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27일 오후 2시57분, 천안 광덕사 일주문 앞에 섰습니다.
오늘의 도전과제는 평양감사때 운초 김부용을 소실로 들여 15년을 시벗, 술벗 삼았던 김이양 대감 묘 찾기.
도전자는 김다원(김희한) 천안문인협회 회장입니다. '광덕사 일주문'은 광덕산을 등산하는 사람들에게 주요 이정표입니다. "우리 광덕산 일주문에서 만날까?" "일주문에서 기다려" 등등.
김이양 대감 묘로 향하는 길. 광덕사 경내를 거쳐야 합니다. '극락교(極樂橋)'를 건너게 되는군요. 불자들에겐 이 다리가 보배입니다. 아, 계룡산을 타려면 거기도 극락교를 거쳐야 하네요. 아무래도 사찰의 특성일 수 있겠군요. 광덕사는 600년대에 창건했다니 대략 1400년이 넘는 '천년고찰'입니다. 물론 당시 건축사찰이 그대로 있겠습니까만, 그 역사에 그 흔적들이 아득하기만 합니다.
광덕사를 더욱 역사깊은 사찰로 만들어주는 것이 '호두나무'입니다. 고려 류청신이 원나라에서 가져온 호두묘목이 자란 것이라는데요, 당시는 700년 전이고 저 호두나무는 400년 된 거라 300년의 시차가 발생합니다.
일주문에서 설렁설렁 왔는데도 25분밖에 안 걸렸습니다. 물론 살짝 가파른 부분도 있었지만요.
1795년(정조 19) 생원으로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1812년(순조 12) 함경도관찰사로 있었다. 1815년 예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지내고 이듬해 호조판서가 되어 토지측량의 실시와 세제 및 군제의 개혁, 화폐제도의 개선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819년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이 되었고, 이듬해 판의금부사를 거쳐 좌참찬에 올랐다. 1844년(헌종 10)에는 만 90세가 되어 궤장(几杖)이 하사되었으며, 그 이듬해 봉조하(奉朝賀)로 있다가 죽었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추증되었다.
김이양은 1826년부터 관직에 얽매이지 않고 강호를 유람하였고, 그러다 운초 김부용을 만났다. 1831년 소실로 들여 1845년 죽기까지 함께 했다.
술 따르고 글 써주는 그 사람 누구더냐
내 집안에 들어와서 시벗 술벗 되었다네
담백하게 술 든 모습 여염보다 더 어질고
시를 아는 그 지식은 내가 넉넉히 기댈만하네
...
그 길을 천안문인협회가 이어주려 계획하고 있답니다.
'심장이 이리 뛰어본 적이 언제인지.'
대감 묘를 출발한지 벌써 25분이 지나고 있습니다. 거친 비탈을 오르고 올라도 길이 보이질 않습니다.
이 나무가 길이라면 저 끝이 천국이고, 이곳이 지옥입니다. 살아서 나갈 수 있을까조차 염려되는군요... (엄살~^^)
그러고도 한참을 고생하며 길도 없는 오른쪽 비탈길을 억지로 꺾어 내려가 등산로와 맞닿아 발을 디뎠답니다.
김이양 대감 묘를 떠난지 52분. 다리가 조금은 후들거려도 '고생 끝' 길이 나타났으니 괜한 웃음만 터집니다.
돌이켜 보면 참으로 즐거운 산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운초묘에서 대감묘로 잇는 길
김이양 대감의 첩실로 살다 대감 묘 인근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광덕사에서 800미터쯤 떨어진 곳에 운초 김부용의 묘가 있습니다. 천안문인협회는 묘를 발견한 1974년 이후 매년 추모제를 지내오다 올해 4월29일 '2023 운초문학제'라는 이름으로 그 격을 키워 추모하게 됐습니다.
김다원 협회장은 기분이 좋습니다.
"조금만 손을 대면 충분히 '정인의 길'을 낼 수 있을 것 같아요. 50년 가까운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애틋한 정을 주고받은 운초와 김이양 대감의 묘를 잇는 길을요."
그 길 천안시민들은 언제 걸어볼까요?~
[출처] 김다원 천안문협회장의 '김이양 대감묘 찾기'|작성자 푸솔 e충남시사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