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①황복사지로 추정되는 절에 세워진 3층 석탑에서 나온‘사리장엄구’. 금과 은으로 만든 굽다리접시(높은 굽이 달린 그릇), 각종 구슬 등이 발견됐어요. ②3층 석탑의 사리장엄구에서는 순금 불상 두 점도 나왔어요. 그중 한 점인 입상(굤像)이에요. ③이곳에서 나온 좌상(坐像) 모양의 불상. ④3층 석탑의 모습. /국립경주박물관
- 국립경주박물관은 9월 12일까지 '낭산: 도리천 가는 길' 특별전을 열어요. '낭산'(狼山)은 신라 왕궁인 월성(月城)의 동남쪽에 위치한 해발 100m 정도 나지막한 산으로, 신라인들이 일찍부터 신성한 곳으로 여기던 곳이에요. 신라 역사에서 낭산은 어떤 의미를 가진 곳이고, 주변에 어떤 중요한 문화유산이 있는지 알아볼까요?
- 신들이 노닐던 곳에 세워진 사찰과 왕릉
- 낭산은 신라 토착 신앙과 불교, 국가 제사의 중심지였어요. 삼국사기에 따르면 413년 가을 낭산에서 뭉게구름이 피어났는데, 누각(樓閣·사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문과 벽 없이 높이 지은 집)처럼 생겼고 향기가 가득 퍼져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대요. 이것을 본 신라의 제18대 왕 실성왕이 "이는 반드시 신선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노는 것이니 응당 이곳은 복 받은 땅이다"라고 말했고, 이때부터 낭산에서 나무 베는 것을 금지했대요.
- 불교가 공인된 이후 낭산 사방에는 중요한 사찰이 세워졌어요. 낭산 남쪽 기슭에는 사천왕사(四天王寺)와 망덕사(望德寺) 등 사찰을 세우고, 북쪽에는 황복사지로 추정되는 절과 구황동 9층 목탑을 세웠어요.이처럼 낭산 주변에는 국가나 왕실이 중요하게 여기는 사찰을 세워 각종 불교 의례를 거행했어요. 신라 초기에는 신선들이 노닐던 토착신앙의 성지로 여겨졌던 곳이 7세기에 접어들며 점차 불교와 결합한 신성한 장소로 바뀌게 된 거지요.
- 낭산과 그 주변에는 신라의 대표적인 왕릉군이 조성돼 있기도 해요. 낭산 남쪽 정상에는 선덕여왕릉이 있고, 그 주변에는 진평왕릉과 신문왕릉으로 추정되는 무덤 등이 자리하고 있어요. 신들이 노닐던 곳에 사찰이 세워지고, 국왕의 무덤까지 만들어지면서 낭산은 신라왕들이 죽은 뒤 영혼의 안식을 취하는 신성하고 복된 땅으로 여겨졌어요.
- 왕과 왕비 명복 빌며 세운 석탑
- 낭산 동북쪽의 경주시 구황동에는 높이 7.3m 3층 석탑이 남아 있어요. 이 일대에는 황복사(皇福寺)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돼요. 황복사는 신라 왕실이 복을 빌던 사찰로 승려인 의상대사(625~702)가 29세에 출가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위치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어요. 1942년 3층 석탑을 수리하다가 2층 탑신석(석탑의 몸체를 이루는 돌) 안에서 각종 '사리장엄구'를 발견하게 됐어요. 사리는 석가모니의 유골 또는 유해를 가리키는데요. 사리장엄구는 사리를 담는 용기나 사리함에 넣는 공양물(영혼에게 바치는 물건) 등을 의미해요.
- 이 중 금동으로 만든 사리 외함(外函)의 뚜껑 안쪽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요. 692년 신문왕(재위 681~692)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내 신목태후와 첫째 아들 효소왕이 함께 3층 석탑을 세웠다는 내용 등이 적혀 있었어요. 그 뒤 700년에 신목태후가, 702년에 효소왕이 차례로 세상을 떠났고 706년 신문왕의 둘째 아들 성덕왕(재위 702~737)이 불사리(부처의 유골) 4개와 6촌(寸) 크기(12㎝ 내외로 추정)의 아미타불상, 경전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 1권 등을 이 석탑에 안치했다는 내용도 있었고요. 이 글귀를 통해 석탑이 신문왕과 효소왕·성덕왕이 관련된 신라 왕실의 석탑이라는 점, 그리고 사리장엄구는 성덕왕이 직접 공양한 것임을 알 수 있게 됐지요.
