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3·1 독립정신 글쓴이 신상구 날짜 2023.03.10 01:38

                                    3·1 독립정신


[신주백의 사연史淵] 3·1 독립정신

    지난주에 104번째 3·1절을 맞았다. 그날은 광복절과 더불어 한국의 근현대사에 커다란 전환점을 남긴 의미를 되새기는 기념일이다.

신주백 역사학자·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신주백 역사학자·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국내외에서 3개월가량 전개된 독립 만세 시위는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집합적 열망을 서로가 직접 확인한 순간이었다. 한반도의 남쪽 끝과 북쪽 끝에 거주하는 사람이 서로 생면부지(生面不知)였음에도 같은 요구를 내걸었기 때문이다. 3·1운동은 한반도에 거주하는 구성원이 문자로 자기 역사를 기록한 이래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다 같이 들고 일어난 최초의 역사적 사건이었다.

  압록강과 두만강 건너에서도 조선 독립을 외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만주지역에서 조선인의 외침은 예외적인 경우였다.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 거의 대부분은 조선의 실정과 관계없었기 때문이다. 3·1운동은 대륙과 한반도를 가르는 지리적 구분만이 아니라 정치적 경계선까지도 명확히 드러낸 사건이었다.

제헌헌법의 기본 정신은
전쟁과 독재 시기를 지나
세계화를 겪으며
바뀌어 왔지만
지금 현실은 그 정신을
더 필요로 하고 있다

                                    1. 3·1 독립정신을 계승한 임시정부의 헌법

   3·1운동 때 정치적 일체성과 민족적 정체성이 겹치는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는 과정은 미래 공동체를 향한 공동의 희망을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만세 시위에 참여한 어떤 사람은 자신이 직접 경작할 땅을 가질 수 있다는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또 어떤 사람은 독립해도 예전의 지배 질서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그들은 다양한 희망을 독립국, 곧 공화국이란 미래 국가로 압축해 드러냈다. 유인물로만 전해지고 실체가 불명확한 ‘전단(傳單)정부’에서조차 그러했다. 3·1운동은 유럽과 달리 시민혁명을 겪지 않은 식민지 조선인들이 공화정을 미래의 대안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결정적 경험이었다.

   만세 시위에서 표출된 정치적 의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결성으로 이어졌다. 임시정부는 3·1운동 때 조선이 독립국이고 조선인이 자유민임을 선언했고 인류 평등의 대의를 매우 분명히 했다고 밝혔다. 독립·자유·평등의 정신은 임시정부 헌법의 씨앗인 1919년 임시헌장에서 ‘대한민국을 민주공화제로 한다’는 규정으로 압축되었다. 공화와 민주를 융합한 민주공화국은 국민이 기본적인 자유를 향유하고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보장받는 국가였다. 남녀의 차이와 신분의 귀천, 빈부의 격차가 없는 ‘평등’한 국가였다.

   이후 임시정부는 헌법을 다섯 차례 개정했다. 그러면서도 자유·평등·민주주의를 헌법의 기본정신으로 일관되게 고수했다. 그렇다고 개인의 자유를 절대적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입장이 아니었다. 임시정부가 말하는 자유는 개인의 정치적 의사 표현과 경제적 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국가의 행위를 억제하고 제한하는 자유주의와 달랐다. 선량한 풍속을 해치고 죄악을 선동하거나 치안을 방해하며 공공의 이익에 손해를 입히는 언행을 국가가 나서서 간섭할 수 있는 자유였다. 임시정부는 자유를 제한해야 하는 이유를 평등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데서 찾았다. 임시정부의 헌법은 평등권을 자유권보다 우위에 두었던 것이다.

  임시정부 헌법에서 말하는 평등은 당시의 소련식 사회주의, 곧 계급차별에 기초한 직능별 대표제로 운영되던 국가의 평등이 아니었다. 임시정부의 헌법은 개인의 사적인 소유를 부정하고 사회적 소유와 국가의 통제를 원칙으로 하며 결과적 평등을 추구한 소련식 민주주의와 확연히 달랐다. 보통선거는 참정권의 평등화라는 측면에서 기회의 평등을 중시하는 경향에 딱 들어맞는 민주주의 원칙이었다. 공화와 민주를 융합해서 민주공화라는 말로 헌법에 조문화하고 정치적 주장으로 제기한 이유의 하나도 여기에 있었다.

특히 문제인 것은
자유롭고 민주적인
기본질서라는 의미를
자유민주주의로 왜곡하며
진영·이념 갈등 부추기는
세력이 여전히 있는 것

                                            2. 헌법 정신의 구체화, 전략화

  1930년 임시정부 관계자들이 참여하여 균등을 강조한 한국독립당을 결성하면서부터 임시정부 헌법의 기본정신은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주장을 체계화하고 논리화하는 과정을 이끈 사람은 대공주의(大公主義)를 제시한 안창호와 균등을 구상하고 있던 조소앙이었다.

