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 원로서예가 송암 민복기(松巖 閔復基) 선생 |
세종시의 문화예술계를 얘기하자면, 원로서예가인 송암 민복기(松巖 閔復基) 선생을 빼놓을 수 없다. ‘도화서재주인(桃花書齋主人)’이라는 선생의 당호(當號)에서 보듯 복숭아의 고장인 세종시의 주인이라는 의식이 깊고 자랑스럽게 나타나 있다.
송암서예학원을 운영하며 후학들을 양성하고 있는 민복기 선생은 올해 나이 73세로, 충북 청원군 미원면에서 태어났다. 한학자였던 할아버지로부터 자연스럽게 한문을 접하면서 붓을 잡았다. 20여년 동안 서울에서 생활한 그는 출판사에 근무할 때인 1974년 6월, ‘현문대옥편(玄文大玉篇)’ 발간 작업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큰 일을 해냈다. 이 옥편은 한국 최고의 옥편으로 꼽힐 만큼 방대하고도 충실한 내용을 자랑한다.
조치원은 그에게 ‘제2의 고향’이다. 1982년 필봉회 조직을 시작으로 지역의 서예문화 창달을 위한 그의 신념과 의지는 한껏 달아올랐다. 이어 1985년 조치원에 한국예총 조치원지부가 태동하는데 있어 소설가 백용운 씨와 함께 산파역을 했다. 1988년 조치원에 송암서예학원을 개설했으며, 1995년에는 처음으로 도서예전을 열었다. 2000년 4월에 세워진 연기대첩비의 글씨도 선생의 작품이다. 2001년에는 문예를 통해 군민정서 함양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제7회 연기군민대상(문화체육부문)을 받았다.
1987년 6월, MBC 베스트셀러극장 프로그램에 조치원 문학계의 거봉이라 할 수 있는 백용운 씨의 소설 ‘상두놀이’가 방영되었는데, 선생이 군수 역할을 맡아 출연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선생은 일본, 대만, 중국 등 해외 여러 나라와의 교류전에 여러 차례 참가하면서 서예를 통한 국위 선양과 민간외교에도 앞장섰다. 선생의 작품성은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았다. 1996년에는 중국 정부가 추진한 ‘황하비림수묵전’에서 현대 1000인의 명필가로 선정돼 선생의 그윽한 묵향은 세계무대에 뿜어나갔다. 또한 국제문화교류초대전에 출품한 작품이 우수한 예술성과를 거둬 2003년 10월에 ‘국제서화예술명인(國際書畵藝術名人) 제1호’라는 영예로운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오래 전부터 문자의 시초인 갑골문에 심취한 선생은 서체에 자신만의 개성이 살아있는 작업들을 끊임없이 해왔다. 그렇기에 선생의 글씨는 틀에 얽매이지 않고 독창적이며, 자유롭다. 자신에게 붙여진 ‘多體의 대가’, ‘書道의 달인’이라는 수식어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자신이 쓰는 서체는 대략 40여 가지나 된다. 붓의 재료 역시 닭털, 버드나무가지, 짚풀, 대나무, 깃털, 칡 등 다양하다. 선생은 일반인들이 결코 흉내낼 수 없는 10여개의 서체를 독자적으로 개발, 자신만의 독특한 운필법((運筆法_점을 찍고 획을 긋는 방법)을 구사한다. 특히 2013년 9월에 이화출판문화사가 발간한 도서 ‘10體 千字文’은 금문,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 목간예서, 해행서, 추사서체, 인전 등 총 10가지 서체로 천자문 전문을 자획 하나하나 공들여 쓴 선생의 학술적 소산이다. 서예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길잡이가 되는 서첩(書帖)으로써 한 사람의 작가가 천자문을 10체로 출간한 일은 흔하지 않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서예를 하면, 무엇보다도 정신이 맑아집니다. 아이들에게 서예를 배우게 하면 집중력을 생긴다는 교육적 효과는 이미 입증되었지요. 또한 서예를 꾸준히 하게 되면 치매나 뇌졸중을 예방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또한 글과 그림이 조화를 이룬 서화(書畵)는 심신을 연마하는 품격높은 예술이며, 정신수양에도 매우 좋은 예술이라고 선생은 강조한다. 그러나 글을 쓸 때, 마음을 비우지 않으면 명필이 나올 수가 없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생명이 있고 내면의 깊이를 담은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백(李白)의 시에 ‘준마불로편(駿馬不勞鞭)’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훈련된 말은 주인이 채찍질을 하지 않아도 잘 달린다’는 뜻이다. 선생이 정한 2014년 청말띠 해의 신년 휘호로써, 세종시민 모두가 계획한 일들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다.
▲ 닭털로 쓴 2014년 신년 휘호 ‘준마불로편(駿馬不勞鞭)’
▲ ‘심여철석(心如鐵石)’은 마음이 같으면 쇠와 돌보다 강하다는 뜻으로 선생이 좋아하는 말 중 하나다. 닭털로 썼다.
▲ 목간예서체로 쓴 율곡 선생의 시 ‘화석정(花石亭)’. 버드나무가지로 썼다.
▲ 대나무로 쓴 최치운의 시 ‘자모석(慈母石)’
▲ 다양한 서체와 여러 종류의 붓으로 공들여 쓴 작품. 앞뒤 양면에 길이 5미터가 넘는 족자로 40여개에 이른다.
▲ 스포츠 종목을 상형화하여 쓴 작품.
이제까지도 그랬듯이, 송암 민복기 선생의 당당하면서도 자유로운 書道와 넘치는 열정이 세종시의 문화예술 발전을 위해 널리 퍼져 나가기를 빌어본다.
[주요 서력]
- 대한민국서예전 및 전국휘호대회 초대작가, 심사 36회
- 대한민국 서예문인화 원로 총연합회 이사
- 한국 서예비림협회 고문, 갑자서우회 고문
- 한국미협, 한국예총 세종시연합회 고문
- 국제문화예술연구회 지도위원
- 세종문화원 부원장
- 송암서예학원 원장
- 국외 초대전 37회(7개국)
- 한국비림박물관, 통일비림박물관 작품 입비 수장
- 중국 5개성 국립비림박물관 작품 입비 수장
- 충남도지사, 충남교육감, 교육부장관 표창
- 연기군민대상, 영광의 충남인상, 한국예술문화훈장, 국제예술문화상, 세계평화교육문화상
- 국제서화예술명인 1호
- 저서 : 현문대옥편, 10체 천자문
<참고문헌>
1. 장석춘, "세종시 원로서예가 송암 민복기(松巖 閔復基) 선생", 세종스토리, 2014.2.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