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선도사서와 요하문명시기가 일치한다
‘홍산문화, 중국은 없으나 우리는 사료가 있다'
'그럼에도 연구 안한다 바보같은 짓 아니냐’
‘강단고고학은 홍산문화 연구를 권장하지도 않고 우리와 상관없는 제3의 문화라고 한다’
‘내몽골지역 우하량 지역에서 나온 여신사당은 마고삼신형식을 구현하고 있다’
‘우리선도문화는 '기氣' 문화로 통한다'
'기를 상징하는 문양은 여러 가지로 곳곳에 새겨져 있다’
중국에서는 요서 내몽골 지역에서 발굴되는 유물, 유적을 종합하여 요하문명이라고 한다. 우리에게는 홍산문화로 통상 더 알려져 있다. 또 요하문명을 우리식으로 발해문명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 지역 문명(이하 발해문명)이 중국학계의 해석과는 달리 우리 정통 고유문화라는 풀이가 있어 큰 관심을 끌고 있다. 서기2017.12.11. 서울 도곡동에 위치한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유라시안네트워크(이사장 이민화 카이스트 교수)이 주최한 정기시민강좌에서 이 같은 주장이 왔다. 이날 강연을 맡은 뇌교육대학원 대학교 정경희 교수는 발해문명은 중국 것이 아니라 우리와 더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국내 강단주류학계가 위서로 치부하는 선도사서에서 말하는 것들과 발해문명권에서 나오는 유물, 유적을 비교해 보면 이 문명이 어느 나라 것인지 분명해 진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중국은 소위 소하서, 흥륭와, 조보구, 소하연, 하가점상하층 문화로 대표되는 발해문명을 설명해 줄 사료 등 문헌이 전무하다고 한다. 반면에 우리는 징심록의 부도지, 한단고기, 규원사화 등 선도사서가 있어 이 문명의 비밀을 풀어주는 열쇠 같은 것으로 정 교수는 보았다.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정 교수는 중국이 왜 이 지역을 파헤쳐서 홍보에 열을 올리는 지 이유를 설명했다. 중국 역사로 편입하고 나아가서 이 문명에서 가치쳐 나간 역사문화도 모두 중국 것으로 만들려는 음모라고 풀이했다. 중국에서는 이를 하상주단대공정, 중화문명탐원공정, 선전공정 등의 이름으로 추진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에게는 흔히 동북공정으로 알려져 있다. 서기2016. 부터는 이 공정을 끝내고 결과를 국내외로 선전하는 공정에 착수했다고 보았다. 한국항공대학교 우실하 교수가 소개한 것과 같다. 우실하 교수도 지금 동북공정단계는 선전공정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본다. 정 교수는 우리민족과 더 친한 동이족으로 알려진 치우를 중국은 이미 서기1990년대에 중화 삼조당을 건립해서 중국인 조상으로 만들어 놨다고 한다.
중국은 이 발해문명이 신석기에서 시작해서 동석병용기를 거쳐 초기 청동기 문화로 끝을 맺는다고 분석한다. 신석기는 가장 이른 시기가 소하서 문화인데 서기전7천2백년에서 서기전 6천5년으로 편년한다. 이어 흥륭와 문화, 사해문화, 부하문화, 마지막으로 조보구 문화로 끝을 맺는다. 조보구 문화는 서기전5천년에서 서기전 4천4백년이라고 본다. 이어 동석병용기가 시작되는데 서기전4천5백년이라고 한다. 홍산 문화가 이에 해당한다. 이 시기는 홍산문화를 거쳐 서기전 3천년에서 서기전 2천년으로 끝을 맺는데 소하연 문화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초기청동기시대는 하가점 하층문화로써 서기전 2천년에서 서기전1천5백년 사이에 존재한 것으로 본다.
정 교수는 이어 중국의 이러한 공정에는 우리역사문화를 송두리째 빼앗아 가는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중국은 홍산 문화를 중국 상나라 이전 문화로 보며 주인공이 중국 시조, 황제 족이라고 한다고 했다. 이 홍산문화에서 우리역사가 시작되었다고 왜곡, 날조하는데 중국인 기자조선이 출발점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어 위만조선, 한사군 그리고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로 이어지는 역사를 그리고 있다고 했다. 이러한 역사상은 조선총독부가 만들어 놓은 일제식민주의 사관이며 이를 국내강단주류식민사학계가 잇고 있다는 것이 민족사학계의 중론이다. 북한을 중국 땅이라고 그린 동북아역사재단의 동북아역사지도집이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라는 분석이다.
