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청주고 출신 故 박맹호 민음사 회장의 출판 50년 비화 글쓴이 신상구 날짜 2024.05.07 04:40


             [삶과 추억] 청주고 출신 故 박맹호 민음사 회장의 출판 50년 비화 

                  “책을 사랑하다, 책을 만들다, 그리고... 사라지다” 


단 한 차례도 멈추지 않고 책의 전위를 향해 움직였던 모험가…
수많은 작가·시인·지성인의 지성적·정서적·경제적 후원자로 일생 바쳐

“예술은 천재가 하는 것이고, 나 같은 사람은 그러한 천재를 북돋는 일이나 잘하면 다행이지.” 생전에 그는 조금 씁쓸한 어조로 말하곤 했다. 그러나 한국출판을 위해서라면 그것은 무척 다행한 일이었다. 그는 ‘천재를 북돋우는 일’에서 진정한 천재였던 것이다. 그는 “좋은 작가와 작품을 발굴했을 때의 희열이 직접 작품을 쓸 때보다 훨씬 컸다”고 했다. 자신의 일을 천직으로 알았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일 것이다. 그가 바로 박맹호였다.


▎지난 1월 22일 타계한 박맹호 민음사 회장은 한국 출판의 역사를 고쳐 쓴 오디세우스로 평가된다.
한국출판의 하늘에 떠 있던 별이 하나 떨어졌다. 지난 1월 22일, 민음사 박맹호 회장이 세상을 떴다. 1934년 충북 보은군의 비룡소 곁에서 태어났으니, 향년 여든네 살이다. 평소에 박 회장이 묘비명으로 세워둔 말처럼, 그는 오로지 “책을 사랑하다, 책을 만들다, 그리고 사라졌다.”

1966년 5월 19일, 서울 청진동 옥탑방에서 창업한 이래, 박 회장은 평생 책의 바다를 떠돌면서 빛나는 모험을 거듭해온 출판의 오디세우스였다. 근대를 향한 눈부신 성장기에 들어선 한국사회에서 그때까지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련의 대담한 기획을 통해 그는 한국출판의 역사를 고쳐 쓰고, 지적 단층을 곳곳에 이룩함으로써 지식사회의 풍경을 바꾸었다.

“출판은 영원한 벤처다.”

이 말이 박맹호의 출판정신이었다. 1966년 창립한 후 첫 책으로 <요가>를 펴낸 이래 박 회장은 단 한 차례도 멈추지 않고 책의 전위를 향해 움직였다. 그가 기획하고 출판한 민음사의 책들은 근대화와 함께 시대의 주인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시민들의 지적 토대를 이룩해 주었다. 한국경제의 발전과정에 따라 새로운 형태의 지식과 정보가 필요할 때마다, 높아진 생활수준에 걸맞게 문화적 세련에 대한 갈증이 부풀어 오를 때마다 항상 민음사의 책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 ‘세계시인선’ ‘오늘의시인총서’ ‘오늘의작가총서’ ‘이데아총서’ ‘대우학술총서’ ‘김수영문학상’ ‘오늘의작가상’ 등 당신이 만들어낸 수많은 책은 그대로 한국의 교양을 구축했고, 우리의 정신에 질적 깊이를 마련해 주었다.

또한 박맹호는 수많은 작가와 시인과 지성인의 지성적·정서적·경제적 패트런이었다. 이어령과 남재희와 고은은 평생의 외우(畏友)였다. 김수영·김춘수·김종삼·최승호·장정일 등의 시인과, 이제하·이문열·한수산·박영한·전상국·강석경·조성기·하일지 등의 작가와, 김우창·유종호·최창조·김용옥·이강숙 등의 학자가 그를 디딤돌로 삼고 세상에 나아가 도약해 휘황한 문명을 떨쳤다.

신인이 첫 책을 출판하기 어려운 시절 박맹호는 과감하게 사재를 털어 출판의 문호를 개방했고, 어려움에 처한 재능 있는 문인들에게 계약금을 건네 창작의 물꼬를 트곤 했다. 계간 <세계의 문학>을 통해 푸코·들뢰즈·라캉 등 전 세계의 첨단 지적 흐름을 과감히 소개하고, 장편 전재라는 기획을 통해 밀란 쿤데라·V. S. 나이폴 등 당시로는 이름이 낯설었던 신진 대가들의 작품을 접할 기회를 주었다.

