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정월 말이었다. 이종찬 광복회 회장과 몇 사람이 자리를 같이하게 되었다. 바로 그날 아침 신문에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 관한 기사가 크게 실려있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지시와 김명수 전 대법원장의 합의에 따라 양승태 전 원장과 몇몇 판사의 사법 비리를 여러 해를 두고 조사했으나 결백했다는 보도였다. 국민 대부분이 무슨 의도와 목적으로 그런 일을 감행했고, 국력의 낭비는 어떠했는가를 묻게 했다. 그런 잘못을 저지르고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느냐는 비판이 가해지기도 했다.
납득 안 됐던 친일파 명단 추가 공개
문재인 정부 때만이 아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임기 중에도 그랬다. 그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친일파 인사들의 명단을 추가로 조사해 발표한 사건이다. 해방 반세기가 지났으면 더 거론하지 않아도 될 일인데…. 이미 발표되었던 친일파 인사들 가운데도 거명되지 않아도 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당시의 상황이나 처지를 배려해서라도 다시 추가 명단을 밝힐 이유와 필요성이 있는가 싶었다. 일제 강점기라는 슬픈 역사를 안고 살아오는 동안에 있었던 작은 잘못에 돌을 던지는 일은 정치지도자가 할 일이 아니다. 국민통합과 미래를 위해서라도.
정치에 관심이 있고 배후를 잘 아는 사람들은 김성수나 백낙준 같은 저명인사를 친일파로 추가함으로, 친일파 배척을 제일 목표로 출범한 북한 정권의 정당성을 간접적으로 인정하려는 목적이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그 명단 저작물의 독자가 많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구매를 요청하는 사람과 기관이 없어 공공기관에 무료로 기증했다고 한다. 안 해도 되는 일을 정치적 목적을 위해 감행했고, 그 결과가 정권에 도움이 되었다면 앞으로도 비슷한 사례가 계속될 것이다.
우연한 기회에 그 명단 작성에 참여했던 한 교수를 만났다. 김성수 건에 대해서는 상반되는 견해도 있었다는 얘기였다. 나는 “인촌 선생이 친일파냐, 아니냐는 묻고 싶지 않다. 일제 강점기에 김성수 같은 지도자가 국내에 없었다면 우리는 독립 국가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인정한다”라고 했다.
공식 행사 참석했다고 친일파 취급
내가 마음 아프게 체험했던 사실 하나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서울대학교 김성태 음대 교수가 100세 탄신을 축하받는 모임이 있었다. 후배와 제자 음악인들이 축하 잔치에 참석했다. 신문사 기자들도 찾아왔다. 그때 김 교수가 기자들이 있는 곳까지 찾아가 “나 친일파 명단에서 빠졌어”라고 했다. 앞뒤 실정을 잘 모르는 기자가 무슨 말씀이냐고 물었다. “내가 일제 강점기 때 친일파였다고 해서 고민을 하였는데, 항일사건에 가담했던 사실이 기록에 있어 갖다 보여 주었더니 친일파 명단에서 빼 주었어”라는 설명이었다.
나는 그 기사를 읽으면서 마음이 아팠다. 김 교수는 나보다 10여 년 선배이고 일찍부터 음악계에 진출했으니까 몇 가지 공식 행사에 참여했을 것이다. 왜 일제에 협력했느냐는 문책이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그 당시를 산 사람은 그렇게 생각지 않았다. 오히려 사회 각 분야에서 일본인보다 앞서면 그것이 애국자라고 인정받던 때였다. 김 교수가 친일에 반대되는 일도 했다는 기록을 제시하고 명단에서 빠졌다는 얘기다.
누가 무슨 목적으로 친일파 명단을 확장했는지 묻고 싶다. 다른 사람의 인격과 인생 가치 평가를 우리는 할 수 있다는 권리를 누가 주었는가. 그러고도 세상이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있겠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일을 예사로이 저질렀기 때문에 일본은 국가를 범죄자로 전락시켰고, 공산주의 정권은 인류 역사의 규탄을 받고 있다.
눈물 머금고 신사 참배했던 교장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일본 총독부는 선교사 조지 매큔(한국명 윤산온·尹山溫) 교장이 신사 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파면했다. 후임인 정두현 교장이 신사 참배를 수용하면서 폐교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나는 그때 우리 학생들을 한국인 교장에게 넘겨주고 떠나던 윤산온 교장의 모습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전교생에게 자신의 저서를 남겨주었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어도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지켜 줄 것이라는 유언과 같은 내용이다. 그러면서 ‘너희들은 무엇이나 할 수 있다’, ‘나라 독립도, 자랑스러운 민족의 장래도 개척할 수 있다’는 뜻으로 불끈 쥔 오른쪽 주먹을 일곱 번이나 하늘로 쳐들면서 “Do!, Do!”라는 고함을 지르고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 곁을 떠났다.
나도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학교를 자퇴했다가 갈 곳이 없어 일 년 후에 복교했다. 학기 초에 우리는 참배를 위해 평양 신궁으로 끌려갔다. 대열 정리가 끝나고 체육선생의 호령으로 허리를 90도로 숙이는 ‘최경례(最敬禮)’를 했다. 퇴장의 순서는 교장, 선생들, 학생들이 그 뒤를 따랐다. 나는 키가 작은 편이어서 앞자리에서 교장선생의 모습을 보았다. 주름 잡힌 얼굴에 두 줄기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학생들 앞에서 손수건으로 닦을 수도 없었던 것 같다. 나도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학기 초마다 있는 행사였다. 철없는 우리에게는 너무 가혹한 운명이었다.
일 년 후에 숭실학교는 폐교되고 학생들은 일본학교 선생들에게 교육받아야 했다. 정 교장은 숭실전문학교 교수이면서 교회 장로였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져 주셨다. 우리는 그렇게 눈물겨운 중학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런 아픈 마음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가능케 했다고 생각한다.
일본의 아베 정권과 문재인 정부, 이재명 대표를 앞세운 민주당처럼 세계사의 시계를 과거로 되돌리는 잘못은 범하지 말아야 한다. 악을 악으로 보복하는 역사는 패망을 초래한다. 선으로 악을 극복하는 나라가 희망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1. 김형석, "누가 자꾸 역사의 시계를 과거로 되돌리나", 중앙일보, 2024.2.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