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소장자 대전문학관에 기증해야 옳다
예술의 여러 장르 중 어떤 분야를 막론하고 그 분야에서 성가를 이룬 예술가의 삶과 예술세계를
재구성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시대와 역사가 바뀐 유명 예술인일수록 그의 고단했을 생애와 업적을 가려 그를 판정하
는 기준은 중요자료와 사료(史料)들이다.
누구도 가기 어려웠던 외로운 길을 앞장서 생전에 자취로 남긴 사료들은 차후 이를 근거로 작품
성과 활동성 등 당시 한국문학의 현재와 미래를 투명하게 드러낼 수 있도록 연구하는 작업의 바탕
이 된다. 따라서 보관과 관리 등 기록 보존은 필수적이다.
보관의 목적도 실증적 자료와 사료 또 유품들은 다수가 열람하고 관람하는 공공성을 띤 장소에
순차적으로 보존돼 있어야 영구적이어서 합당하다.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역사적인 작가라면 그 작가의 작품을 중심으로 예술성과 시대상 그리고
작가의 환경 등 증빙자료들을 정해진 곳이나 기관에 취합되고 보존돼야 한다는 목적은 당연하다.
따라서 가급적인 사실들을 기저로 활동 당시의 다양한 작품들을 참고해 그때의 상황들과 흐름을
정확히 파악하고 명료하게 분석하는 근거로써 가늠이 되고 단서가 되며 증표가 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우선 세목(細木)부터 정리하는 것을 시작으로 신중하게 다뤄 당시의 현실적 상황들을 고려해 가
며 사실 그대로 개진하고 해석하며 논하는데 상당 부분이 비중 있게 차지하기에 그렇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중요한 참고자료들이나 유품 및 사료들이 있어야 할 제자리에 없고
개인의 손에 습득돼 엉뚱한 곳에 난삽해 있다면 이 또한 있어서는 안 될 일로 개인의 소유욕에 미치
는 일탈적 행위로 지역문화 발전에 어긋나는 처세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소치(所致)부터 한국의 문학사와 충청권의 문학적 궤적을 살피는데 보이지 않는 장막처럼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게 된다.
의무적 역할과 도리에 충실해야 하는 기관이나 연구자 또는 기록자는 대상자의 자료들이 충분히
존재 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헤아리지 못한다면 이 또한 전문가들의 주어진 업무에 역행하는 일이다.
실질적으로 충청도(대전과 분리 전)의 경우 한국 문학사에 등장하는 시조 시인으로 알려져 우리
지역인 충청권의 효시로 대표가 되는 중요한 문인의 경우라 그렇다.
이번 사례에서 드러난 경우도 자료들이나 고증이 될만한 저서 및 사료들이 개인들의 손에 들어간
채 내놓지 않고 있어 대전, 충청지역 나아가 한국 문학발전의 퇴보란 소리와 함께 비난과 불신을 받
고 있어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바로 우리 지역의 소정(素丁), 정훈 선생(丁薰, 1911년~
1992년)의 경우가 대표적으로 원로 문인들로부터 거센
질타와 함께 뜨거운 자정의 목소리가 높아 문제다.
주지하다시피 선생은 1911년에서 1992년 81세로 타
계할 때까지 주로 대전에서 삶의 터전을 일구며 시조 시
인으로 작품활동을 펼쳐왔고 해방 이후 6·25전까지는 호
서중학과 호서민중대학을 설립, 교장과 학장을 역임하면
서 교육자로서도 웅지를 불태웠다.
소정 선생은 일찍이 충청지역을 중심으로 척박했던 문학의 밭을 혼신과 열정을 다해 문학 혼을
불사르며 앞장선 대표적인 시조 시인으로 한국 근대문학의 커다란 획을 긋고 있는 문인 중 한 사
람이다. 특히 선생은 겨레 문학의 큰 나무로서 민족혼을 일깨우며 우리에게 깊은 문학적 영향을 줬
다.
중등 교과서에 수록되었던 ‘춘일(春日)’ 밀고끌고, ‘동백(冬柏)’을 비롯해 선생의 시비에 세워진
‘머들령’ 등과 함께 세상에 발표한 수많은 작품을 통해 겨레의 애환과 역사의 아픔을 고매하도록 아
름다운 가슴으로 노래해 품격을 높였다.
그야말로 어둡고 암울했던 문학의 길을 밝히며 길을 닦아온 대표 시조 시인 중 효시가 되는 문인
으로 몸을 살라 한국문학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우리에게 이정표를 알려놓은 선생의 일대기 상당수
가 숨어 있어 지적하지 않을 수 없어 유감이다.
더욱이 우리 지역 문학에 대표적인 인물로 한국 문학사는 물론 대전, 충청 문학의 막대한 영향과
업적을 쌓고 있는 문인으로 자료들의 중요성이 절실히 요구됨은 중대하다.