민음사(民音社)라는 출판사 이름은 ‘백성의 소리를 담는다’는 뜻이다. 젊은 시절 그가 탐독했던 <수호지>의 영향을 받아 지은 이름이다.

“동양에서 악부(樂府)가 백성들의 다양한 노래를 채록하며 시의 양식으로 승화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세상의 낮은 목소리를 담되 우아하고 품위 있게 하자는 뜻으로 지은 겁니다.”

자유당 정권을 풍자한 작품을 써 신춘문예 당선이 취소될 정도로 반항정신이 있었던 인물답다. 나중에 엄혹한 군사정권 시절 수요회를 결성해 출판운동을 주도하고, 전두환 정권을 향해 출판의 자유를 요구하는 ‘17인 선언’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것도 ‘백성의 소리’를 담고자 했던 소명감에서 비롯됐다.

“우아하고 품위 있게”라는 문화적 세련에 대한 갈망은 박맹호 출판의 또 다른 동력을 이룬다. 그는 말했다.

“서점에 가면 허접스러운 책 모양새가 거슬렸어. 언젠가는 이를 혁신하고 한국의 책을 명품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싶었지.”

민음사의 책 장정은 항상 독자들에게 신선함을 주었고, 출판계의 모델이 되었다. 작가 김승옥이 참여했던 ‘세계시인선’ 초판본 장정은 독자들 사이에서 에로스적 열정을 불러온 것으로 유명하다. 정병규를 일본과 프랑스에 유학 보내 편집자의 길에서 디자이너의 길로 인도하고, 꾸준히 일을 맡겨 우리나라 북 디자인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려 책이 어떤 예술품으로까지 인식될 수 있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서점 공간 확대운동을 주도


▎1. 김수영 전집(사진)은 민음사의 ‘오늘의 시인총서’ 첫 번째 기획으로 출간된 <거대한 뿌리>가 모태가 되어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다. / 2. 사1960년대 후반 서울 청진동 민음사 사무실에서 생각에 잠긴 박맹호 회장. 소설가의 꿈이 좌절되자 출판인의 길에 들어섰다. / 3. 1970년대 일본에서 열린 한 국제회의에 참석한 박맹호 회장.(앞에서 두 번째)
출판의 산업화를 위해 평생을 바친 것도 박맹호의 업적이다. 독자를 수동적으로 만드는 외판 전집 중심의 출판에서, 작가와 독자가 창조적 개성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단행본 중심의 출판문화를 산업적으로 실현했다. 해마다 늘어나는 단행본 출판 종수에 비해 고작 6평 내외 영세서점의 난립으로 진열공간이 부족했던 1980년대. 당시 그는 서점공간 확대운동을 주도해 중·대형 서점의 등장을 유도했다. 독자의 편리를 도모하고 출판사와 서점이 동시에 성장하는 구조를 실현했다.

2000년대에는 주요 신문사마다 설득하러 다니면서 광고를 주고 북 섹션을 두도록 했다. 문학과 인문사회 분야 외에 어린이책·과학책·경영서 등 다양한 책이 독자의 눈에 띄도록 도왔다. 대한출판문화협회 회장을 지낼 때는 ‘거실을 서재로’ 같은 과감한 독서운동을 제안하고, 프랑크푸르트도서전 주빈국 행사를 무사히 치를 수 있도록 애썼다.

“인간은 책으로 이뤄진다. 책은 인간의 유전자에 해당하므로, 어떤 경우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어느 시대든 반 발짝만 앞서나가면서 시대를 선도하는 좋은 책을 출판하면 독자들은 찾아오게 마련이다.”

박맹호와 함께 민음사는 청진동의 작은 회사에서 시작해 국내 최대 단행본 출판사로 성장했다. 지금까지 민음사가 출판한 책은 (비룡소·사이언스북스·황금가지 등 자회사를 합치면) 거의 1만 종에 가깝다. 그 자체로도 대단한 업적이지만, 무려 4000종에 이르는 책은 아직도 살아 움직이면서 독자들 손을 탄다. 빠르게 새로운 정보가 쏟아지면서 지식의 수명이 극단적으로 짧아져가는 요즈음 세태를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다.

