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25전쟁 72주년 논평
6·25는 소련과 중국이 북한 무력 도발을 승인·지원한 현재 진행의 역사로 기억되어야 한다. 6·25는 신냉전체체에서 한반도 미래와 세계 운명을 결정짓게 하는 상수로 승화되어야 한다. 2022년은 6·25전쟁 발발 72주기를 맞는다. 보수정권이 국정 운영의 책임을 지고 지난 5월10일에 출범했다. 보수 이념의 알파와 오메가는 국토 수호와 국민 생명권에 대한 철저한 보호에 토대를 둔다. 일제강점기의 상흔도 채 아물기 전,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의 작은 뿌리도 내리기 전 대한민국은 공산당 일당 독재자 김일성의 6·25남침으로 남한에서만 4백만여 명의 살상 비극을 당했다. 그 가운데 절반이 민간인이었다. 이는 제2차세계대전과 베트남전쟁의 민간인 희생자수보다 더 많다. 국토 수호와 국민 생명권 보장에 담긴 타협불가한 가치에 대해 소련과 중국이 승인, 지원한 북한의 남한 무력 침공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역사다. 현재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대한민국의 피나는 노력은 핵무기 보유국 북한을 비롯한 패권경쟁을 일삼는 중국과 소련 그리고 일본과 대치한 상황에 놓였다. 한반도의 종전선언과 평화정착은 점점 멀어지는 듯한 상황에서 사이버전쟁을 비롯한 우주전쟁 규모의 전방위적 신냉전체제 속에서 생존해야 하는 우리는 다시 6·25전쟁의 참화가 준 참담하고 결코 잊을 수 없는 역사적 교훈을 다시 소환할 수밖에 없다. 이에 샬롬나비는 6·25전쟁 72주기를 맞아 여전히 무력 침략에 대한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소련과 중국 그리고 북한의 침탈욕에 직면하여 다음같이 천명하고자 한다. 1. 6·25전쟁은 김일성의 무력 공산화 통일 야욕이 야기한 동포 침략 전쟁임을 명심해야한다. 김일성의 전쟁 논리는 당시 남한을 친일정권으로 규정하는 데서 자신이 일으킬 전쟁을 이념적으로 정당화했다. 그리고 만주 일대에서 항일 투쟁을 전개했던 독립군마저 자신의 전쟁 야욕을 위한 수단으로 삼았다.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일본군과 싸웠지만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소련 공산당과 중국 공산당의 희생양이 되었던 독립군들을 다시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내몰았다. 이들은 중국군에 예속되어 있다가 6·25직전에 북한으로 되돌려 자들이다. 강한 외세에는 읍소하여 무력을 얻고 그 무력으로 동포를 짓밟는 전쟁에서는 이들을 독립군 미명으로 선봉대에 앞세운 전쟁이 바로 김일성이 도발한 무력 도발 6·25전쟁이다. 김일성 북한 정권은 남한의 인민을 일제 잔재에서 해방하고 민주기지를 만들어 민족주의를 바로 세우겠다는 전쟁 슬로건을 앞세웠지만 반대로 남북한의 민족주의 지도자들을 탄압하고 암살하며 숙청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일제 식민지 잔재 청산을 앞세웠지만 당시 농민들에 대한 수탈은 일제 강점기보다 더 심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그 전쟁이 민족과 동포마저 자신의 적화통일 수단으로 유린했다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다. 2. 오늘날 좌편향 교과서는 초중고등학생들에게 북침설을 유포시키고, 심지어 좌편향 정부까지 6·25 전쟁의 북한군 남침을 호도하여왔다. 6·25 전쟁은 김일성이 기획하고 스탈린이 승인했으며 마오쩌둥이 지원한 반(反)민족적 불법 침략 전쟁”인데 “심각하게 좌편향된 역사교육 때문에 오늘날 학생들이 6·25 전쟁이 남침인지 북침인지조차 제대로 배우지 못하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나아가 미국이 오히려 남한을 통해 북한을 자극하여 남침을 유도했다는 남침유도설로 나아간다. 좌편향 문재인 정부는 6.25전쟁의 발발 원인은 덮여버리고 민족 사이의 불행한 전쟁으로 덮여버렸다. 이는 역사에 대한 날조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폄훼하는 것이다. 이제 헌법에 합치한 정부가 들어선 후 윤석열 정부는 역사교육을 새롭게 해야 한다.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는 6·25전쟁이 북한의 남침을 명시하고 철저히 교육해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6·25전쟁보다는 한국전쟁이란 명칭이 선호되고 북한의 남한 침략에 대해 명학하게 설명하기보다는 브루스 커밍스류의 수정주의 이론이 인정받는 현실이다. 