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한국 과학자 후보거명도 안돼
일천한 과학역사 등 구조적 한계 원인
위험과 외면 감수하는 소신파 연구자와
한우물 연구 독려하는 사회시스템 절실
"R&D냉대, 단기성과 과기정책 재고해야"
매년 10월이면 과학계를 비롯해 우리 국민은 다소 침울해진다. 스웨덴 한림원이 발표하는 노벨 과학상 수상자 소식이 연일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데 한국 수상자는 없기 때문이다. 1923년 9월 동아일보가 노벨상 소식을 전하면서 "조선인으로서 노벨상을 탈 만한 사람이 출생하기까지는 지식계급이 아직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겠다"고 개탄했다니 노벨상에 우리 국민의 기대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난 몇 년 국민들은 숨죽여 한림원의 발표에 촉각을 기울이기도 했다. 수상 후보자를 예측해 발표하는 미국 글로벌 정보분석 기업 클래리베이트가 한국 과학자들을 거명했기 때문인데 올해는 그런 '희망고문'마저 없다. "한국이 과학 10대 강국이라는데···" 국민들은 노벨상 수상 가능성이 점차 가까워지는지, 더 멀어지는지 궁금해 한다. 대덕넷(HelloDD)이 물리, 화학, 생리의학 등 전문가들에게 수상 가능성과 수상이 늦어지는 원인 및 대책에 대해 들어봤다. 권위와 가치라는 측면에서 노벨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도 물어봤다. [편집자주] |
노벨상은 최초 연구에 주어지는데 우리는 주목받지 못하는 연구에 매달리는 과학자도 많지 않고 한우물 과학자를 독려하는 분위기도 아니다. 일부 과학자들은 노벨상 취지에 맞게 우리가 인류를 위한 과학연구를 얼마나 해왔는지 성찰해볼 것을 권했다.
과학자들은 노벨상이 여전히 최고의 권위지만 과학, 연구개발(R&D), 산업 수준의 가늠자가 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도 짚었다. 압축성장을 통해 경제 부강을 가져온 우리 과학의 성과를 노벨상이라는 잣대만으로 폄하해서는 안된다는 주문이었다.
◆ 조만간 수상할수 있을까? 에 "글쎄요···"
머지않아 한국에서 노벨 과학상 수상자가 나올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부정적인 견해가 많다. A 카이스트 교수는 "수상 가능성이 더 멀어진 것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별로 가까워진 것 같지도 않다"고 진단했다.
수십 년 후를 전망하는 답변도 있었다. 지난달 열린 국내 최고급 이공계 총장 기자간담회에서 B 총장은 "10여 년 전 언론에서 우리의 노벨상 수상 시기를 물어와 '20년은 걸릴 것'이라고 답변한 적 있는데 지금 물어오면 '앞으로도 20년은 더 걸릴 것'이라고 답변할 것 같다"고 전망했다.
연구기관에 근무하다 대학으로 이직한 C 교수는 "앞으로 30년 후 과연 우리 노벨상 수상자 나올까 자문해 봤는데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더욱 비관적 전망을 내놨다.
만약 수상을 한다면 어느 분야에서 가장 먼저 나올까. 원자물리학을 전공한 서울지역의 한 대학교수는 "30년 전 대학에 부임했을 때 물리학 연구환경은 구멍가게 수준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호전돼 20년 전부터 연구다운 연구가 축적돼 왔다"며 물리 분야의 조기 수상 가능성을 점쳤다. 변화 속도가 빠르다는 점에서 화학과 생리의학을 꼽기도 했다. 화학은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여왔다는 점에서 더 주목을 모았다.
◆ 최고 수준이지만 최초는 아닌 한국 과학
노벨상 수상이 늦어지는 이유에 대한 과학자들의 한결같은 분석은 "한국의 과학연구는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최초는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구본경 기초과학연구원(IBS) 유전체 교정연구단장은 "한국 과학자들의 연구업적은 우수하지만 독창적으로 해당 분야를 처음 개척한 경우는 드물다. 그래서 몇몇 과학자들이 언론에서 노벨상 후보로 거명됐을 때 학계에서는 가능성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고 전했다. 현실은 국민의 기대와 과학계의 전망 사이에 다소 차이가 있다는 얘기다.
그는 "노벨상은 인류 최초의 연구자에게 주는 상이다. 심지어 그 연구성과를 가져온 실험이 엉뚱할 정도로 단순하더라고 그렇다. 흑연에서 스카치테이프로 그래핀을 처음 분리한 연구가 좋은 사례다"라고 소개했다.