박맹호는 영원한 출판청년이었다. 자신의 성취에 만족하지 않고 시대의 가장 민감한 지점으로 서슴없이 옮겨가곤 했다. 1990년대 들어 거대담론 중심의 인문·사회과학 시대는 저물었다. 늘어난 여가로 인해 일상이 소중해지면서 문화다양성이 폭발하고,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에 따라 세계화의 파도가 몰려왔다. 박맹호는 변화를 기민하게 감지한 후 편집부에 ‘세계문학전집’을 기획하도록 했다. 여행 자유화로 인해 낯선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사회에 넘쳐나고, 인터넷이 도입돼 전 세계 정보를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게 된 직후였다. 한국과 세계를 갈라놓던 장벽들이 사라지면서 외국어에 대한 갈증이 심해지고, 세계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교양을 갖추는 것이 시급할 때였다.

젊은 날 스스로 작가를 꿈꾸었던 박 회장은 문학 출판에 가장 심혈을 기울였다. 이 기획도 오래전부터 꿈꾸던 것이었다. 그러나 문학 출판에서 성공을 거둔 이후에도 과학·어린이 책·장르소설 등 새로운 영토로 출항하는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탐험하는 책의 분야마다 새롭게 기름진 영토를 개척했다. 어린이책의 비룡소, 장르픽션의 황금가지, 과학책의 사이언스북스 등이 각 분야에서 독자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브랜드로 자란 것도 그의 그늘 아래에서만 가능했다.

박맹호 회장이 출판을 하겠다고 본격적으로 결심한 것은 1960년대 초다. 대학 시절, 소설을 쓰는 즐거움과 동시에 출판을 해보겠다는 은밀한 열망을 품었는데, 소설가의 꿈이 좌절되자 출판업으로 그 관심이 옮겨간 것이다.

“예술은 천재가 하는 것이고, 나 같은 사람은 그러한 천재를 북돋는 일이나 잘하면 다행이지.”

생전에 그는 조금 씁쓸한 어조로 말하곤 했다. 그러나 한국 출판을 위해서라면 그것은 무척 다행한 일이었다. 박맹호는 ‘천재를 북돋우는 일’에서 진정한 천재였던 것이다. 그는 “좋은 작가와 작품을 발굴했을 때의 희열”이 “직접 작품을 쓸 때보다 훨씬 컸다”고 했는데, 아마도 자신의 일에서 천직을 발견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일 것이다.

첫 출판 <요가>가 초대형 베스트셀러로


▎민음사 <세계 시인선>은 일본어 중역 관행을 탈피해 제대로 번역한 시집의 효시로 기록된다.
민음사의 첫 번째 책은 S. 에스디안과 요기 뷔르다스가 지은 <요가―이 신비한 건강의 비법>(1966)이다. 소설가를 지망한 문학청년이었고, 중학교 시절 이래의 독서 이력이 거의 문학에 치우쳤던 사람치고는 의외의 일로 느껴진다. 오키 마사히로(沖正弘) 번역으로 일본에서 나온 책을 중역해 출판한 것이다.

이 책의 출판을 제안한 사람은 문청시절 친하게 지냈던 시인 겸 편집자 신동문이다. 탁월한 편집자였던 신동문은 한국출판의 역사에서 빠뜨리지 말아야 할 이름 중 하나다. 을유문화사·정음사·현암사 등과 더불어 해방 후 한국출판을 제대로 세우는 데 앞장선 신구문화사의 편집장을 역임했다. 그 시절 ‘한국시인전집’ ‘세계전후문학작품집’ 등의 대형 기획을 연속으로 성공시키면서 한국전쟁 후 황폐했던 지식 사회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그러한 신동문의 제안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마뜩잖게 여겼을 것이다. 이후 소설가 류주현의 <장미부인> <서유기>, 앙드레 말로의 <반회고록>, 고은의 시집 및 에세이집 등을 연속해서 펴낸 걸 보면 박맹호의 출판지향이 어느 쪽이었는지는 분명하다. 그런데 집에서 스스로 교정을 보아 출판한 <요가>가 무려 1만5000권이 팔려 나가는 초대형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독서인구도 적고 서점도 충분하지 않았던 당시 사정을 고려해볼 때였다. 요즘 같으면 밀리언셀러를 기록했을지도 모른다. 이후 야심차게 마련해 출판했던 문학책들이 실패하는 바람에 빚더미에 올라앉아 좌절했던 것을 돌이켜보면 어떤 아이러니마저 느껴진다.

