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명노인 이승만 박사를 변호함’은 김덕영 감독 덕에 유명해진 책이다. 김덕영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망명노인 이승만 박사를 변호함’을 읽고 ‘건국전쟁’을 만들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이 책을 출간한 곳이 비봉출판사다. 헌책방에서 먼지를 쓰고 구르던 책을 박기봉 대표가 발견해 새 옷을 입혔다. 이승만을 변호한다니 꼴보수인가 싶지만, 박기봉은 서울대 경제학과 5년 선배인 김수행을 설득해 금서(禁書)였던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출간한 사람이다. 신영복과도 절친이었던 그는 어쩌다 이승만에 꽂힌 걸까. 4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져 말이 어눌해진 박 대표와의 인터뷰에 ‘우주인’ 고산이 “통역차” 동행했다. 그는 박기봉의 둘째 사위다.
◇헌책방에서 만난 ‘망명노인’
-’건국전쟁’과 ‘망명노인’의 인연을 알고 계셨나?
“전혀 몰랐다. 2016년에 인쇄한 초판 1000부가 ‘건국전쟁’ 개봉으로 다 팔려나가고, 2쇄까지 찍게 돼 그저 놀랐다.”
-목사이자 독립 투사였던 김인서란 분이 1963년에 펴낸 책이더라.
“평양신학교를 다녔고, 당시엔 최남선·양주동과 함께 대표 한학자로 꼽힐 만큼 한문에 조예가 깊은 지식인이었다.”
-이승만의 측근이었나?
“그렇지 않다. 평소 이승만, 안창호를 존경했다는 김인서는 제헌국회 방청석에서 이 박사를 멀리서 한번 보았을 뿐 서로 알지도, 만난 적도 없는 사이였다.”
-그런데 왜 이 책을 썼을까?
“이승만이 하와이로 떠날 때 몇몇 언론이 폭군, 깡패, 민주 반역자 운운하며 짓밟는 행태를 보고 ‘사형수에게도 변호인이 있는데 이 박사에겐 왜 없는가’ 하는 서글픈 마음으로 책을 썼다고 적었더라. 그는 1961년 장면 정권이 4·19 이전 이승만 대통령의 치적을 유엔총회에 보고한 8대 조문을 근거로 이승만 집권 당시 민주주의와 교육, 경제가 얼마나 발전했는지 객관적 수치를 들어가며 증언한다.”
-60년 전 출간된 이 책을 어떻게 발견했나.
“2015년 제헌절에 헌책방에서 찾았다. 김인서는 4·19 직후에 써서 1963년에 펴냈지만 이승만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책도 잊혔다.”
-어쩌다 이승만에 꽂히셨나.
“미국에서 사업하는 친구가 들고 온 로버트 올리버 박사의 ‘이승만의 대미 투쟁’을 읽고 충격을 받았다. 친미주의자로 알고 있던 이승만에 대한 나의 편견을 완전히 바꿔놓은 책이다. 제목처럼 이승만은 혈맹인 미국이라도 국익에 해가 된다면 단호하게 싸웠다. 이승만 총서를 내자고 결심한 계기다.”
-이승만의 ‘독립정신’은 직접 현대어로 옮겼더라.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투옥된 스물아홉 살 이승만이 쓴 당대 최고의 경세서이자 정치사상서다. 조선왕조 500년의 경세서들과 달리 ‘독립정신’은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고, 그들 하나하나가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라는 자유민주주의 사상에 입각해 쓰인 최초의 책이다. 첫 장을 펼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29세 청년이 썼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
-1909년 초판을 그대로 출간하지 않고 교정과 주석 작업을 했다.
“자유, 민권, 독립, 민주공화를 주장한 ‘독립정신’은 집필하는 것 자체로 역모였다. 감방 거적 밑에 원고를 감춰 놓고 써야 했던 상황이라 문장이 거칠고 오타도 많다. 이승만도 서문에 ‘고명하신 선생들이 (후대에) 교정해주시길 바라는 바’라고 썼다. 고어체에 순한글이 많아 읽기 어렵지만, 문장의 격조가 높고 아름다워 교정 보는 내내 즐거웠다. 가슴을 절절히 울린다.”
