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관의 길을 포기하고 32년간 전국을 돌며 농요와 민요를 채록해 자료를 정리한 민족음악연구소 이소라 대표 모습. 전국해양문화학자대회 회원들과 함께 태안해변 답사왔다가 급물살로 수많은 고선박이 침몰한 관장목 앞에서 기념촬영했다.
당진에서 열린 전국해양문화학자대회(7.7~7.10) 둘째 날 일정은 분과회의에 이은 융합토론이다. 필자 차례가 되어 5분과에서 발표하는 순간 꼿꼿한 자세로 경청하는 한 여자 분이 눈에 띄었다.
셋째 날 일정은 태안과 보령일대 답사다. 그녀 옆자리에 앉아 "하는 일이 무엇이냐고 묻자 민요를 주로 연구한다"고 했다. 요새 국악을, 더군다나 농요를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농촌에 가도 옛날처럼 모심고 논매며 새참으로 마신 막걸리에 취해 흥에 겨워 부르는 농요를 들을 수가 없다. 그런데 전국의 읍면별 농요를 찾아 채록하고 자료집을 만들어 온 지가 어언 32년째다. 호기심이 나 살아온 이야기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민요연구가인 이소라(72)씨. 부드럽지만 범접할 수 없는 기상을 느꼈다. 민족음악으로 방향전환을 꿈꾸기 전 그녀의 경력을 들으면 거의 모두가 부러워할 위치다.
창원에서 태어나 부산여중과 경기여고를 거쳐 서울법대에 진학한 그녀는 법과 철학, 음악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살았다. "법은 어려운 사람을 돕기 위한 도구"라고 생각해 법대에 진학했는데 끌리는 쪽은 철학과 음악이었다.
▲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태안보존센터 연구원으로부터 고선박보존 방법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는 회원들 | |
ⓒ 오문수 |
대학교 1학년부터 이웃의 문리대 철학과 강의를 모두 청강했다. 독일로 가서 철학박사를 꿈꾸었다. 학문을 하기 위해서는 어학이 필수라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까지, 나중에 필요하면 독해할 수 있도록 준비하였다.
법대의 예정된 코스는 검판사가 되는 것. 그녀는 3학년 2학기에서야 본격적으로 고시공부에 나섰다. 2학년 때 첫 민법강의를 들은 친구들이 명강의라는데 흥미가 나지 않았다. 합격자가 극히 소수였던 고로 무엇이 그리 어려울까? 라는 점에 호기심을 느꼈으나 1년 정도 하다 보니 역시 고시공부는 재미없었다. 사색을 좋아하는 그녀가 깊은 명상을 하기 시작했다.
"판사, 철학박사, 음악을 찔끔찔끔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기독교 집안이라 사회봉사를 하겠다는 생각으로 변호사 자격만 갖출 생각이었으나 사회봉사는 법관의 길이 아니어도 할 수 있다, 또한 철학은 박사가 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생활 속에서 할 수 있다, 그러나 음악은 배우지 않고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세 가지를 한다면 남들은 '아 이사람 괜찮은 사람'이라 여길테지만 나 스스로는 만족할 수 없을 것 같았어요. 한 가지만 하자! 이리하여 4학년 2학기 중간에 음악을 하겠다고 선명하게 결정했지요. 물론 졸업시험은 쳐서 법학사이긴 합니다만"
실망한 부모님은 딸의 마음을 돌려볼까 하고 생활비를 끊으셨다. 하지만 딸의 굳은 결심을 들은 어머니가 집안 형편이 어려운데도 피아노를 사주셨다.
▲ 전국해양문화학자대회에 참가한 일행이 답사하는 동안 이재언 연구원이 지참한 드론이 사진 촬영을 담당했다. 드론을 향해 손을 흔드는 일행들 | |
ⓒ 오문수 |
서울음대 작곡과(2년)에 학사 편입한 그녀는 서양음악과 함께 국악강의도 들으면서 함석헌 선생님의 노자, 장자 강의를 쫓아 다녔다. 대학원에서 국악을 전공하려면 학부에서도 국악과를 나와야 하던 시절이었다.
이론은 언제라도 쫓아갈 수 있겠으나 악기는 연륜이 필요하다. 오전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피아노, 거문고, 가야금, 해금, 장구 등 악기 연마에 매달렸다. 그러는 동안 제도가 바뀌어 어느 학부를 나오든 대학원을 선택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녀는 드디어 서울음대 대학원에서 국악이론 전공을 할 수 있었다.
"사회적 출세의 관문이라던 법의 길에서 음악으로 돌리며 가진 유일한 바람은 내가 하는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일선에 서 나가는 사람이 되어야하겠다는 일념뿐이었요. 대학교수가 되는 정도는 안중에 없었죠."
리듬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굿음악과 전통 무용 중엔 난해한 장단이 많았다. 동해안별신굿, 남해안별신굿, 서해안 별신굿 등의 굿음악 장단을 익히는 한편 굿거리 장단의 속살을 느끼기 위해 굿거리 춤을, 진쇠장단을 알기 위해 진쇠 춤을, 살풀이 장단을 위해 살풀이 춤을 배워나갔다.
대학원 졸업 후 문화재청에 입사한 그녀의 첫 일거리는 농요를 지정하기 위한 보고서 작성이었다. 농요엔 크게 어려운 장단이 없어 그녀의 연구 대상으로는 삼지 않았다. 그녀의 운명을 결정지은 사건이 벌어졌다. 경북예천의 통명농요를 녹취하고 돌아오려는 찰나에 군청직원이 "이웃면인 풍양에 가면 전혀 다른 농요가 있습니다"라고 말해 풍양면엘 들렸다.