이 시기에 박맹호와 기쁨과 슬픔을 같이한 사람이 시인 고은이다. 신동문의 소개로 만난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의기투합해 매일 저녁 청계천에 나가 막걸리나 소주를 마셨다. 고은의 소개로 김현을 만났고, 그 친우들인 김주연·김치수·김병익 등 문학과지성사 그룹이 청진동 옥탑을 드나들었다. 4K라고 불리는 이 네 사람이 머리를 모아 <문학과지성>을 편집한 곳도 민음사 사무실이었다. 박맹호는 이 신생 잡지에 광고를 게재해주면서 적극적으로 후원했고, 1972년에는 그들의 공동 평론집인 <현대 한국문학의 이론>을 민음사에서 출간했다. 이 비평서는 문학비평의 시대를 열어젖힌 획기적인 책으로 평가받는다. 1973년에는 김윤식과 김현이 공동으로 저술한 <한국문학사>가 나왔다. 한국 근대문학의 기원을 영·정조 시대까지 과감하게 끌어올린 이 책은 학계에 대단한 충격을 주면서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1970년대 초부터 박맹호는 한국문학 출판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고은과 김현의 도움을 받아 정현종의 시집 <사물의 꿈>, 박상륭의 <박상륭 소설집>, 이청준의 <소문의 벽>, 이제하의 <초식>, 박태순의 <정든 땅 언덕 위> 등을 연속 출판했다. 특히 <초식>은 작품도 작품이지만 장정에서 대단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서양화를 전공한 작가답게 이제하는 지금 보아도 세련된 디자인으로, 문인과 독자에게 아주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 무렵 문학 단행본 시장에서 민음사의 활약이 볼 만했다. 최인훈의 걸작 <광장>을 개정해 재발간함으로써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 있도록 했으며, 고은의 <이중섭>과 <1950년대>를 연이어 펴내 독자들을 감동시켰다. 또한 박맹호는 특별히 독창적이었다. 당시 <서울신문> 기사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민음사의 경우 또 하나의 특징적인 것이 있다면 출판사 쪽의 문학적 선호의 기준이 퍽 뚜렷하게 서 있는 것 같다는 점이다. 즉, 출판사 측에서 뚜렷한 문학관을 가지고 어떤 문학적 유파를 지지하고 있다.”

이때의 문학적 선호란 김동리·조연현 등 윗세대 문학에 대한 일정한 거리두기와 순 한글세대 문학에 대한 적극적 옹호를 말한다.

가로쓰기의 선구, 출판 시스템의 혁명


▎1980년대 문학평론가 김우창 교수(오른쪽), 김치수 교수와 함께 출판 기획 관련 협의를 하고 있는 박맹호 회장.(가운데)
박맹호는 학교에서 일본어로 교육받은 마지막 세대이면서 성인이 되었을 때 외국어를 익혀 서양의 근대를 ‘직접’ 흡수한 첫 세대이기도 하다. 일본어 중역으로 출판을 시작했지만 일본어 번역투를 유발하는 통로를 결국 제거한 후, 서양의 근대를 직접 수용해 세련된 한국어로 표현하는 길에 나서야 하는 것이 이 세대의 운명이었다. 가로쓰기에 대한 박맹호의 자부는 그가 시대의 소명을 의식했음을 보여준다.

가로쓰기는 잡지에선 한창기가 선구자로서 나섰고, 단행본 출판에선 박맹호가 <세계시인선>에서 시도하면서 분위기를 주도했으며, 신문에선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야 <한겨레>에서 비로소 본격적으로 실현됐다. 가로쓰기는 단지 본문 편집 방식의 변화를 뜻하는 게 아니라 한국출판을 지탱하는 시스템의 혁명적 변화를 뜻하는 문화적 사건이다. 이전까지 일본을 통해 세계와 접촉했던 한국출판의 한 시대가, 즉 일본어를 통한 이중번역으로 출판의 질을 담보하던 시대가 종말을 고한 것이다. 해방 이후 지속해서 축적해온 한국사회의 지적 역량이 폭발하면서 방향 전환이 일어나 새로운 세대의 등장이 가속화된 사건이다.

