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송의 충신이자 명장인 악비(岳飛)는 지금까지 중국에서 가장 추앙받는 위인으로 손꼽힌다. 그는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등에 ‘정충보국(精忠報國)’을 새기고 전장에 뛰어든 충(忠)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예부터 시로서 뜻을 전하는 것은 오랜 전통이다. 악비는 ‘악무목집(岳武穆集)’, ‘전송사(全宋詞)’ 등에 일부 시를 남겼다. 그의 시(詩), 사(詞), 상소문, 기록 등에는 충효와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결연한 포부가 스며있다. 악비의 대표적인 시 만강홍(滿江紅)을 소개한다.
만강홍(滿江紅)
성난 머리칼은 투구를 찌르는데
난간에 기대서니 오던 비도 그치네눈 치켜뜨고 하늘 우러러 울부짖으니 비장한 마음 끓어오르는구나
삼십 년 쌓은 공명 티끌 같고
팔천리 전선에는 구름과 달빛뿐이네어느 때 한가했던가
젊었던 머리카락 백발 됐으니
공허하고 슬프고 애절하구나정강의 치욕 아직 설욕하지 못했으니
신하로서 이 한을 언제 풀 수 있으리
전차 타고 하란산 어귀를 밟아
무너뜨리리라장부가 뜻을 세웠으니
주리면 오랑캐 살 뜯어 먹고
목마르면 흉노의 피를 마시며진두에 서서 빼앗긴 산하를 수복한 후 천자의 궁궐에서 알현하리라
소흥(紹興, 송 고종의 두 번째 연호) 3년, 악비는 이 천고에 빛나는 ‘만강홍’을 썼다. 충의의 기운이 얼굴을 덮치고 심금을 울린다. 비록 천백 년이 지났지만 생생하게 표현한 강직함과 기개, 비장함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
“산을 흔들기는 쉬워도 악가군(岳家軍) 흔들기는 어렵다.”라는 말이 있다. 악비는 수양이 깊고 또 일에 부딪혀도 침착하며 갑자기 적을 만나도 흔들리지 않았다. 적의 포석(炮石)이 몰려오면 다른 장졸은 놀라 좌우로 피했지만 악비는 우뚝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싸움터에 임할 때마다 악비가 탄 말이 앞장서 적진 깊숙이 들어가는데, 가는 곳마다 대적할 자가 없었다.
악비의 출병은 덕을 앞세워 무고한 사람을 해치지 않았다. ‘송사(宋史)’에 의하면, 건주(虔州) 전투에서 황제의 어머니 융우(隆佑) 태후가 매우 놀라니, 황제가 악비에게 건주성을 점령한 후 성안 민중을 도살하라는 밀령을 내렸다. 악비가 적의 수괴는 주살하되 협박에 못 이겨서 복종한 자는 사면하기를 청했으나 고종은 불허했다. 악비가 재삼 간청하자 고종은 비로소 사면을 허락했다. 이에 성안 백성들은 악비의 은덕에 감격해 악비상을 그려 모셨다.
악비군의 구호 중 하나가 ‘얼어 죽을지언정 민가에 침입하지 않고, 굶어 죽을지언정 약탈하지 않는다’였다. 병사들이 밤에 숙영하자 백성들이 방문을 열어 병사를 방에서 쉬게 하려 했으나 함부로 들어가는 사람이 없었다. 병사가 병이 나면 악비가 직접 약을 조제했다. 장군들이 원정을 가고 없으면 아내를 그들 집에 파견해 위문했다. 장병이 전사하면 악비는 비통하게 눈물을 흘리며 그들의 고아를 키우거나 전사한 장병의 딸을 거둬들였다.
사서 기록에 따르면 악비는 조정에서 추가로 수여한 ‘소보(少保, 종일품)’ 관직을 다섯 차례 사직하고 잃어버린 중원을 수복함에 뜻을 두었다. 조정의 상여금과 위문품 모두 부하에게 나눠주고 그 자신은 조금도 갖지 않았다. “제일의 공을 세웠으나 악비는 언급하지 않았다.”
군량을 징집할 때마다 악비는 “동남지역 백성의 재력 소모가 극에 달했다.”면서 백성을 걱정했다. 형호 지역이 평정된 후 백성을 모집해 밭을 경영하고 둔전(屯田, 군대에서 군량을 마련하기 위해 설치한 토지)을 실시해 매년 식량 절반을 절약했다.