◇달은 발이 없어도 하늘을 간다
-소설가 펄 벅이 ‘무서운 책’이라고 평한 이승만의 ‘일본의 가면을 벗긴다’도 출간했다.
“태평양전쟁을 예언한 책이다. 책이 출간되고 넉 달 뒤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다.”
-이승만은 어떻게 예언했을까?
“누구보다 일본의 정체를 꿰뚫고 있었던 이승만은 중국을 점령하고 동남아로 침략 행군을 이어가던 일본이 머지않아 대미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전망했다. 전쟁을 막으려면 미국이 먼저 힘으로 일본을 제재해야 한다고 주장해 전쟁광이냐는 비난도 받았다. 그러나 실제로 전쟁이 터지자 베스트셀러가 됐다. 인세로 미국에서 집을 구입했을 정도다.”
-프린스턴대 박사 학위 논문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도 펴냈던데.
“이승만은 유럽 열강과 달리 중립으로 자유통상의 선구자가 된 미국처럼 우리도 중립 통상을 내세우면 미국이 이를 지지하고 도와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일본의 한국 지배를 미국이 승인한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년)의 존재를 1924년에야 알게 된 이승만은 자신이 얼마나 순진했는지 후회한다. 이후 그는 철저한 현실주의자, 미국을 이용하는 용미(用美)주의자로 변신했다.”
-한시집도 직접 번역했더라.
“20대 청년이 어떻게 ‘독립정신’을 쓸 수 있었을까, 하며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체역집(替役集)’을 만났다. 이승만이 감옥에서 쓴 한시들을 모은 책인데, 유학 경서와 중국사, 당송팔대가에 대한 그의 해박한 지식이 녹아 있어 감탄하며 번역했다. 이 박사가 천자문을 뗀 뒤에 지은 걸로 추정되는 한시만 봐도 그렇다. ‘바람은 손이 없어도 나무를 흔들고, 달은 발이 없어도 하늘을 간다(風無手而撼樹, 月無足而行空).’”
◇자본론, 맹목적으로 읽어선 안 돼
-비봉출판사가 유명해진 건 김수행 번역의 ‘자본론’ 때문이었다.
“일본판으로 ‘자본론’을 읽고 누군가는 이걸 제대로 번역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침 영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김수행 교수를 설득했다. 번역 원고가 어느 정도 쌓이면 보자기에 싸맨 뒤 아내 친구 집에 숨겨놨다가 신군부가 막을 내린 뒤 출간했다.”
-’자본론’은 운동권의 바이블이었다.
“운동권 책이라기보다 경제학의 고전이라 출간했다. 유물론이 매력적인 건 사실이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도 김수행 번역으로 출간했다.
“‘자본론’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책이 ‘국부론’이다. 애덤 스미스가 창조한 경제학 용어와 개념을 마르크스는 한편으론 계승하고 한편으론 수정하면서 자기의 혁명적인 체계를 완성했다.”
-김수행의 ‘국부론’은 1992년 동아출판사에서 먼저 나왔던데.
“거기서 절판돼 우리한테 가져온 건데, 용어와 문장이 어려워 도저히 그대로 출간할 수가 없더라. 내가 6개월동안 영어, 일어, 중국어판을 놓고 비교해가면서 거의 새로 번역하다시피 했다. 김수행과의 공동 번역인 셈이라 인세도 5대 5로 절반만 줬다(웃음).”
-’자본론’은 지금도 스테디셀러다.
“그 사이 공산주의가 붕괴했고, 애덤 스미스가 옳았다는 것이 증명됐는데도, 자본론이 무조건 옳다고 착각하며 맹목적으로 읽는 독자들이 있어 안타깝다.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
-’경제수학 입문’ 같은 경제서를 주로 내다 2000년부터는 맹자, 삼국연의, 조선상고사 등 고전을 내는 출판사로 변신했다.