가로쓰기 이후, 세로쓰기 시대의 문학적·사상적 대표자들이 청산돼 대중의 눈 밖으로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이 때문이다. 편집자는 편집으로 말하는 것이니까, 박맹호의 출판이 처음부터 한글로 교육받고 일본어 대신 서양어 하나쯤은 능숙히 구사하는 순 한글세대와 함께한 것은 필연이었던 것이다. 한국문학 창작집을 꾸준히 연습하던 박맹호가 이러한 소명을 본격적으로 드러낸 것이 바로 ‘세계시인선’과 ‘오늘의 시인총서’ 기획이다.

손뼉 소리가 크게 일어나려면 맞장구 칠 사람이 있어야 한다. 당시 박맹호의 곁에는 운 좋게도 또 다른 천재 김현이 있었다. 작품의 세부에서 올라오는 언어의 힘을 발견할 줄 아는 탁월한 감식안과 이를 비평으로 풀어낼 수 있는 섬세한 분석력을 겸비한 이 천재 비평가가 없었다면 어쩌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박맹호가 고은과 친구를 맺고, 고은이 김현과 분신처럼 어울리지 않았다면, ‘시의 시대’가 열리는 데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수도 있다.

박맹호는 ‘일본어 중역’이 아니라 ‘제대로 번역한 시집’을 출판하고 싶다고 김현에게 제안했다. “프랑스나 독일에 다녀온” 주변의 젊은 학자들과 함께 “원본을 함께 실어 놓고 한글 번역을 옆에 나란히 배치”해 신뢰를 높인 시집을 내자는 것이다. 여기에 김현이 그 자리에서 좋다고 찬동하면서, 가로쓰기로 원문과 번역문이 서로 마주보는 형태로 편집된 ‘세계시 인선’이 출간된다. 모두 100권 예정으로 기획된 이 시리즈는 1973년 12월 첫 다섯 권이 출판됐는데, 이백과 두보의 <당시선>, 폴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 릴케의 <검은 고양이>, 프로스트의 <불과 얼음> 등이었다.

세간의 반응은 충격적이었다. 불과 두 해 만에 50권을 돌파할 만큼 독자들의 호응도 아주 좋았다. ‘시의 대중화’ 시대를 개벽했다고 할 만하다. “읽히지 않는 책, 비싼 책, 나눠 갖는 책의 대명사처럼 불려온 시집을 대중화한 점에서 흐뭇한 일”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요, 책임 있는 출판사의 책임 있는 일이라 이제는 안심하고 세계시인선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찬사가 이어졌다.

‘세계시인선’에 속한 책들이 국내 초역인 경우가 절반가량 됐다는 점도 주목받았다. 특히, 남미 등 제3세계 현대 시인의 작품도 포함돼 있었다. 일본을 경유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과감한 번역 시도가 이어졌다. 그리고 언어의 새로운 형식이 출현하자 곧이어 새로운 사유 및 상상력이 촉발되었다. ‘세계시인선’ 출간 이후 문단에 나온 수많은 시인이 몽상의 샛길을 열고 이미지의 저장소를 충전하는 데 이 시집들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하고 있다.

‘세계시인선’의 큰 성공에 고무돼 이와 쌍을 이루는 한국시인선으로 기획된 것이 ‘오늘의 시인총서’다. 당시까지 시집 출판은 대부분 자비로 이뤄지거나 호화 양장본으로 찍어 애호가들에게 소량 판매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오늘의 시인총서’는 박맹호의 재능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에 속한다. 오늘날 한국 시집 출판의 표준이 되어버린 ‘시집 판형’이 처음으로 시도되었다. 날렵한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이 판형은 세로로 길게 디자인해 한 손으로 들고 읽을 수 있는 데다, 30절로 정확하게 재단할 수 있어 용지 손실이 전혀 없는 독특한 판형이다. ‘오늘의 시인총서’의 성공을 좇아 문학과지성사·창작과비평사 등이 시집을 출판하면서 따라 해 널리 퍼졌다. 이 판형은 한국인의 미감에 간절히 호소하는 바가 있는 듯, 시절이 꽤 흘렀는데도 독자들의 선호가 줄어들지 않고 있다.

총서의 간행사는 김현이 썼는데, 명문으로 이름 높다.