  임시정부는 1931년 들어 삼균제도를 건국의 원칙으로 천명했다. ‘신민주국’에서 보통선거 제도를 실시하여 정치를 균등히 하고, 국유제도를 채용하여 이권을 균등히 하며, 의무교육을 실시하여 교육을 균등히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더 나아가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의 평등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나온 주장이 ‘민족균등주의’였다. 이는 식민지 조선 사회가 통치자이자 착취자이고 특권자인 일본인 계급과 여기에 대적하는 피통치자이자 피착취자인 한국 민족 계급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독특한 분석에서 나온 주장이다. 임시정부는 경제적 분화로 생긴 계급관계와 정치적 주종관계에서 발생한 계급관계가 서로 일치한다며 이를 민족적 계급관계라 불렀다.

  민족관계를 계급관계와 중첩시킨 인식은 ‘한국혁명’이 ‘복식(複式)이 아닌 단식(單式)’일 수밖에 없다는 혁명론으로도 이어졌다. 임시정부가 정리한 한국혁명은 중국공산당이나 조선공산당처럼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 단계에 이어 프롤레타리아사회주의혁명 단계로 나아간다는 2단계 혁명론이 아니었다. 비록 한국독립당이 한국혁명 과정에서 토지와 대생산기관을 국유화하고 국민의 생활권을 평등하게 하겠다고 내세웠지만 사회주의 국가를 전망하지 않았다고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대로 임시정부는 ‘단식’ 과정에서 자본주의 국가를 수립한다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그랬다면 토지 국유화를 내세우지도 않았을 것이다. 임시정부는 신라 때부터 있던 국유제를 채택해 온 데다 조선왕조 때의 사유제 폐단을 반복하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국유화를 내세웠다. 더구나 일본인이 전국 토지의 7할을 차지한 식민지의 현실도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 마찬가지 현실은 일본인이 8할 이상을 차지한 생산시설에도 있었다. 그래서 일제가 압도적으로 장악한 경제 현실은 독립 이후 수립할 민주공화국에서 균등의 원리를 적용해야 하는 근거였다.

  식민지 조선의 현실에 대한 진단과 대응논리는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정치적 입장을 불문하고 공감을 얻고 있었다. 가령 임시정부 세력과 치열하게 경쟁하던 민족혁명당조차 2단계 혁명론을 부인하면서 토지와 대생산기관의 국유화를 강령으로 내걸었다. 달리 말하면 조소앙이 말한 대로 “자본주의 사회를 건설한다면 따라올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진단할 정도였다.

  임시정부는 이때까지의 주장과 전략을 ‘건국강령’에 담았다. 1941년 11월 제정한 강령은 삼균주의에 입각해 건국의 방향을 뚜렷이 하고 그 과정을 설계한 건국선언이다. 임시정부의 여당인 한국독립당 또한 자본주의도 아니고 사회주의도 아닌 한국 민족을 단위로 한 신민주국을 세우겠다고 선언했다.

우리 헌법의 기본 정신인데
위협받고 있는
독립과 민주주의
자유와 평등을 지켜낼
새 처방전이 필요한 때다
3·1정신 계승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3. 독립정신의 현재와 계승 방향

  1945년 이전의 헌정 경험과 축적된 노하우는 제헌헌법 제정 과정을 원활하게 했다. 1944년의 다섯 번째 개헌안이 제헌헌법의 기본 체제를 제공할 정도였다. 제헌헌법 제정 과정이 상대적으로 수월하고 기간이 짧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제헌헌법은 첫 부분에서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정신을 계승한다고 밝혔다. 달리 말하면 일본의 지배는 불법이며 정통성이 없다고 밝힌 것이다. 제헌헌법이 내세운 민주주의 제도의 수립은 독립운동가들이 꿈꾸었던 국가, 곧 국민주권에 기반을 둔 민주공화국으로 구체화했다. 또 다른 헌법 정신인 균등 원리는 제헌헌법에 국민 생활의 균등한 향상에 노력한다고 명시되었다. 이에 따라 제헌헌법에는 균등의 원리가 모든 영역에까지 확대하여 조문화되었고,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지향한다고 명문화되었다. 제헌헌법 기초위원회 위원장 서상일은 제헌헌법의 모든 영역에 만민균등주의를 적용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제헌헌법의 기본정신은 한국전쟁을 겪고 독재 시기를 지나 세계화 시대를 겪으며 바뀌어 왔지만, 지금의 현실은 그 정신을 더 필요로 하고 있다. 자유롭고 민주적인 기본질서라는 의미를 자유민주주의로 왜곡하며 진영 간 이념 갈등을 부추기는 세력이 여전히 남아 있다.

  사람과 경제력이 수도권에 집중되고 소득이 양극화되는 비대칭 현상은 강렬한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이에 따라 국민의 삶의 만족도는 2019~2021년 사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운데 최하위권에 속했다. 민주주의 지수는 2022년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로 분류되는 24개 국가 가운데 최하위인 24위를 기록했다. 특히 대결정치문화와 국민의 자유가 문제였다. 우리 헌법의 기본정신인데 위협받고 있는 독립과 민주주의, 자유와 평등을 지켜낼 새로운 처방전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3·1 독립정신을 계승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참고문헌>

  1. 신주백, "3.1독립정신", 경향신문,2023.3.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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