장하는 발판이 됐어요.
사르후 전투는 국제 정세를 완전히 바꾸어놨어요. 명나라는 그 전까지 후금을 상대로 누려왔던 우위를 잃고 방어 자세로 돌아섰습니다. 반면 후금은 명나라를 바로 넘보는 우세한 위치를 확보했죠. 결국 1621년 요동(遼東) 지역을 완전히 점령했고, 이후 청(淸)나라로 국호를 바꾼 뒤 1644년 명나라를 멸망시킵니다. 100여 년이 지난 후 청나라 황제 건륭제는 사르후 전투의 역사적 의미를 높이 평가하고, 이 지역에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참고문헌>
1. 서민영/안영, "조선·명나라 연합군 10만명이 후금 3만 병력에 大敗했죠", 조선일보, 2023.2.22일자. A2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