“문학이 그것을 산출케 한 사회의 정신적 모습을 가장 날카롭게 보여주고 있다면 시는 그 문학의 가장 예민한 성감대를 이룬다. 시를 이해한다는 것은 한 사회의 이념과 풍속, 그리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힘을 개인의 창조물 속에서 이해한다는 것을 뜻한다. (중략) 우리가 ‘오늘의 시인총서’를 발간키로 결정한 것은 시인들의 날카로운 직관을 통해서 한국 사회의 정신적 상처와 기쁨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이 총서의 가장 큰 충격은 김소월이나 서정주가 아니라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가 첫머리에 놓였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한국 현대시의 거장이 됐지만, 당시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채 요절해버린 불우한 시인이었다. 1974년 9월, 김수영의 뒤를 이어 첫 발행분에 속한 시인들은 김춘수·정현종·이성부·강은교였다. 그 뒤를 고은·황동규·오규원·김광규 등이 이어갔다. 순수와 참여를 가리지 않았지만, 뚜렷한 지향은 현대성이었다. 해방 이후 한국 현대시가 쌓아 올린 새로운 언어들을 하나의 시리즈로 엮으려 한 것이다.

계간 <세계의 문학>과 ‘오늘의 작가상’


▎한 시대가 필요로 하는 교양의 금자탑을 이루려 했던 민음사의 이데아 총서.
전통 정서를 좀처럼 타령하지 않는 젊은 시인들의 언어는 큰 호응을 얻었다. 독자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면서 발간 두 달만에 초판 2000부가 모두 팔렸다. <거대한 뿌리>는 출간 이후 3년 동안 3만 부나 팔렸다. 김수영 시인의 유족들은 인세를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 이를 종자돈으로 삼아 <김수영 전집>을 출간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해마다 재판을 거듭하는 <김수영 전집>의 인세를 다시 ‘김수영문학상’의 상금으로 기탁했다.

그해에 출판된 가장 전위적인 시집에 주어진 김수영문학상은 유족의 인세에서 부족한 부분을 민음사가 메우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이성복·황지우·최승호·김용택·장정일·장석남·김기택·나희덕 등이 수상자로 이름을 올린 김수영문학상은 그 운영방식이 지금처럼 시집 공모로 바뀌기 전까지 한국 시인들이 가장 받고 싶어 하는 상으로 자리 잡았다.

김현 등이 문학과지성사라는 별도 출판사를 차려 독립하면서 박맹호는 김우창·유종호와 함께 문학 출판의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1977년 가을에 창간된 계간 <세계의 문학>은 그 이름에 선명한 지향을 담고 있다. 말 그대로 한국문학을 세계화하고, 세계문학을 한국화하는 이중의 지향을 달성하고 싶은 열망이 잡지 이름에 담긴 것이다. 김우창과 유종호는 르네상스적 인간이었다. 특히 김우창은 사유의 깊이와 넓이를 고루 갖추어 사상가의 반열에 오를 만한 천재였다. 문·사·철은 당연하고 예술과 과학까지 종횡무진 넘나들면서 펼쳐지는 그의 비평은 한국사회 곳곳에서 분출된 근대적 추구에 공동체 의식에 바탕을 둔 단단한 지적 토대를 제공했다. 근대화의 격동 속에서 주체성을 상실할 우려를 염려하는 김우창의 <세계의 문학> 창간사도 당대의 명문으로 이름 높다.

“격동의 시대에 있어서 운명에 대한 주체적인 통제와 그것을 개조할 수 있는 자유로운 창조의 힘은 자칫하면 상실되어 버린다. 이런 때, 감춰져 있던 것은 밝은 의식으로 끌어들여져서 비로소 보존되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은 비판의 대상이 되어 비로소 새로운 힘의 근원이 된다. 그리하여 사람이 스스로의 운명을 이해하고 이것을 새로운 가치로서 창조하는 과정은 보다 쉬워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세계의 문학>이 비판적 검토와 의식적 수용을 통해서, 우리 사회의 창조적 주체성을 회복하고 그것을 풍부하게 하는 데 기여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근대화를 빌미로 개성의 자유로운 발현을 억압했던 박정희 군사독재정권 아래의 사회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읽을 때 이 글은 빛난다. 세상에 의해 가려지고 감추어진 것을 폭로하고 비판함으로써 스스로 자기 운명을 의식할 것을 촉구하는 이 글은 ‘창조적 주체성’이라는 공공연한 목표를 제시한다. 자유로운 인간이 자신의 온전한 인간됨을 성취하는 교양(Bildung)의 확보가 자연스러운 귀결이 되면서, 세계적 수준에서 이미 성취된 교양의 비판적 확보와 소개가 출판의 임무로 제시된다. 창간호 좌담에 참여한 백낙청의 덕담처럼, “우리의 문학을 세계문학의 차원에서 생각하면서 소개하고 연구하고 평가하는 작업”이 중요한 과제가 된 것이다.

