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덕동 빌딩 숲에 숨어 있는 권력의 쓸쓸함
서울 마포구 공덕동은 용산과 함께 새로운 도심으로 떠오른 지역이다. 고층 건물이 즐비하고 도로는 넓다. 주변보다 지대가 높아서 옛날부터 만리재, 애오개 두 길과 새로 뚫린 백범로 모두 언덕길이다. 그 세 길이 합류하는 지점이 공덕오거리인데, 이 로터리에서 지하철 6호선도 만난다. 사통팔달한 땅 위로 빌딩 숲이 울창하다.
그 지하철 공덕역 3번 출구 옆에 공원이 있는데 공원 모퉁이에는 작은 비석이 서 있다. 비석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限一百二十步 孔德里禁標 同治庚午八月日’(한일백이십보 공덕리금표 동치경오팔월일)
이곳부터 120걸음 공덕리에 경작과 목축을 금한다 - 동치 경오년 8월.
동치 경오년은 1870년이다. 다름 아닌 당시 권세가 하늘보다 높았던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미리 봐뒀던 자기 묫자리 영역을 표시하는 표석이다. 권세가 하늘보다는 높았지만 청나라 황제보다는 못했는지 날짜는 청나라 연호 ‘동치(同治)’를 사용했다. 그렇다. 이 자리에서 서쪽으로 120걸음만 가면 그가 묻히겠다고 낙점해놓은 가묘가 있었고, 가묘 아래에는 별장으로 사용하던 집이 있었다. 이름은 ‘아소당(我笑堂)’이다. 자기 묫자리를 대원군은 ‘우소처(尤笑處)’라 불렀다. ‘내가 웃는 집’이라는 뜻이고 ‘더 웃는 곳’이라는 뜻이다.(황현, ‘매천야록’ 1 上 14. 대원군의 가묘, 국사편찬위) 참 많은 일이 아소당을 중심으로 펼쳐졌고, 이제 돌표 하나 남았다.
묫자리 정하던 날
1870년 추석 열흘 뒤 어전회의에서 영의정 김병학이 고종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대원군이 공덕리로 행차할 때 신들이 동행했는데, 그 경계를 사방 100보(步) 안으로 하니 만백성이 기뻐했나이다.”(1870년 음8월 25일 ‘고종실록’)
미리 대원군이 짚어뒀던 자기 수장(壽藏:생전에 봐둔 묫자리) 경계를 확정하는 날이었다. 대원군은 이미 1846년 경기도 연천에 있던 선친 남연군을 충청도 예산 땅에 이장해 아들을 왕으로 만든 경험이 있지 않았는가. 무소불위한 권력을 더 확장하기 위해 대원군은 자기 묘 또한 천하 길지를 택했다. 한성 성곽 남서쪽 바깥에 있는 용산방 공덕리는 ‘국도(國都)의 진산(鎭山)이 서쪽으로 꺾여 꾸불꾸불 남쪽으로 내려와서 맥(脈)을 결성한’ 언덕이었고 ‘신령스럽고 깨끗한 기운이 실로 다 모인’ 언덕이었다.(이유원, 가오고략(嘉梧藳略) 10, ‘아소당명(我笑堂銘)’)
그 묫자리 경계가 100보였다. 이를 새긴 표석에는 스무 걸음 더 나간 120보라고 돼 있으니 종친에게 허용된 사방 100보 법정 상한 면적과 대동소이했다.(대전통편, ‘분묘정한(墳墓定限)’) 천하의 대원군이 그렇게 좁게 묘계를 정했으니 어전회의 참석자들은 모두 “근처 백성들이 돌아갈 곳을 얻을 수 있게 됐다”며 흡족해했다. 대원군은 그까짓 묫자리 사이즈로 까탈을 부릴 사내가 아니었다.
내가 웃는다, 아소당(我笑堂)
1870년은 대원군 권력이 정점에 오른 때였다. 임진왜란 이후 폐허로 방치됐던 경복궁 중건이 완료됐고 1868년 이후 당쟁 아지트였던 서원 철폐 작업에 착수한 상태였다. 호포제(戶布制)를 실시해 조선 500년 사상 처음으로 양반들로부터 세금을 거두는 혁명적 조치도 실행되고 있었다. 그런 흡족한 상황에서 대원군이 자기 수장을 골라 경계를 정했으니, 권력을 즐기려는 쾌감이기도 했고 풍수라는 전근대적 방식으로 전주 이씨 왕실 미래를 확장하려는 기획이기도 했다.
그 경계를 밝히는 금표에서 21세기 공덕오거리를 지나 서쪽으로 걸어가면 서울디자인고등학교가 나온다. 남자 어른 보폭으로 120걸음 얼추 된다. 그 학교 교정이 아소당 터다. 중간에 만나는 공원 이름도 아소정이고 식당 이름도 아소정이다. 원래 이름은 아소당인데 어찌어찌하여 식민시대와 전쟁을 거치며 격이 팍 떨어지는 아소정으로 바뀌어버렸다. 조선조 관습에 따르면 건물 격은 전-당-합-각-재-헌-루-정 순이니 서열 2위 ‘당(堂)’이 현대에 맨 꼴찌 ‘정(亭)’으로 추락한 것이다.
그래도 건물 이름은 아소당, ‘내가 웃는 집’이다. ‘기쁘면 즐거워지고 즐거우면 웃는다(喜而樂樂而笑·희이락락이소)’ 여러 사람이 아소당 명칭에 대해 글을 썼는데, 1888년 좌의정 신응조가 쓴 ‘아소당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아소당 건축이 1870년인데 이 아소당기는 무려 18년 뒤에 쓴 글이다. 그사이 임오군란(1882)이 터져 대원군은 3년 동안 청나라로 끌려가 유폐된 시기였다. 그럼에도 대원군은 이리 껄껄대며 웃었다. 예순여덟 나이에도 권력에 곧 복귀하리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은 것이다.