그러한 여파로 우리나라 학생들이 6·25전쟁의 실상을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서 북한의 남침 사실과 그로 인한 남한과 북한이 입은 전쟁피해 사실을 정확하게 교육하여 미래에 전쟁의 참화를 막고 평화를 유지해야 할 뿐만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지도록 교육해야 하겠다. 3. 6·25전쟁은 소련의 야비한 전술로 남한 침공에 합세하고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반복된다. 6·25전쟁은 소련이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철저하게 계산하며 김일성의 요청에 부응하며 개입한 전쟁이다. 38선을 만든 주체인 스탈린의 동의와 모택동의 허락이 없었다면 김일성은 남한을 침략할 수 없었다. 스탈린은 처음에 전쟁을 반대했지만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을 대만으로 축출하자 1950년 4월 결국 김일성의 남침을 승인한다. 이유는 북한을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교묘하고 잔인한 ‘방혈(放血) 전략’을 구사하기 위해서였다. 타인이 피를 흘리게 하여 자신의 이익을 취하겠다는 속셈이었다. 그래서 스탈린은 중국과 북한이 남한을 침공하여 자신을 위해 피를 흘리도록 치밀하게 계산하고 김일성을 중국에 보내 남한 침공을 허락받도록 한다. 이러한 소련의 침략은 지금도 동일한 의도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소련의 야욕은 서진(西進)의 전략적 요충지 우크라이나를 영구 점령하는 것이다. 미국의 나토확장을 명운을 걸고 막으려고 한다. 오늘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70년전 김일성을 앞세운 소련의 공산화 남침이 엿보인다. 올해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유러시아의 제국의 망상을 지닌 푸틴의 망상에서 나온 것이다. 70년전에도 스탈린은 동구권과 남아시아권에서 공산화 세력의 팽창을 보도하는 일환으로 김일성의 남침을 승인하였다. 스탈린은 군사 고문단을 보내어 북한의 김일성에게 6·25 전쟁 일정을 지휘하였고, 당시 중공 모택동의 협조를 얻으라고 김일성에게 지시하였다. 그래서 북한군이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후에 밀려서 압록강까지 후퇴하자 사전에 약속한 대로 모택동의 중공 군대가 한국전쟁에 참여한 것이다.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과거 표도르 대제가 이룩한 제3의 로마제국 부활 망상이 되살아 난 것이다. 푸틴은 근간 석유와 천연가스로 국가 재정을 뒷받침하면서 제국 부활의 야욕을 현실화했다. 미국 중심의 미사일 방어체제는 결국 러시아 침공이 목적이라는 침략 음모론으로 몰아간다. 우리는 지금 이러한 야욕을 꿈꾸는 강대국들의 틈새에서 제2의 6·25 발발을 우려하는 현실이다. 어느 정권보다 국가 안보를 위한 철저한 대비가 필요한 시대다. 최근(6월 17일, 현지시각) 러시아국방부는 우크라이나군에 참전한 한국인들이 13명이며 이 가운데 4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이에 한국 외교부는 사실관계를 확인중이라 밝혔다. 이들 한국인 용병들의 참전은 러시아의 침공에 반대하여 자유 우크라이나의 자유와 독립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6.25에 자유세계인들에 진 빚을 갚기 위한 한국 젊은이의 정신이 있다고 본다. 한국 국민으로서 긍지를 느낀다. 4. 커밍스는 6·25전쟁을 한반도 내전으로 규정한 수정주의(남침 유도설)를 2013년 부인했다. 미국 시카고대학 한국근현대사와 동아시아 국제관계 석좌교수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1943-)의 1980년대 수정주의(revisionism) 해석은 한국전쟁을 ‘내전 확대’로 규정하여 침략자의 만행을 정당화하는 시각이었다. 전통주의 시각은 냉전과 한국전쟁의 원인을 공산주의자의 야욕이 빚은 결과로 본다. 전세계의 공산화를 목표로 한 야욕을 한국에서 실험하면서 미국의 반응을 보기 위한 일종의 대리전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커밍스는 이는 김일성과 스탈린의 무력 침공의 야욕이 그 원인이 아니라 일제 식민지의 잔재들이 사회적 갈등을 야기하면서 해주 지역에서 빈발하던 남한과 북한의 국지전이 전면전으로 확대한 내전으로 규정한다. 이로써 북한 남침설은 사라진다. 이에 따라 내전확전설 혹은 남침유도설 등의 가능성을 제기한 것이다. 6월 25일 전쟁 발발 직전까지 38선 전역의 산발적 국지전은 계속 이어졌으므로 누가 먼저 선제공격 했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보았다. 