김우창과 더불어 박맹호는 이 과제를 대담하게 수행해간다. ‘오늘의 작가상’을 신설해 세계 수준을 지향하는 작품을 직접 발굴하러 나선 것이 그 하나다. 지금과 달리 당시에는 통속작가라면 몰라도 순문학을 하는 신인들은 단행본을 출판하기가 아주 어려웠다. 첫 책을 내는 데 10년 정도 걸리는 게 보통이었다. 그나마 괜찮은 출판사에서 책을 내려면 문단 실력자들의 눈치를 극심하게 봐야 했다.

이문열 발굴, 종합대학의 영향력 지닌 아카데미즘센터


▎1. 박맹호 회장이 기자회견장에서 ‘오늘의 작가상’ 개편과 관련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 2. 1977년 창간된 계간 <세계의 문학>은 세계문학 속 한국문학의 위상확인을 열망하는 문학잡지로 자리매김했다.
‘오늘의 작가상’은 이러한 문단 질서를 단번에 뒤엎어버렸다. 공모를 통해 일단 수상작으로 선정되면 <세계의 문학>에 전재돼 이름을 알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단행본으로 곧바로 출간돼 독자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제1회 수상작인 한수산의 <부초>를 비롯해 박영한의 <머나먼 쏭바강>,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조성기의 <라하트 하헤렙>, 강석경의 <숲속의 방> 등이 이 상을 받고 세상에 나서서 낙양의 지가를 올렸다.

‘오늘의 작가상’을 통해 발굴돼 지금껏 문명(文名)을 떨치는 작가가 이문열이다. 박맹호와 이문열은 편집자와 소설가가 어떻게 서로 고양시킬 수 있는지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세계 고전에 대한 풍부한 독서에서 유래한 깊이 있는 사유에, 국한문 혼용체를 완벽하고 우아하게 구사할 줄 아는 작가 이문열은 <사람의 아들>로 초대형 베스트셀러를 내면서 세상에 나섰다. <젊은 날의 초상> <황제를 위하여> <시인> <금시조> <들소>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 지칠 줄 모르고 화제작을 쏟아내면서 독서계에 폭풍을 일으켰다. 특히 박맹호가 당시 신진으로는 파격적 조건으로 <경향신문>에 연재를 주선해 마련한 <평역 삼국지>는 지금까지 2000만 부 가까이 판매되면서 한국출판의 신기원을 이룩했다.

“나는 민음사를 종합대학 하나 정도의 영향력을 지닌 아카데미즘센터로 만들고 싶다.”

박맹호는 틈만 나면 이야기하곤 했다. 책을 통해 민음사를 한 시대가 필요로 하는 교양 전체를 충전하는 거대한 저장소로 만들려는 야망을 품었던 것이다. 그러고는 수십 년에 걸쳐 기회가 닿을 때마다 조금씩 교양의 금자탑을 이루려 했다. 김우창과 함께 박맹호가 처음 시도한 것이 ‘이데아 총서’였다.

“이데아 총서는 시대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우리의 생각과 느낌을 바르고 깊고 풍부하게 하는 책들을 한자리에 모으고자 한다.”

간략한 발간사는 어쩌면 야망의 크기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작은 미미하나 끝은 창대하리라. 르네상스적 인간답게 김우창은 이 총서를 통해 한 인간이 필연적으로 가져야 할 교양 전체를 총체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제대로 된 인간이라면 문학만이 아니라 철학·역사·자연·사회에 대한 지식을 골고루 갖추어 어느 한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총체적 균형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평생의 꿈인 ‘세계문학전집’에 재도전