이층 마을회관에 노인들이 가득이었다. 전임 면장 재직 당시에 한 번씩 모이면 부르던 농요였으나 면장도 퇴임하셨고, 방송국이나 누구도 찾아와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던 터라 "이 노래 불러 무엇하느냐?"고 시들한 판에 그녀가 들렀던 것이다. 낙동강 지류를 사이에 두고 생활권이 달랐던 터라 두 지역의 농요가 판연히 달랐고 모두 우수했다.
"귀경 길에, 이분들에게 공연 기회를 만들어 줄 수 없을까 ? 생각했었지요. 농요보존회(현 두레소리보존회의 전신)라는 단체를 발족시키고는 서울로 초대하여 공연했어요. 이를 계기로 경북 대표로 전국민속경연에 나가 국무총리상에 이어 대통령상까지 수상하자 경상북도에서 공처농요를 도문화재로 지정했어요."
아무리 노래가 좋아도 선소리꾼이 돌아가시면 소리가 사라지는 현실을 안타까워한 그녀는 3년 동안 각 시군마다 3개 읍면씩의 농요를 녹음해 가면서 <한국의 농요> 제1집을 발간(1985년) 했다.
▲ 당진에서 열린 전국해양문화학자대회에는 일본 규슈박물관 담당자도 참가해 분과회의에 참여했다. | |
ⓒ 오문수 |
해보니까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연구로 삼은 리듬관계는 잠시 제쳐두고 읍면당 1개 마을씩 논매기소리가 제대로 파악될 때까지 해당 읍면의 농요를 녹음하는, 전국의 각읍면당 방문녹음에 들어갔다.
1970년대 제초제가 전국적으로 보급되면서 논맬 필요가 없어졌기에 농요는 선소리꾼의 기억 속에서만 남아있었다. 물론, 가창자로부터 그가 보유하고 있는 전래민요 일체를 녹음했다. 1989년 8월, 천신만고의 고생 끝에 국내의 방문 녹음을 끝냈다.
동남아시아까지 연구범위를 확장한 이소라
끊임없이 학문에 매진하는 그녀의 천성은 버릴 수 없었다. 그녀는 후렴없이 교대로 부르는 경상도의 모정자소리가 언제부터 불렸을까? 가야나 신라 유민을 따라 일본에도 전파되었다면 적어도 통일신라 때에 는 존재하였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래서 일본으로 갔다. 옛 가야의 중심지대 모심는 소리 가사엔 아침노래, 점심, 저녁노래의 구분이 있다. 일본 모심기소리 조사의 첫날, 도꾜의 일본민요협회에 들려 정리해 놓은 열람장을 보니 아침, 점심, 저녁노래의 구별이 있는 카드가 얼른 눈에 띄었다.
바로 이거다! 싶어 부탁하여 선율을 들을 수 있었다. 후렴구가 없이 대귀관계로 엮어져 있었다. 가창지역인 오사카로 갔다. 오사카 민요전문가인 미기다 선생을 만났다.
그는 그의 저서 뒤에 정리해 놓은 이상한 긴 후렴구를 보여주며 신라지역에서 도래된 모심는 소리라 여긴다고 하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시니쇼', '시냐쇼' 등 시옷 계통이라 한국의 상사지대인 백제 문화권과 연결 될 거라고 조언을 드렸다. 그와 함께 그 당시 82세인 히타카 할머니를 만나 그녀의 무후렴 교창형 모심는 소리를 녹음할 수 있었다.
일본의 모심는소리를 파악하고는 세편의 논문으로 정리한 다음, 중국으로 갔다. 일본사람들은 한반도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았다는 얘기를 안 하려할 것이고, 중국의 모심는 소리가 궁금하였기 때문이다. 중국의 벼농사지대 50개성을 모두 다녔다. 그 당시 웬만한 중국학자들보다 더 많이 다녔다.
▲ 전국해양문화학자대회 둘째 날에 열린 16분과(특별)에는 한국학자 뿐만 아니라 영국, 일본, 중국의 학자들이 참여해 자신이 연구한 분야를 발표하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 |
ⓒ 오문수 |
중국의 모심는 소리를 파악하고 나니 벼의 전래문제와 함께 더 서쪽으로 가보고 싶었다. 베트남, 캄보디아, 필리핀, 미얀마, 태국, 인도네시아의 토라자와 발리 등등.
인도의 앗삼지방은 야생벼가 자라던 곳이다. 1997년도에 분쟁지역이라 위험하다고 하였지만 들어가 며칠간 머물렀고 벼농사지대인 남인도도 보름가까이 다녀보았다. 하지만 인도 학자들의 기본 조사가 없어 인도 모심기소리는 파악이 되질 않았다.
▲ 민족음악연구소 이소라 대표가 70세에 출간한 <나요당 민요집>. '나요당'은 이소라 대표의 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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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를 계속하는 동안 책 50여권과 논문 100여편을 쓴 그녀는 70세 기념으로 자신의 호를 딴 <나요당 민요집>을 발간했다. "판사 안하기 잘하셨다"고 하자 "이 땅에 태어났으니까 하나는 해놓고 가야하지 않겠습니까?"하고 반문하는 그녀.
호가호위하며 권세를 누릴 수 있는 자리를 마다하고 사라져가는 농요를 살리는 데 일생을 바친 그녀 모습에 숙연해짐을 느끼는 건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