매천 황현에 따르면 대원군은 묫자리 아래 아소당을 지으며 묫자리는 ‘더 웃는’ 우소처(尤笑處)라고 불렀다. 전남 광양에 살던 황현은 이 ‘우소처를 덮는 집을 짓고 아소당이라 했다’고 알고 있으니(위 ‘매천야록’), 대원군은 ‘살아서 웃고 죽어서 더 웃는’ 영화로운 삶과 죽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말이다.
대원군 생전에 촬영된(추정) 흑백사진은 그 자신만만한 나날을 잘 보여준다. 번듯한 아흔아홉 칸 사대부 집 오른쪽 언덕 위에 작은 집이 한 채 서 있다. 황현에 따르면 대원군은 ‘당(堂)을 지어 묫자리[壙·광]를 덮었다(建堂以覆壙·건당이복광).’(황현, 앞 책) 웃음 가득한 별장과 ‘더 웃으며 묻힐’ 징표가 한눈에 들어와 있으니 이런 무서운 풍경이 또 어디 있다는 말인가.
“내 아버지를 유폐한다”
1885년 음력 8월 27일 청나라로 납치됐던 대원군이 3년 만에 귀국했다. 3년 전 임오군란 때 청나라군사를 불러 난을 진압한 이래 고종 정권은 20대 중국 장교 원세개 치하에 놓여 있었다. 아들 고종은 “나의 기쁜 마음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라고 아비를 반겼다.(1885년 음8월 27일 ‘고종실록’) 그리고 13일 뒤 아들은 ‘대원군 존봉 의절’ 9개항을 발표했다. 제대로 모시라는 어명인데 이 중 3개항은 이러했다. ‘운현궁 대문에 차단봉 설치’ ‘대문에 24시간 숙직’ ‘왕명 전달 외에는 관료들 일체 면회 금지’.(1885년 음9월 10일 ‘고종실록’)
가둬버린 것이다.
1894년 봄 동학농민전쟁이 터졌다. 여름 청일전쟁이 터졌다. 고종은 개혁정부에게 권력을 빼앗겼다. 일본은 갑오개혁 정부 수장으로 대원군을 앞세웠다. 하지만 의견이 사사건건 충돌하며 대원군은 다시 권좌에서 추락했다. 이듬해 4월 대원군 손자 이준용이 쿠데타를 기도하다 적발됐다. 대원군은 유배형을 언도받은 손자 운명에 항의하며 아소당에 은거했다.
그달 23일 아들 고종은 2차 대원군 존봉 의절을 발표했다. 24시간 숙직 인력은 관리 대신 경찰이, 외국 관리들은 왕실을 거쳐 왕실 직원 입회 하에 면담, 출입은 왕실에 사전 보고 및 경찰 동행. 더 심한 유폐령을 내린 것이다. 그해 10월 존봉 의절을 뚫고 잠시 아소당에 머물던 대원군은 일본인 무리에 이끌려 경복궁으로 입궐했다. 대원군을 앞세워 일본인과 조선인 무리들이 며느리 민비를 죽였다. 그걸로 끝이었다. 개혁의지는 사라졌고 권력욕이 번뜩이던 순간이었다. 이듬해 아관파천 이틀 뒤 고종은 3차 존봉 의절 시행을 명했다.(1896년 2월 13일 ‘고종실록’) 대원군은 영원히 유폐됐다.
마침내 왕이 된 사내
1898년 1월 8일 대원군 아내 여흥 민씨가 운현궁 이로당에서 죽었다. 장례 준비에 한창 어수선하던 2월 22일 대원군이 죽었다. 역시 아들을 왕으로 만들어준 운현궁 노안당에서 죽었다. 아내 병구완을 위해 운현궁에 들르겠다는 고종을 거듭 말린 아버지였지만 임종 직전에는 “주상이 아직 오지 않았느냐”고 세 번이나 큰 소리로 물었다. 황제가 된 아들은 끝내 아비를 찾지 않았다. 원하던 대로, 그리고 예정된 대로, 대원군은 공덕리 아소당 언덕에 묻혔다. 금표에서 120걸음 오르면 나오는 명당이었다.
을사조약 2년 뒤인 1907년 10월 1일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손자 융희제 순종에 의해 대원왕(大院王)으로 추봉됐다. 마침내 스스로가 왕이 된 것이다. 이듬해 1월 30일 황실은 파주 대덕동으로 묘를 이장하고 원(園)으로 격상했다.(이상 ‘순종실록’) 묘원 이름은 국태공원(國太公園)이라고 했다. 국태공은 바로 대원군을 이르는 말이다.
1966년 파주에 미군기지가 들어서면서 국태공원은 다시 한 번 이장된다. 장지는 경기도 남양주 화도읍이다. 78년 긴 세월 부침을 거듭하며 개혁의지는 사라지고 권력을 바라보던 사내의 종착역이다. 처음 묻혔던 공덕동 아소당은 주인이 여러 번 바뀌다 해방 후 송산학원을 세운 김형천이 설립한 동도중, 공업고등학교가 들어섰다. 지금은 서울디자인고등학교가 들어섰다. 본채는 신촌에 있는 봉원사로 팔려나갔다.
그 장구한 세월, 그 덧없고 쓸쓸함을 보려면 서울특별시 마포구 공덕동 지하철6호선 공덕역 3번출구 옆 공원에 가보라. 의미 사라지고 없는 금표(禁標)를 보라.
<참고문헌>
1. 박종인, "공덕동 빌딩 숲에 숨어 있는 권력의 쓸쓸함", 조선일보, 2022.8.31일자. A3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