더욱 연구의 자료가 되는 각종 자료를 포함한 사료들과 증거 유품들은 대전시 조례에 따라 문학관
이 관리해야 하는 규정도 별도로 정해져 있다.
따라서 이러한 자료들은 정해진 문학관에 가능한 문헌들이 보존돼 문학적이고 역사적인 의미와
역할을 다해 문학발전 부흥에 유용하게 활용되는 참고 사료가 돼야 함을 뜻한다.
물론 선생의 이러한 점을 높여 한국문학 관련 기관과 단체에서 효과적이고 능률적인 문학 연구와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 활용되고 있다는 점은 매우 신뢰적이고 고무적이어서 자랑스러
운 일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선생의 주요 사료들이 몇 사람들의 손에 흩어져 선생의 업적과 작품 세계, 작가
정신 및 예술성 등등에 더욱 견고해야 할 업적에 큰 손실과 함께 악영향을 끼쳐 문학발전과 후세들에
게 적잖은 지장을 주고 있다.
작고한 문인들을 다루려 평전이나 전기 또 다양한 글을 쓰게 되는 경우 자료가 부실하면 그만큼
손실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어 생존에 남겨놓은 자료들을 참고로 완성도를 높이는 작품집이 수
록돼야 함은 물론이어서 이 또한 미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렇지 못할 시엔 격상에 맞지 않게 일부를 들여다보며 모호한 생의 흔적들을 더듬어 재구성하는
수밖에 없게 되는 정도에 그치는 아쉬움을 남겨 원숙하지 못하게 된다.
설사 이러한 과정들을 차제하고 어느 정도 몇 권의 출판물들을 모아 읽어봤다 하더라도 선생의
작품 세계를 낱낱이 제시해 충실하게 글을 개진한다는 것은 유추와 추론에 불가하다.
한 예술가의 삶과 그의 작품세계를 통해 후대 문인들에게 당시의 활동, 동인, 예술성, 주변 환경
등을 근거와 바탕으로 기록하고 해석하는데 매우 중요히 다뤄져 이를 반영해 적시하기 때문에 필
요성이 강조된다.
그래서 각 분야에 궤적을 남긴 예인들의 자료나 사료들을 그 중요성이 가치를 지니고 있어 대전
시의 조례나 공공기관의 규칙에 따라야 하는 만큼 문화의 부흥과 문학발전을 위해 후세대들이 기록,
보존하고 계승해서 발전시켜야 한다.
앞서 밝힌 대로 이러한 일들의 문제들이 소홀하게 지속된다면 사실적 근거들을 바탕으로 분석하고
해석해 더욱 세밀하고 진솔한 연구를 진행하는데 문학발전은 물론 문학관과 문학인들에게 크나큰
지장과 손실이 미치게 된다.
설사 한두 사람들이 집성한 목록이나 또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나온 단행본 및 유고 시집 정도의 미
진한 자료들을 가지고 문학적인 삶 전체를 훑어보기엔 한참 부족하다.
따라서 선생의 모든 사료들을 망라해서 문학관에 비치, 보존돼야 함은 말할 것도 없지만 이를 소장
하고 있는 이들은 문학관의 조례나 원칙 그리고 문인으로서의 당위성을 누구보다도 먼저 잘 알고 있
는 작가들이라는 점에서 더욱 설득력을 잃고 있다.
그중 한 문인은 얼마 전 대전문학관의 2대 관장을 역임한 소설가이고 또 한 문인은 역시 대전문인협
회장을 역임한 시인이다.
개인적으로 소장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앞장서 솔선수범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문인들로 이를 모를
리가 없어 안타까우며 냉담하거나 막무가내식은 곤란하다.
원로 문인 중 한 문인은 뉴스 봄 취재팀에 전화를 걸어 신분을 밝힌 뒤 다음과 같은 제의를 제안해 왔
다.
“ 이번 사례에서 보듯 생각조차 하지 못해 부끄러운 일로 정훈 선생의 업적과 중요성을 따져볼 때 모
기관과 논의해 마무리되기를 바라지만 그렇지 않을 시 끝까지 이를 취재, 보도해야 한다”고 전했다.
이어 “사실을 근거로 이를 문체부를 필두로 한국문학 관련 기관과 단체에 이 문제를 제기해 법적 해
결방안까지 모색하자”며 확고한 뜻을 밝혀왔다.
따라서 어떠한 의도적 차원의 문제와 의식을 넘어 개인의 사욕에 치부하지 말고 대전, 충청 문학
발전과 부흥을 위해 조속한 시일 내 시민에게 반환하는 솔선수범을 보여야 할 것이다.
이로써 배려와 미담으로 본보기가 돼 좋은 선진적 선례를 남겨 주기를 기대하는 많은 이들의 바람
이기도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