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파묘> 스틸 이미지 ⓒ ㈜쇼박스
영화 <파묘>는 일제가 박아둔 쇠말뚝 자리에 일본 요괴인 오니가 살고 있고, 그런 줄도 모르고 그 자리에 친일파 조상을 묻은 후손들의 비극을 다룬다.
사무라이 투구를 입은 그 오니는 자신이 봉건제후인 다이묘였다며, 자기는 원래 남산신궁으로 갈 몸이었는데 엉뚱하게 이곳에 있게 됐다고 불평한다. 이 오니가 있는 곳에 '대표적 친일파'인 자기 조상을 묻은 일로 인해 박지용(김재철 분)의 집안은 아기가 생명의 위험을 겪는 등의 불행을 겪는다.
신녀 이화림(김고은 분), 지관 김상덕(최민식 분), 장의사 고영근(유해진 분), 법사 윤봉길(이도현 분)은 쇠말뚝이 박힌 줄도 모르고 박지용 아들의 병을 고쳐주겠다며 굿과 파묘를 진행한다. 그랬다가 죽을 고비를 겪는 것은 물론이고 예측불허의 상황들로 고생한다.
'쇠말뚝'의 원래 의도
▲ 전남 해남군 황산면 옥매산에서 일제가 민족정기를 끊고자 박은 것으로 보이는 쇠말뚝을 뽑기 위해 말뚝에 천을 묶고 있다. 2012.8.15. ⓒ 연합뉴스
일제는 전국 곳곳에 쇠말뚝을 박았다. '풍수학적으로 한국 땅의 기운을 꺾을 목적'이라고 표방하면서 그렇게 한 것은 당연히 아니다. 1910년부터 시작된 토지조사사업이 그 명분이었다. 삼각 측량을 위한 삼각점으로 쓰겠다며 그것을 박았다.
삼각 측량은 예컨대, 정면에 있는 나무의 높이를 직접 재지 않고, 자기 발끝(제1점)과 나무 밑동(제2점)까지의 거리, 자기 발끝과 나무 꼭대기(제3점)까지의 각도를 토대로 나무 높이를 재는 것이다. 이런 측량에 쓰이는 표식이라고 해서 삼각점으로 불렸다.
일본이 쇠말뚝을 박은 것은 단순히 토지 조사만 하고 끝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한국인들의 땅을 빼앗는 게 실제 목적이었다. 풍수학적인 목적보다 훨씬 위험한 목적으로 쇠말뚝을 박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한국인들의 저항에 직면했다. 저항 방식 중 하나는 쇠말뚝을 뽑아내는 것이었다. 토지조사사업 중인 1914년 6월 17~21일의 헌병대 회의를 토대로 작성된 '삼각점표 및 표석의 보관에 관한 건'이라는 문서에서 이런 분위기를 확인할 수 있다.
2006년에 한국 학회지인 <측량과 지적> 제3호에 실린 운노 후쿠쥬 메이지대학 교수의 '한국 측도사업과 조선 민중의 저항'에 인용된 이 문서에는 "근래 삼각점 점표와 표석을 훼손하는 자가 격증하였다"는 문구가 있다. 이 문건은 "미신에 의한 인위적 훼손"도 적지 않다고 말한다. 풍수적인 이유 때문에 쇠말뚝을 뽑는 한국인도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한국인들이 명당이라고 생각하는 땅에 쇠말뚝이 박히는 사례가 많았음을 의미한다. 토지를 측량해 땅을 빼앗을 목적과 더불어, 풍수학적으로 한국을 억누를 의도도 있다고 인식됐기에 쇠말뚝에 대한 저항이 일어났다고 볼 수밖에 없다.
한국의 지명을 바꾼 일제의 속내
▲ 청와대 인근에서 보이는 인왕산의 모습. ⓒ 이희훈
일본은 지면에만 쇠말뚝을 박은 게 아니었다. 땅과 관련된 한국인들의 정신세계에도 그것을 박았다. 한국의 지명을 바꿔 일본의 혼을 불어넣는 방법이 그중 하나다.
경복궁 서쪽에 인왕산이 있다. 무학대사가 조선왕조의 주산(主山)으로 삼으려 했다가 정도전의 반대로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산은 음력으로 세종 15년 7월 9일 자(양력 1433.7.25) <세종실록> 등에는 '임금 왕'이 들어간 인왕산(仁王山)으로 표기돼 있다. 국권침탈 6개월 전에 발행된 1910년 2월 19일 자 <대한매일신보>에도 마찬가지다. 이랬던 것이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1912년 3월 7일 자 <매일신보>에는 인왕(旺)산으로 나타난다. '왕성할 왕'으로 바뀐 것이다.
경기도 연천군 군남면 왕림리(王臨里)도 일제 때 왕림(旺林)리로 개칭됐다. 경기도 의왕시(義王市)도 이 시기에는 의왕(儀旺)으로 불렸다. 경기도 포천시의 왕방산(王方山)도 왕(旺)방산으로 바뀌었다.