영국 맨체스터 대학 안드레 가임 교수와 콘스탄틴 노보셀로프 교수는 꿈의 신소재라 불리는 '그래핀(graphen)'을 발견해 2010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이들은 스카치테이프로 그래핀을 추출했는데, 신소재 개발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추출 방법이 간단해 더욱 주목을 모았다.
C 교수는 "우리 학계는 외국 특히 미국의 해당 분야 대가(大家) 밑에서 연구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데 그 대가를 따라 아무리 연구성과를 내더라도 최초 연구를 중시하는 노벨상은 그 스승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며 "양자점 연구로 이번에 노벨화학상 받는 알렉세이 에키모프 박사 보다 더 많은 연구성과를 낸 국내 과학자도 적지 않지만 그렇다고 노벨상이 주어지지는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런 측면에서 보면 외국에서 검증된 사람들을 데려와 연구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우리의 방식도 바뀌어야 한다. 그런 방식으로는 제아무리 성과를 내도 노벨상은 받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여러 다른 연구자들도 노벨상에 근접하려면 새로운 질문과 비판적인 시각을 높게 평가하고 독창적이고 모험을 감수하는 연구 분위기를 적극 장려할 것을 제안했다.
◆ 한국 과학 인류기여 마인드 충분한가?
A 교수는 "일본은 2020년까지 20개의 노벨상을 받는다는 국가 목표를 조기 달성했지만 이는 이미 1917년 세계 최고 수준의 이과학연구소(리켄·RIKEN)를 세워 오랜동안 체계적으로 준비해온 덕분"이라며 단순 비교를 경계했다. 더구나 최근 노벨상은 사회적 기여도가 확실해진 연구에 주는 추세여서 오래 기다려야 한다. 과학저널 최근 '네이처'는 노벨상 수상까지 걸리는 시간이 1960년대에 비해 두 배 이상 늘었다는 분석 논문을 인용하면서 수상자의 거의 절반이 연구업적을 내고 20년을 기다려야 했다고 보도했다.
이런 점에서 메신저리보핵산(mRNA) 연구로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커털린 커리코 독일 바이오엔테크 수석부사장은 좋은 모델이다. 그는 '불굴의 이단아'로 불렸다. 1990년 펜실베이니아대에서 mRNA 기반으로 유전자 치료제 연구를 시작했지만 이렇다할 연구 결과를 내놓지 못해 연구비 지원이 끊기고 교수 타이틀을 뺏았겼다. 그럼에도 여러 대학을 전전하면서도 mRNA 연구를 놓지 않았다. mRNA 활용기술이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백신에 활용되면서 빛을 보게 됐다.
A 교수도 "우리가 노벨상의 취지처럼 인류에 기여하는 과학적 성과를 축적해왔는지 돌아보는 기회가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부출연연구기관의 한 연구자는 "연구 프로젝트 따기 바쁜 상황이고 탁월한 연구자들도 한 우물을 파기 어렵다. 그러다 보면 곰탕 대신 라면을 끓여야 하고 정부 관료들의 성과 압박까지 겹치면 이직을 고려한다"고 전했다.
B 총장은 9일 대덕넷과의 통화에서 "지금같이 유행만 추종하는 과학기술정책 환경에서 노벨상은 요원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조언했다.
◆ 과학의 경제부강 기여도 평가해야
과학자들은 "노벨상은 노벨상"이라고 말했다. 다른 여러 상들이 생겨났지만 노벨상의 가치와 권위는 여전하다는 것이다. 정부도 2011년 기초과학연구원(IBS)을 설립해 노벨상에 부합하는 세계적 수준의 기초과학 연구에 투자하고 있다.
하지만 노벨상을 받지 못했다고 한국 과학계를 과도하게 비판하는 것은 단견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서구의 과학이 기초과학연구에 기반해 노벨상으로 이어진 반면 우리의 과학은 압축성장의 계기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C 교수는 "우리에게 최초가 꽤 많다. MP3가 처음이었고, DMB 개발도 빨랐다. 다들 이를 상업적으로 활용하는데 그쳤다고 비판하는데 그런 방법으로 경제적 풍요를 이룬 것 또한 평가해 줘야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는 "러시아는 노벨상 수상자를 많이 배출했는데도 경제력이나 기술 발전으로 연결시키지 못했다"며 "노벨상이 그 나라 과학기술력이나 경제력 등을 좌우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입증한 셈"이라고 곁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