▎박맹호 회장이 1993년부터 출간을 시작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지금까지 346권이 출간되면서 한국출판의 기념비로 자리 잡았다.
나중에는 주로 인문학 총서로 성격이 바뀌었지만, 1978년 출간된 ‘이데아 총서’ 초기에는 소설이나 시 같은 문학은 물론 문예이론이나 철학 등의 인문학, 정치학·경제학 같은 사회과학, 물리학·생물학 같은 자연과학까지 폭넓게 포괄했다. 그중에서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미메시스> <열린사회와 그 적들> <지식의 고고학> <시뮬라시옹> <차이와 반복> <그라마톨로지> <포스트모던의 조건> 등 인문학 분야의 책들은 <세계의 문학> 특집, 대우학술총서 등과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면서 빠르게 지식사회를 파고들어 1990년대 이후 마르크스주의를 대체하면서 한국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포스트 사상’ 열풍을 예비했다.

그러나 V. S. 네이폴의 <미겔 스트리트>나 도리스 레싱의 <마사 퀘스트> 등 당대 세계문학의 첨단에 있었던 작품은 전혀 반응이 없었다. 이들 작가는 너무 빠르게 소개된 것이었다. 2000년대 들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비로소 독자들의 인정을 받았을 정도로 낯설었다. 세계문학의 정수를 통해 한국문화의 수준을 높이려 했던 박맹호의 기획은 1990년대에 세계화 열풍이 불어오고 한국사회의 의식이 고조된 후 ‘세계문학전집’을 기획할 때까지 미뤄둘 수밖에 없었다.

대우학술총서는 김우중 회장이 200억 원을 출연해 만든 대우재단과 협력해 한국 학술출판의 이정표를 세운 기획이다. 언어학·문헌학·심리학·고고학·풍속사·신화학 등 인문·사회과학, 동역학·영양학·지질학·고생물학·곤충학·신경과학·고분자화학 등 자연과학 전 분야에서 신진 학자를 발굴해 연구를 지원하고, 그 성과를 책으로 출판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 각 분야의 필독 고전을 선별해 번역하는 일이 더해졌다. 약간의 지원금을 받기는 했으나 작업은 고되고 판매는 지지부진했다. 새로운 필자를 발굴하는 데 소명을 느낀 박맹호의 용기가 없다면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대우학술총서는 1983년 김방한의 <한국어의 계통>을 시작으로 1999년까지 16년 동안 모두 424권을 간행하고는 대우재단의 지원금이 줄어들면서 마감했다.

박맹호 회장이 평생의 꿈인 ‘세계문학전집’에 다시 도전하기로 한 것은 1993년이다. 세계화 시대를 맞이해 전 세계인의 삶에 대한 관심이 분출하던 때였다. 박맹호는 세계문학의 정수들을 선별해 출판할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했다. 과거의 성공과 실패를 교훈삼아 익숙한 고전과 현대적 작품을 단단히 균형 잡고, 일본어 중역을 벗어나 원어를 우리말로 제대로 번역하면 독자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여겼다. 그로부터 김우창·유종호 등과 함께 5년 동안 준비기간을 거쳐 1998년 <변신 이야기> <햄릿> <동물농장> <변신> 등 첫 열 권이 나왔다. 독자들은 열광했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은 지금까지 346권이 출판되면서 한국출판의 살아 있는 기념비로 자리 잡았다.

이 전집의 간행사는 박맹호 출판의 지향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세대마다 문학의 고전은 새로 번역되어야 한다. (중략) 오늘에는 오늘의 젊은 독자들에게 호소하는 오늘의 번역이 필요하다. (중략) 우리는 여기에 우리 문학을 자임하며 오늘의 독자들을 향하여 엄선하여 번역한 문학 고전을 선보인다. 어엿한 우리 문학으로 읽히리라 자부하면서 감동과 전율을 고대하는 젊은 독자들에게 떳떳이 이 책들을 추천한다.”

그렇다. 박맹호와 함께 한국출판은 비로소 오늘의 독자에게 필요한 창조적 주체성의 토대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책으로써 한국의 주체적 근대화를 이룬 자, 그것이 박맹호의 이름이 불멸할 이유가 될 것이다.

장은수 - 월간 중앙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읽기중독자.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민음사에서 오랫동안 책을 만들고, 대표이사(편집인)도 역임했다. 현재 순천향대학교 미디어콘텐츠학과 초빙교수로 학생들과 어울리면서 주로 읽기와 쓰기, 출판과 미디어 등에 대한 생각의 도구들을 개발하는 일을 한다. 저서로는 <출판의 미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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