“경제서가 대학 교재로 채택되니 교수들이 돈을 달라더라. 당시엔 관행이었는데 나는 한 번도 안 줬다. 영업부장이 채택료 주면 책도 더 많이 팔 수 있는데 왜 고집을 부리냐며 사표를 내더라. 그래도 내 양심이 용납할 수 없어 경제서를 다 접기로 했다.”
-’삼국연의’(전 12권)를 완역하려고 중국에 갈 때마다 100kg씩 책을 짊어지고 왔다던데.
“여러 판본을 대조하며 읽어야 했으니까. 100kg이래야 몇 권 안 된다.”
-전문 번역가도 아닌데 시비 거는 사람은 없나.
“한번은 어느 중문과 교수의 번역 원고를 빨갛게 고쳐놨더니 ‘감히 대학교수 원고에 손을 댔다며 소리를 지르더라(웃음).”
-한문을 따로 배웠나.
“어릴 때부터 좋아했다. 대학 시절 틈틈이 중국 사서를 공부했고, 군대 시절에도 고문진보, 도연명의 시를 내무반에 숨겨놓고 읽었다. 출판사 열면서는 중국어와 함께 갑골문, 금문, 전서도 공부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한자만 제대로 공부해도 과외가 필요 없을 만큼 지력이 높아질 거라고 생각한다.”
◇ 이승만이 옳았다
-졸업 후 금융권에 종사하다 왜 출판을 하기로 했나.
“농협에서 삼보증권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증시에 대해 내가 아는 게 하나도 없더라. 큰일났다 싶어 증권 관련 책을 한 무더기 사서 독학에 들어갔다. 그때 황홀한 경험을 했다. 백지가 물감을 빨아들이듯, 공부가 그렇게 짜릿할 수 없더라. 책의 힘에 매료된 순간이다.”
-정운찬, 김중수와 함께 조순 선생의 제자라던데.
“출판사 이름을 고민하다 책을 엮는 데(比) 꼭대기(峰)가 되겠다는 의미로 ‘비봉(比峰)’이라고 지었더니 조순 선생이 감탄하시더라. 선생의 권유로 충무공이순신전서(4권)를 번역했다.”
-’자본론’을 출간한 곳에서 이승만 총서를 출간하니 의아해하는 독자도 있겠다.
“2001년 출판협회 이사장으로 북한에 간 적이 있다. 평양에서 원산고속도로를 타고 단군왕릉도 가고 묘향산에도 갔는데 북한은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김대중의 햇볕정책이나 평화통일은 허상에 불과하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탈북자들을 출판사 직원으로 채용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다.”
-총선은 어떻게 보셨나.
“나는 여론조사가 늘 조작된 것이라고 믿었다. 나라를 북한에 바치려는 사람들, 죄 짓고도 부끄러움 모르는 자들을 대체 누가 지지할까 싶었다. 그런데 아니더라.”
-진보 성향이 강한 출판계에선 외로울 것 같다.
“출판계 돌아가는 일엔 관심 없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책상 앞에 앉아 글과 씨름하는 일이 행복하다.”
-’우주인’ 고산이 사위던데.
“딸들의 결혼 문제엔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웃음).”
-곧 여든이시다.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하는 내 삶이나 별 볼일 없다고 여긴 친구의 삶이 다 거기서 거기더라. 적당히 살아도 된다.”
☞박기봉
1947년 경북 의성 출생. 경북고,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80년 비봉출판사를 설립한 뒤 ‘자본론’ ‘국부론’ 등 경제서와 고전, 이승만 총서를 펴냈다. 번역서로 ‘충무공 이순신 전서’ ‘맹자’ ‘삼국연의’ ‘이승만 한시집’ 등이 있고, ‘조선상고사’ ‘독립정신’ 등을 현대어로 옮겼다. 한국출판협동조합 이사장을 지냈다.
<참고문헌>
1. 김윤덕, "건국전쟁’에 영감 준 그 책, ‘자본론’ 추앙하던 경제학도가 펴냈다", 조선일보, 2024.4.22일자. A3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