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생애와 업적과 탄신 479주년 기념행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시인, 문학평론가, 향토사학자, 칼럼니스트) 대산 신상구
1.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생애와 업적과 평가
2024년 4월 28일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 탄신 479주년이 되는 아주 뜻깊은 날이다.
문무를 겸했던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장군은 인종 1년인 1545년 4월 28일(음력 3월 8일) 한성부 건천동에서 이정(李貞)과 초계 변씨(草溪卞氏)와의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한양 건천동에서 보냈고, 외가인 아산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이순신 장군은 어릴 때부터 무인의 자질을 보였지만 28세에 무과시험에 처음으로 도전했고 31세 때인 1576년(선조 9년) 2월에야 식년시 무과에 병과로 급제해 관직에 나섰다. 선조 16년인 1583년에 부친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났다. 선조(宣祖) 19년인 1586년 40세 때에 사복시 주부(종6품)로 다시 관직에 나갔다. 그는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의 천거로 16일 만에 조산보 만호로 특진해 다시 변방으로 나갔다. 1년 반 뒤인 1587년 8월에는 녹둔도 둔전관을 겸임하게 되었다. 선조 22년인 1589년 이산해(李山海, 1539-1609)의 추천으로 감사 이광의 군관으로 전라도로 파견되었다. 선조 24년인 1591년에는 진도군수로 임명됐지만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다. 전라좌수영으로 부임한 이순신 장군은 전함을 건조하고 군비를 확충하며 왜군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1592년 4월 13일 일본의 침략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해전, 적진포해전. 사천해전, 제1차 당포해전, 한산도대첩, 안골포해전 등에 참여해 승리함으로써 남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했다. 그러자 선조는 1593년 9월 이순신 장군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그 후 이순신 장군은 제2차 당항포해전, 장문포해전에서 이겨 큰 전공을 세웠으나 원균(元均, 1540-1597)의 모함으로 한양으로 끌려가 혹독한 문초를 받았고, 권율(權慄, 1537-1599)의 진영에서 백의종군했다. 그런데 원균이 1597년 8월에 칠천량해전에서 왜군에 대패하여 전라수사 이억기(李億祺, 1561-1597), 충청수사 최호(崔湖, 1536-1597) 등과 함께 전사하면서 이순신 장군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남아 있는 전선을 수습하여 붕괴된 조선 수군을 재건했으며, 10월 25일 진도 울돌목 명랑해전에서 13척의 배로 130여척의 왜군에 맞서 기적의 대승을 거두었다. 이 승리로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다시 장악했다.
1598년 9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가 죽자 일본 해군은 철수를 하기 시작했다. 이순신 장군은 12월 16일 명나라 제독 진린(陳璘, 1543-1607)과 연합해 노량에서 500여척의 왜군과 싸워 200여척의 적선을 불태우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은 도주하던 적선을 추격하다가 유탄에 맞아 선조 31년인 1598년 11월 19일 전사했다.
이순신 장군의 전사 소식을 들은 조정은 우의정을 추증했다. 선조 37년인 1637에는 선무공신 1등으로 녹훈되었고, 좌의정이 증직되었으며, 덕풍부원군으로 봉해졌다. 인조 21년인 1643년에는 '충무(忠武)'의 시호를 받았고, 효종 10년인 1659년에는 남해의 전적지에 그의 비석이 세워졌다. 숙종 33년인 1707년에는 충청도 아산에 세워진 그의 사당에 '현충(顯忠)'이란 호가 내려졌으며, 정조 17년인 1793년에는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1795년에는 문집인 '이충무공전서'가 왕명으로 간행되었다. 현대에 와서는 1960년대 후반부터 서울의 중심인 세종로에 동상이 세워지고, 현충사가 대대적으로 정비됨으로써 이순신 장군은 한국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인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2011년 4월 28일에는 현충사 내에 충무공 이순신기념관이 개관되어 그의 혼이 담긴 주요 유물 40여점이 전시되어 있다. 해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탄신일인 4월 28일을 전후하여 아산에서는 성웅 이순신축제를 개최하고 있고, 서울 중구에서는 충무공 탄신 기념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성웅 이순신 장군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23전 23승의 놀랄만한 전과를 올려 한국에서는 을지문덕, 연개소문, 강감찬 등과 함께 불세출의 구국의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다.