수정주의는 한국전쟁의 원인이 외부적 요인이나 개인적인 야망이 아니라 사회모순에 의해서 촉발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동구권 몰락과 소련 연방 이후 그동안 숨겨진 기말문서의 발표는 김일성이 기획하고 스탈린이 승인했으며 마오쩌둥이 지원한 북한군의 침공 사실의 많은 증거들을 들추어 내었다. 수정주의는 더 이상 역사적 진실 앞에 설 수 없게되었다. 커밍스는 2013년 6월 1980년대 초 내놓은 남침(南侵) 유도설을 30년 만에 부인(否認)했다.(조선일보, 美 브루스 커밍스 교수, 30년 만에 '南侵 유도설' 부인, 조선닷컴, 입력 2013.06.23. 22:20). 오늘날 서방 자유세계는 한국전쟁은 스탈린-마오쩌둥-김일성 3자 전쟁 도발자의 공모된 계획적 남침을 올바른 역사적 사실로 수용하고 있다. 5. 6·25전쟁 낙동강 전선 돌파작전을 위한 희생양이 된 학도병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6·25전쟁 발발 한달 남짓 남한은 낙동강 이남밖에 남지 않았다. 낙동강 방어선 구축은 유엔군 최후의 보루였으며 전세 역전의 시작점이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필요했다. 분한군의 병력이 집중하지 못하도록 군사력을 분산시키는 일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었다. 참담한 희생이 준비되어 있었다. 살아오지 말고 한 명이라도 남아서 북한군의 총력전을 막으라는 그야말로 상부의 절대명령이 내려졌다. 포항 북쪽 25㎞ 지점 경북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북한군 점령 지역에 상륙작전을 전개하라는 명령이다. 이른바 ‘동쪽에서 소리 내고 서쪽을 친다’는 성동격서 전법으로 북한군을 속이기 위한 작전이었다. 한 명이라도 더 희생시켜 시간을 끌라는 참으로 잔혹한 명령이었다. 대구 피난민 중 학생들 중심으로 병력을 선별했다. 참전을 꺼리는 미8군을 탓할 수 없는 상황에서 2주 남짓 훈련받은 부대가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애초에 한국 육군은 버리는 카드로 사용한 그들은 중고등학생이었다. 3일간만 버티라고 딱 3일간의 전투물자만 지급했다. 사지로 내몰려 단지 3일 동안만 버티라는 버리는 카드, 이들이 장사상륙작전의 학도병이다. 낙동강 최후 방어선에서 6.25 전설 백선엽 장군의 영웅적인 다부동 전선 지킴으로 오늘의 대한민국의 자유는 보존되고 세계 12위 경제 강국이 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6. 6·25전쟁 휴전회담에서 대한민국이 제외된 뼈아픈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만 한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1950년 10월 1일 38선을 돌파하면서 북진이 시작된다. 그러면서 6·25전쟁은 1953년 7월까지 휴전회담이 이어진다. 휴전을 제일 먼저 제안한 국가는 소련이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을 반대하고 북진통일을 주장했다. 하지만 국군통수권을 미군에 모두 이양했으므로 휴전 협정에서는 관여할 수 없는 처지였다. 전쟁포로는 본국으로 송환한다는 제네바 협정까지 위반하면서 북한군 반공포로를 석방한다. 미국은 이승만 대통령을 제거하려고까지 하였으나 결국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확약하며 휴전협정이 체결된다. 현재까지 진행 중인 분단의 고착화는 평화정착에 가장 큰 장애물이다. 전쟁피해국 당사자가 휴전협정에서 주체가 될 수 없었던 비극적 상황을 냉철하게 고려해야만 한다.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 사건에서 우리는 또다시 전쟁피해국 당사자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뼈아픈 수모를 겪었다. 지난 정권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보다 더 치밀한 대북정책을 구상해야만 반복되는 전국민적 수모를 겪지 않고 종선선언과 평화협정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현 보수정권은 무엇보다 전쟁 억제력 완결을 집권 내에 반드시 완수해야 한다. 7. 6·25전쟁은 교회 부패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라 회개한 선배들의 고백을 꼭 기억해야한다. 6·25전쟁 발발 두 달이 조금 지난 9월초 남한 면적은 10%만 남았다. 피난행렬은 부산에 모여들었고 피난민 도시가 되었다. 피난민과 함께 수많은 목회자들도 부산으로 몰려왔다. 한상동 목사가 시무하던 초량교회는 피난 목회자 250여 명에게 숙소를 제공했으므로 자연스럽게 기도회의 중심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