왕(旺)은 뜻 자체는 좋지만, 일(日)과 왕(王)으로 구성됐다는 점에서 정치적 쓰임이 있는 글자다. 왕방산이 포함된 포천·동두천·연천 지역 신문인 2012년 3월 23일 자 <경기북부타임즈>에 실린 '본래의 지명을 되찾아 민족정기를 바로잡자'라는 사설은 이 글자와 관련해 "일왕을 연상하게 하는 것으로 이는 민족정기를 훼손하고 국가의 자존심을 짓밟은 일제시대의 잔재"라고 분개했다.
백제 도읍인 한성이란 지명에는 소서노와 온조를 비롯한 백제 건국 주역들의 정신이 묻어 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고대 한국인들이 사용한 한(韓)은 유목제국의 '칸'이나 한(汗)처럼 군주의 칭호였다고 말한다. 한성이 '한의 도읍', '칸의 도읍'이었다는 설명이다. 이처럼 웅대한 의미를 담은 한성이란 명칭도 일제 때는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일제가 한국의 혼과 역사가 묻은 지명들을 바꾼 것은 정신적 의미의 쇠말뚝을 박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것이 한국인들의 기를 꺾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은 1930년 2월에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작성한 비밀 문건인 '전라남도 광주에서의 내선(內鮮)인 학생투쟁 사건의 진상과 조선 내 학교들에 미친 영향'에서도 느낄 수 있다.
이른바 내지인과 조선인 학생의 싸움에서 발단돼 전국으로 확산된 광주학생운동에 관한 이 문건을 분석한 정근하 조선대 연구교수의 논문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조선 폄하: 학무국의 극비 보고서를 중심으로'(2014년 <한국동북아논총> 제73호)는 이런 설명을 한다.
"조선총독부와 조선총독부 학무국은 전라남도 광주를 대표하는 무등산(無等山)을 '머리가 없는 산: 무두산(無頭山)'으로 지명을 날조하여 이 지역에서는 우두머리가 나오지 못하도록 문자적인 대못을 박았고,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모체였던 학생조직 성진회(醒進會)는 '비린내가 퍼져나가는 모임: 성진회(腥進會)'로 표기하는 등 새로운 형태의 풍수 침략을 감행하였다."
각성해서 전진하겠다고 붙인 학생 조직의 명칭을 위와 같이 총독부가 임의로 바꿔 부르는 일도 있었다. 무등산은 무두산으로 바꿔 불렀다. 광주 청년·학생들의 기를 꺾을 목적으로 이런 명칭까지 생각해냈던 것이다. 하지만 일제는 이 문서를 공개하지 못했다. 만약 공개됐다면 1980년 5월이 아니라 1930년 5월이 역사에 더 강하게 기억됐을 수도 있다.
정신적 의미의 '파묘'가 필요한 때
▲ 지난해 11월 16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차 미국을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이 샌프란시스코 한 호텔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반갑게 인사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일제는 쇠말뚝을 박거나 지명을 바꾸는 것뿐 아니라 전국 곳곳의 신사들을 통해서도 한국의 기운을 억누르려 했다. 이를 위해 <파묘>의 오니보다 훨씬 강력하다고 생각되는 신들을 조선 땅에 끌어들였다.
광복절 특집 기사인 1970년 8월 19일 자 <조선일보> 3면 좌상단에 설명됐듯이, 일제 패망 다음날인 1945년 8월 16일에 총독부는 '조선신궁을 비롯한 전국 신궁·신사에서 승신식을 거행한다'는 방안을 채택했다. 일본 신을 하늘로 올려보내는 의식을 거행하기로 했던 것이다.
이는 한국인들이 해방의 열기를 활용해 신궁·신사를 공격할 수 있으므로 신들부터 미리 철수시켜야 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이때까지 일제가 자국의 신들을 불러들여 한국을 억누른다는 발상을 갖고 식민통치를 진행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파묘>의 일본 오니는 자기는 남산신궁으로 갈 몸이었는데 속아서 이곳에 오게 됐다고 푸념했다. 총독부의 위 조치를 듣지 못해 한국에 홀로 잔존한 패잔병 신(神)이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이런 패잔병들이 아직도 한국 곳곳에 남아 있다. 이들은 패잔병답지 않게 지배자의 모습으로 군림하고 있다. 해방 80년이 다 되도록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그 영향 하에 억눌려 지내는 것은 대한민국이 아직도 그 지배를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파묘>는 신녀·지관·장의사·법사가 합력해 일본 신에 맞서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싸움은 이들만 할 게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가 해야 할 일이다. 일제 신령들을 파내는 정신적 의미의 '파묘'는 윤석열 정부와 기시다 후미오 내각이 조장한 지금의 위기에 대처하는 데도 긴요하다. <참고문헌> 1. 김종성, "영화 파묘보다 더 기겁할만한 일제의 만행들", 오마이뉴스, 2024.3.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