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그림자 없는 평등 세상, 장욱진의 이상향 글쓴이 신상구 날짜 2022.08.24 03:50

                            그림자 없는 평등 세상, 장욱진의 이상향


장욱진의 ‘마을’(1984년). 작가의 풍경에는 그림자가 없다. 이상향을 표현했기에 명암이 필요 없다. 장욱진이 그린 마을의 사람과 자연은 평등하고 자유롭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
  “난 그림 그린 죄밖에 없다. 난 술 마시고 그림 그린 죄밖에 없다.”

  세상 사람들이 화가에 대하여 뭐라고 말하면 으레 하는 말, 바로 술 마시고 그림 그린 죄밖에 없다는 것. 화가 장욱진(1917∼1990)의 말이다. 하기야 장욱진 하면 술과 얽힌 일화가 많다. 화가가 이승을 떠난 이후 지인들이 화가를 회고한 글에 의하면, 술과 얽힌 이야기가 넘치고 넘친다.

  화가는 그림 그릴 때면 치열하게 그렸지만 그림이 풀리지 않으면 술로 달래면서 창조의 여신이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화가는 ‘산다는 것은 소모한다는 것’이라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에너지를 소진시켰다. 음주 활동 역시 소진 행위의 다른 이름이었다. ‘심플’은 화가가 제일 좋아하는 단어였다. 그만큼 단순한 생활이었고, 그림조차 단순했다.

  키가 크고 마른 체구, 달변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화가의 주위에는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화가의 진정성은 사람을 끄는 독특한 매력이었다. 나 역시 신인 평론가 시절에 화가와 여러 차례 만났었다. 대낮일지라도 화가는 으레 술집으로 데리고 갔다. 특별하게 주문하는 안주도 없었다. 대취하여 화가를 명륜동 댁으로 모시고 가면 으레 부인으로부터 ‘한 말씀’을 들어야 했다. 산다는 것은 소모한다는 것. 화가는 그림 그리는 일 이외 심신을 위한 ‘알코올 소독’을 참으로 열심히 했다. 장욱진은 꾸준하게 그림을 그렸고 현재 700여 점의 유화 작품을 헤아릴 수 있다.

장욱진의 ‘하늘과 마을’(1988년). 그의 마을은 실경이라기보다는 상상력에 의한 심상의 표현이다. 원근법이나 대소의 비례 감각 같은 것은 무시된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특기 사항 하나, 장욱진의 그림은 크기가 아주 작다는 점이다. 소품이지만 화가는 거기에 온 세상을 담았다. 그가 즐겨 선택한 소재는 가족이고, 조그만 마을이고, 산과 나무 같은 소박한 자연이다. 이들 그림은 단순한 구도에 간략한 표현 기법으로 별다른 꾸밈조차 없다. 본질 추구, 화가의 진면목이다. 마치 순진무구한 어린이의 그림과 같다. 그래서 보는 이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다. 실경이라기보다 화가의 상상력에 의한 심상(心象) 표현이다. 그렇기 때문에 장욱진의 그림은 배경 처리 혹은 원근법이나 대소의 비례 감각 같은 것을 무시했다.

  장욱진은 새를 즐겨 그렸고, 그 가운데 까치를 많이 그렸다. 까치는 희소식을 전해 준다는 길조(吉鳥)다. 장욱진 화풍에 변화를 읽을 수 있는 바, 까치 표현의 경우도 그렇다. 화가 청년기의 까치는 날렵한 맵시로 꼬리 역시 날카롭다. 장년기에 들어서면 까치는 완만한 모습으로 꼬리를 선이 아니라 면으로 처리했다. 후덕해진 모습이다. 노년기에 이르면 까치는 뚱뚱해지고 배 부분을 하얗게 처리했다. 날렵한 새가 통통한 새로 바뀐 것은 그만큼 연륜이 흘렀다는 의미인가. 특히 장욱진은 인도 여행 이후 새 그림에 변화를 주었다. 인도 영취산 아래에서 화가는 크고 새까만 새들을 많이 보았다. 그 이후 장욱진의 새는 더 커지고 새까맣게 그리게 되었다고 딸(장경수)은 증언했다.

  장욱진은 학생 시절 충남 예산 수덕사에서 지낸 경험이 있다. 그때 만공 스님과의 만남은 평생 불교와 친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장욱진의 작품 속에서 불교적 세계관과 만나는 것은 아주 쉽다. 화가는 뒤에 통도사 경봉 스님을 만났다. 스님의 뭐하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화가는 ‘까치 그리는 화가’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경봉 스님은 화가에게 비공(非空)이라는 법명을 지어 주었다. 아주 추운 어느 겨울날 화가는 ‘진진묘(眞眞妙)’를 그렸다. 불도 때지 않고 식사도 거르면서 일주일 동안 그림만 그렸다. 식음 전폐의 제작. 화가는 그림을 완성하고 그대로 쓰러져 오랫동안 앓아야 했다. 고통을 안긴 그림이어서 이내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어야 할 정도였다. 화가가 부인을 모델로 하여 처음으로 그린 초상화였지만 그림의 운명은 그렇게 되었다. ‘진진묘’(1970년)는 극도로 절제된 선묘(線描) 중심으로 단순화시킨 인물상이다. 마치 불상처럼 서 있는 모습, 보살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진진묘’는 화가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이다.

  나는 한국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특히 불교회화사를 공부하면서 의문 하나를 가졌었다. 왜 불화에는 그림자 표현이 없는가. 단원 김홍도의 작품인가 아닌가로 논란이 있는 불화가 경기 수원 용주사에 있다. 그 불화는 서양 회화처럼 명암법으로 입체감을 주어 눈길을 끌고 있다. 용주사 불화는 예외적인 작품이다. 그림자가 있다는 것은 바로 양지와 음지가 있다는 것이다. 불국토는 완벽한 열반의 세계인데 어찌 그림자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늘이 있다면 평등의 세계가 아니다. 명암 대비는 이승에서의 일이다. 불국토를 형상화한 그림에 어찌 그늘이 있을 수 있겠는가.

  장욱진은 그림에 그림자 표현을 좋아하지 않았다. 화가의 이상향을 표현했기에 명암이 필요 없다. 비록 작은 크기이지만 장욱진 마을의 사람과 자연은 평등하고 자유롭다. 얼마 전 나는 경기 용인 포은아트갤러리에서 장욱진 특별전을 보았다. 그리고 화가가 말년에 왕성하게 작업했던 용인 마북의 장욱진 고택에서 그린 선화(禪畵) 같은 작품을 보았다. 일필휘지로 핵심만 묘사한 주옥같은 작품이었다. 장욱진의 풍경에는 그림자가 없다. 그림자 없는 세상, 술 마시고 그림 그린 죄밖에 없는 화가가 이룩한 이상향이다.
                                                 <참고문헌>
  1. 윤범모, "그림자 없는 평등 세상, 장욱진의 이상향", 동아일보, 2022.8.23일자. A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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