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대한민국 국조인 단군 왕검 탄강 제4392주년을 경축하며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문학평론가) 大山 辛相龜
지난 2023년 6월 19일(음력 5월 2일)은 우리 조국 대한민국의 국조(國祖)인 단군(檀君) 왕검(王儉) 탄강 제4392주년이 되는 뜻깊은 날일이었지만, 신문과 방송에서 아무런 언급이 없어, 조용히 넘어갔다.
단군(檀君, Tangun)은 몽골어의 ‘탱그리(Tengri)’, 터어키어의 ‘탱그리(Tangri)’에서 파생된 말로, 자연인의 이름이 아니라 종교적, 정치적 최고 지도자의 직함이다. 지금으로부터 4349년 전인 1세 단군 ‘왕검(王儉)’으로부터 47세 단군 ‘고열가(高列加)’까지 2096년간을 이어온 옛 조선의 통치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달력을 보면 부처님 오신 날은 있어도 국조 단군 왕검이 탄강한 날은 표기되어 있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초대 단군 왕검은 생몰연대가 미상이지만, 기원전 2333년에 우리 역사상 최초의 나라인 고조선(古朝鮮)을 세우고 임금이 되어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를 건국이념으로 삼아 통치했다. 그리하여 단군 왕검은 예부터 사서 중에 하나인『삼국유사』,『제왕운기』,『세종실록』,『동국통감 외기』 등에서 한민족의 시조(始祖)로 받들어지고 있다. 대종교 등의 종교에서는 신앙의 대상이기도 한다. 오늘날 대한민국과 북한에서도 그를 한민족의 조상으로 인정하며 역사서에도 등장하고 있다. 그와 별개로 오늘날 단군의 실존 여부에 대해 여러 논쟁이 있는데, 주류 학계에서는 단군을 신화상의 인물로 간주하거나 고조선의 통치자를 일컫는 역사적 칭호로 보고 있다. 그런데 북한과 기타 비주류 학계에서는 단군이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로 보고 있다.
단군은 고려 말, 대몽항쟁 시기에 주목받기 시작하여 조선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국조(國祖)로 추앙되었다. 세종 때에는 평양에 단군과 동명왕을 모신 사당을 지어 국가적으로 제사를 올렸으며 환인, 환웅, 단군의 신주를 모신 삼성당(三聖堂) 또는 삼성사가 황해도 문화현 구월산에 만들어지기도 했다.
구한말에는 외세의 각축에 대항하는 한민족의 구심점으로 대폭 강조되어 단군교(檀君敎)와 같은 종교로까지 발전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민족주의의 구심점으로 부각된 단군은 일제강점기 동안 독립운동의 정신적 토대로 큰 역할을 하였다.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에서 태어난 민족사학자인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6)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말했다.
일제는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이론적 기반인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등에 근거하여 동화정책을 펴다가 1930년대부터는 근대화와 문명이라는 미명 하에 민족말살정책(民族抹殺政策)을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민족말살주의는 조선적인 모든 것의 파괴와 해체를 뜻하며, 민족적 문화적 동질성과 정체성, 혈연과 지연의 공동체적 통일성, 조선 민족의 생물학적 특질까지도 파괴시키는 것이었다. 특히 일제는 한민족의 기원과 그 활동이 가장 용감하고 강렬했던 상고사를 크게 삭탈(削奪), 제거(除去), 왜곡(歪曲)시켜 놓음이 가장 효과적인 것이라 판단하여 조선사편수회를 중심으로 조선사 편찬에 박차를 가했다. 한편 조선사학회를 통하여 일반에게 식민사학의 전파를 담당케 하여 한국인의 역사와 문화를 저열화(低劣化)시켜 나갔다.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하고 대한제국의 초빙으로 대한제국 학부 서기관으로 근무하고, 경술국치 이후에는 조선총독부 편집위원으로 근무하면서 조선사학회를 조직하여 한국사를 연구하던 경성제국대학의 오다 세이고(小田省吾, 1871-1953) 교수는『문교의 조선』에 단군(檀君)을 부인하는 논문을 싣고, 또『조선불교』제23호에「단군전설에 대해」라는 글을 연재하면서 단군은 고려가 원(元)에 복속되면서 처음 전설로 출현한 것으로 이는 당시에 날조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1903년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과 교토제국대학의 겸임교수를 역임하면서 1925년부터 1932년까지 조선 총독부 조선사 편수회의 회원으로 활약한 이마니시 류(今西龍, 1875-1932)는 식민사학자인 두계(斗溪) 이병도(1896-1989)의 스승으로「단군고(檀君考)」(1929)에서 ‘단군은 부루(夫婁)의 아들이며 주몽신화의 변형이 단군신화로 고려 인종(1122)부터 고종(1259) 사이에 만들어졌다고 주장하고, 단군숭배사상이 마치 일본의 도움으로 인해 만들어진 풍토처럼 기만하면서 5천 년 속의 민족사를 비하했다.
일본 학자들은 단군, 기자조선을 하나의 설화로 취급하되 단군은 승인하지 않고 평양에 전하는 기자궁(箕子宮), 기자정전(箕子井田), 기자묘(箕子墓) 등을 들어 설화로서도 기자조선(箕子朝鮮)만을 인정하여 굳이 기자의 자손이 조선을 지배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개국시조로 넣으려 했다.
이에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1890-1957)과 간정(侃亭) 이능화(李能和, 1869- 1943)가 조선사편수회 위원회에서 반발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해 일본 학자들은 최남선(崔南善)과 이능화(李能和)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단군조선을 제거함으로써 한국 역사의 첫머리를 한사군(漢四郡)으로부터 시작한 것으로 꾸며 애당초부터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종속적이라는 이론을 내세워 식민지 지배의 숙명론을 확립하고자 했다.
이제는 강단사학자들이 일제의 식민사학에서 벗어나 민족사학자로서 일제와 중국이 왜곡한 우리의 역사를 바로 잡아 우리 민족사를 올바로 새로 정립해야 할 것이다.
선교유지재단 (구 선불교, 불광도원)에서는 해마다 단군 왕검 탄강일을 맞이하여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4391돌을 맞은 2023년에는 선교의 천손님들과 MOU 단체인 선도문화진흥회 회원들이 주말에 서울, 강원, 대전, 대구, 부산 등 전국 각지에서 기념떡과 부채 등을 나누며 그 의미를 기렸다고 한다.
<필자 신상구 국학박사 약력>
.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출생
.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 경제학사, 충남대 교육대학원 사회교육학 석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과 국학박사 2호
. 향토사학자, 시인, 문학평론가, 민속학자, 칼럼니스트
. 통일문학상, 전국 향토문화 논문공모 대상(국무총리상) 수상
. 학술논문「태안지역 무속인들의 종이 오리기 공예에 대한 일고찰」등 123편.
. 대표 저서 :『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도서출판 근화,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