1905년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명제독 도고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 1848-1934)는 "세계 해군 역사에서 군신(軍神)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이순신 장군 한 사람 뿐이다. 이순신 장군과 비교하면 나는 일개 부사관도 못 된다."고 말했다.
이순신 장군의 진중일기로 국보 제76호인『난중일기(亂中日記)』가 201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우리 후손들이 이순신 장군 탄신 479주년을 맞이하여 본받아야 할 것으로는 충효와 애민 정신, 뛰어난 리더쉽과 전략전술, 타고난 문장력과 창의력, 불굴의 투지와 인내력 등을 들 수 있다.
2. 충무공 이순신 장군 탄신 479주년 기념행사
현충사관리소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탄신 479주년을 맞아 4월 28일 11시에 충남 아산시 현충사 사당 및 경내에서 이충무공의 국난극복 업적과 정신을 국민과 함께 기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 탄신 제479주년 기념행사’를 600여 명(초청인사 250명, 일반 참배객 350명)이 참석한 가운데에 거행했다.
주 행사인 다례는 초헌관 현충사 관리소장의 분향·헌작(술잔을 올림)과 축관의 축문 낭독으로 구성된 초헌례, 아헌관 후손 대표 이범이 헌작하는 아헌례, 종헌관 시민제관 한상우가 헌작하는 종헌례로 진행되었다. 이어 대통령 윤석열 명의의 헌화와 분향, 현충사 청소년 국가유산 지킴이의 헌화가 있었다.
현충사관리소는 기념행사 하루 전인 27일과 28일 양일간 현충사 내 고택·사당·교육관 등 6군데를 돌며 도장을 받으면 기념품(종이접기·스티커 등으로 구성된 체험 꾸러미)을 받을 수 있는 ‘도장 찍기 여행(스탬프 투어)’을 운영했다. 같은 기간 아산시는 이충무공 묘소를 경유하는 ‘백의종군길’ 걷기대회와 마라톤 행사를 개최했다.
탄신제 주간(4월 24~28일)에 ‘성웅 이순신 축제’를 주관하는 아산시는 현충사 고택에서 27일 ‘이순신 창작시 및 시낭송 대회’를, 현충사 충무문에서 사생대회를 각각 개최했다. 28일에는 역시 충무문 앞에서 난중일기 백일장을 개최하고, 현충사 은행나무 활터에서는 대한궁도협회가 주최하는 ‘제63회 대통령기 전국 시·도대항 궁도대회’가 열였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탄신 479주년 기념식 기념사에서 “오늘은 우리 민족의 성웅이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탄신 479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충무공께서 학문과 무술을 연마하셨던 이곳 현충사에서, 올해도 여러분과 함께 공(公)의 위대한 업적과 가르침을 기리게 된 것을 매우 뜻깊게 생각합니다. 충무공은 우리의 영원한 리더이자 진정한 영웅이십니다. 장군의 업적을 기리는 영화, ‘명량’, ‘한산’, ‘노량’ 3부작이 총 3천만 명의 관객을 기록할 정도로 대한민국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위인입니다. 충무공은 우리의 영원한 리더이자 진정한 영웅이십니다. 장군의 업적을 기리는 영화, ‘명량’, ‘한산’, ‘노량’ 3부작이 총 3천만 명의 관객을 기록할 정도로 대한민국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위인입니다. 공은 일찍이 왜적의 침략을 예견하시고, 유비무환의 자세로 거북선을 건조하고 화포를 개량하셨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탁월한 리더십으로 23전 23승 하여 나라를 구하셨습니다.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투철한 사명감과 정의감으로 두 차례에 걸친 백의종군도 마다하지 않으시며 오로지 나라와 백성의 안위만을 걱정하셨습니다. 그 숭고한 충절과 애민 정신은 우리 민족이 어떤 위기와 도전도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인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뜻깊은 충무공의 탄신일을 맞이하여, 공의 큰 가르침을 되새기면서 선진 한국의 빛나는 미래를 그려 나갑시다. 다시 한번,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위업과 숭고한 정신을 기리며, 여러분 모두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라고 말했다.
<필자 대산 신상구 국학박사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 2호 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 종로구 재동지점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1994),『아우내 단오축제』(1998),『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2019),『한민족의 원대한 꿈 노벨상 수상전략』(2023), 『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1997) 등 6권.
.주요 논문 :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등 129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천손민족중앙회본부 연수원장, 대덕문학회․백수문학회 회원, 동양일보 동양포럼 연구의원, 평화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