악비는 충효를 근본으로 했다. 북상해 중원을 평정했기에 악비는 장기간 어머니 곁에서 효도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그는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위해 효도할 수 있기를 청했다. 그리고 “효로써 충으로 이행하며 일에는 본말이 있습니다. 만약 안으로 부모를 모시는 효를 다하지 못한다면, 밖으로 어찌 주상을 모시는 충신이 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효와 충은 같은 이치이고 가정의 일도 나라의 일과 같다. 만약 한 사람이 효도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면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할 수 있겠는가?
지주(池州)의 취미정에 오르다
해 보내며 먼지와 흙 가득한 군복 입고 특별히 취미정(翠微亭)에 오르니
아름다운 경치 찾았구나빼어난 산수 아직 구경 못 했는데
말발굽이 밝은 달빛 따라 돌아가자
재촉하는구나
여러 해 전쟁을 치렀던 장군의 전포(戰袍)는 온통 먼지투성이였다. 잠시 쉬는 사이 특별히 취미정(翠微亭)에 올라 산천의 경치를 바라보니 아름다운 강산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이 빼어났다. 하지만 갑자기 말발굽 소리 들리고 군마가 울부짖으니 장군은 휘영청 밝은 달빛을 따라 바쁘게 떠난다.
악비는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시간을 금처럼 아꼈다. 어떤 시간도 낭비하려 하지 않았고 쓸데없는 일을 하지 않았으며 안일한 마음이 없었다. 그는 일찍이 “세월은 한가로움을 따라 지나가고, 공명(功名)은 게으름 중에서 구하지 못한다(日月卻從閒裏過, 功名不向懶中求)”라는 대련을 쓴 적이 있고 ‘만강홍’에서는 “어느 때 한가했던가, 젊었던 머리카락 백발 됐으니 공허하고 슬프고 애절하구나(莫等閒, 白了少年頭, 空悲切)”라고 썼다.
천하가 태평해지는 방법
장군 오계(吳階)는 일찍이 엽전 2천 관(貫) 거금을 들여 한 선비 집안의 딸을 사서 악비에게 보냈다. 악비는 병풍으로 가리고 물었다. “우리 집안 사람들은 모두 다 무명옷을 입고 거친 음식을 먹는데 동고동락할 수 있다면 있어도 좋소. 그렇지 않으면 난 당신을 붙잡지 않겠소.” 여자가 듣고 은근히 비웃으며 그런 생활을 원치 않는다고 하자 악비는 그녀를 돌려보냈다. 부하 장수가 오계의 체면을 상하게 하지 말라고 간언했으나 악비는 말했다. “지금 나라의 치욕을 아직 씻지 못했는데 대장으로서 어찌 안일하게 즐거움을 취하겠는가?” 이후 오계는 알고 악비를 더욱 존경했다.
악비는 ‘문신이 재물을 좋아하지 않고 무신이 죽음을 아끼지 않으면 천하가 태평할 것이다(文臣不愛錢, 武臣不惜死, 天下平矣)’라는 명언을 남겼다.
혜해 스님에게 보냄
분포 여산은 몇 번이나 가을 지났는가
장강은 굽이쳐 동쪽으로 흐르네대장부가 왕실 보위의 뜻 세우니
성주(聖主)의 군대는
적의 두목 사로잡아 섬멸하고공덕 업적 연석에 새긴 후 귀휴하면
마침내 적송과 함께 유람할 수 있네동림사 노승에게 간곡히 전하노니
연사(蓮社)는 이때부터 힘써 수행하리라
악비의 고향 산천인 분포(湓浦)와 그곳에 있는 여산(廬山)은 세월이 유유하고 구불구불한 장강은 천천히 동쪽으로 흐른다. 대장부는 마땅히 원대한 포부로 천하를 평정해야 하고 공덕과 업적을 연석(燕石, 원래 연산의 돌이나 후에는 공덕비를 지칭) 위에 기록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관직에서 물러나 휴식을 취하고 적송(赤松)과 함께 유람할 수 있다. 이 일을 여산 동림사 주지에게 알리며 수련에 뜻이 있는 사람들과 응당 전심전력 수행할 것이다.
시인은 ‘적송’의 고사를 활용했다. 남북 정벌 전쟁과 중원 보위는 과정이지 목적이 아니다. 시인이 진심으로 바라는 바는 무엇일까? 바로 적송자(赤松子) 신선과 유람하는 것이며, 아울러 수련에 뜻을 둬 마음을 다해 수행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1. 명심(明心), "악비, 천고에 길이 남을 충의 화신", 명초주보, 2023.2.28일자. 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