- 사리함 안에서는 순금 불상, 금과 은으로 만든 굽다리접시(높은 굽이 달린 그릇), 각종 구슬 등도 발견됐는데요. 이는 통일신라 초기 불교 문화의 우수성을 잘 보여주고 있어요. 특히 순금으로 만든 두 점의 불상은 사리함 안에 불상을 안치한 가장 오래된 사례에 속해요. 광배(光背·조각상의 머리나 등 뒤에 광명을 표현한 것)와 대좌(臺座·불상을 올려놓는 곳)가 온전하게 남아 있는 불상으로도 유명하고요. 두 점 모두 세련된 미적 감각과 섬세한 주조 기술을 갖춘 통일신라 불교 조각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답니다.
- 신라 왕실의 바람 담은 순금 불상
- 사리 외함에 새겨진 기록대로라면 두 불상 중 1점은 706년 안치한 아미타불상이에요. 두 불상은 각각 입상(立像)과 좌상(坐像)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요. 먼저 입상은 이목구비 경계나 윤곽이 부드럽게 표현돼 있고, 살짝 올라간 양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어요. 신체를 덮고 있는 옷주름이나 연꽃으로 장식된 낮은 대좌의 형태는 7세기에 유행하던 불상 형식과 매우 닮았어요.
- 이에 반해 좌상은 8세기 전반에 국제적으로 유행하던 당나라 불상 양식이에요.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 대신 위엄과 권위가 서려 있죠. 대좌 아래로 흘러내린 옷주름 표현이나 한 손을 올리고 다른 한 손을 무릎에 얹는 손 모양은 같은 시기 당나라에서 유행하던 아미타불상의 손 모양과 매우 닮았어요. 이런 두 불상의 특징을 고려할 때 좌상이 바로 706년에 순금으로 만든 아미타불상이라 할 수 있어요.
- 효소왕은 692년, 6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어머니 신목태후가 섭정(攝政·임금을 대신해 나라를 다스림)을 한 것으로 생각돼요. 700년에는 귀족 세력의 반란이 일어났고, 국왕의 든든한 후원자인 신목태후가 세상을 떠났어요. 702년에는 효소왕마저 16세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요.
- 효소왕에게는 아들이 없었어요. 그래서 신문왕의 둘째 아들이자 효소왕의 친동생인 성덕왕이 국왕이 됐어요. 이처럼 황복사에 3층 석탑이 건립되고 석탑 2층에 사리장엄구를 안치할 무렵, 신라의 왕권은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어요.
- 효소왕은 아버지 신문왕의 명복을 빌며 3층 석탑을 만들었고, 성덕왕은 살아생전의 태평성대가 다시 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온갖 정성을 다해 순금 불상을 만들어 석탑에 안치했어요. 낭산 동쪽 기슭에 자리한 3층 석탑의 뛰어난 조형미와 순금 불상을 비롯한 사리장엄구의 높은 예술성은 이러한 신라 왕실의 간절한 바람을 담고 있답니다.
- [낭산에 묻힌 선덕여왕]
- 낭산 일대에 처음 왕릉을 조성한 것은 선덕여왕(재위 632~647)으로, 선덕여왕릉이 낭산 남쪽 봉우리 정상에 남아 있어요. 삼국유사에 따르면, 선덕여왕은 아무런 병이 없는데도 자신이 죽을 날을 예언하며 "도리천(忉利天)에 장사를 지내 달라"고 했대요. 불교에서는 세계의 중심에 '수미산(須彌山)'이라는 곳이 있다고 믿으며 이 산 꼭대기에 도리천이 있다고 생각했는데요. 이에 신하들이 도리천의 위치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선덕여왕은 "낭산 남쪽"이라고 대답했다고 해요. 여왕이 세상을 떠나자 신하들은 낭산 남쪽에 정성 들여 장사를 지냈죠.
- <참고문헌>
- 1. 이병호, "신선이 노는 복되고 신성한 땅...사찰ㄱ가 왕릉 만들었죠", 조선일보, 2022.7.14일자. A26면.
신선이 노는 복되고 신성한 땅, 경주 낭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