그러나 정 교수는 이러한 역사상을 선도 사서를 들어 깼다. 우리 역사는 제천문화 또는 선도 仙道문화가 뿌리를 이루는데 홍산 문화는 한웅천왕의 신시 배달국문화로써 한웅족과 웅족이 결합한 문화라고 보았다. 이어 전조선, 후조선 그리고 부여로 우리역사가 진행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우리 고유사상으로써 한국선도 양상을 그려나갔다. 선도는 기철학으로써 한 사상, 삼원사상, 홍익사상이 있고, 신선사상, 제천문화로써 천인합일, 신인합일, 인내천, 풍류로써 기악, 가무, 무사도, 무속으로써 샤머니즘, 민족종교로써 하느님, 천신신앙, 마고삼신 신앙, 북두칠성 신앙, 태양, 일월신상을 아우른다고 밝혔다. 이어 한국문화 변천 과정을 밝혔다. 맨 처음 선도문화가 고유문화로 자리 잡았는데 후대에 불교문화, 유교문화 그리고 서양문화가 들어와서 정착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날 정 교수는 선도사서와 발해문명을 연계시킨 새로운 분석을 내놔 큰 관심을 끌었다. 선도사서에 나타나는 각 시기와 발해문명권에서 나타나는 문화의 각 시기가 거의 일치한다는 것이다. 부도지의 황궁씨, 유인씨, 한인씨 시기는 한단고기에서 한국이고 규원사화에서는 조화기로써 조판기에 해당한다고 했다. 요서지역 발해문명은 이 시기에 소하서, 흥륭화, 조보구 문화가 일어난 것으로 분석된다고 했다. 또 부도지의 한웅씨 시기는 한단고기에서는 배달국이고 규원사화에서는 교화기로서 태시기에 해당한다. 정 교수는 발해문명은 이시기 홍산문화 전기, 후기 및 소하연 문화시기라고 밝혔다. 이어 부도지의 임검씨, 부루씨, 읍루씨는 한단고기에서는 단군조선이고 규원사화에서는 치화기로써 단군기라고 했다. 발해문명에서 이 시기는 하가점 상, 하층문화, 위영자 문화, 십이대영자 문화로 분석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상세한 년대 비교 자료를 제시하며 이 같은 분석이 객관성을 띄고 있음을 거듭 밝혔다.
특히 정 교수가 이날 밝힌 것 중에는 우하량 지역에서 나온 여신묘 사당 해석이 있는데 방청객의 탄성을 자아냈다. 여신사당은 십자형을 띠고 있다. 십자가 교차하는 중앙에 가장 작은 등신대, 여신의 3배 크기 여신이 안치되어 있다. 그리고 이 주 여신을 등신대 4개가 호위하듯이 둘러싸고 있다. 또한 가로축 좌우로 등신대 2배가 되는 여신이 한 개 씩 포진해 있다.
정 교수는 이것을 부도지의 마고와 그의 딸 궁희, 소희 그리고 이들의 자녀인 4천녀 4천인으로 연결시켰다. 여신사당의 가장 큰 주 여신은 마고에 해당하고, 등신대 2배 크기의 둘 여신은 궁희, 소희에 해당하고, 4개의 등신대 여신은 천녀천인을 한 덩어리로 한 천녀 천신으로 본 것이다. 우연인지는 모르나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억지 해석이라기보다는 무리 없는 분석이라는 것이 더 설득력 있다는 평이다.
정 교수는 이어 발해문명권에서 나타나는 여신상 변화 흐름도 보여주어 흥미를 끌었다. 서기전 6천년경의 흥륭와 문화나 서기전 5천년경 조보구 문화시기에 보이는 여신상은 대체적으로 입상으로 손을 마주잡고 가슴 부위에 얹은 모습을 하고 있다. 또한 분명히 여신인데 머리에 상투를 튼 모습을 하고 있는 상도 있다. 그러나 홍산 문화시기에 오면 연신상이 조금씩 변하는데 기존 여신상을 계승하면서 앉아있는 상이 주를 이룬다. 또 이 시기에는 남신상도 나타난다. 특히 이 신상들은 무엇을 하는 행위인지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입을 벌리고 있고 손은 아랫배 단전에 갖다 대고 있으며 반가부좌 자세를 틀고 있다. 또한 앞선 여신상 포함 머리 정수리에 구멍이 뚫려 있거나 이마 정중앙에 의도를 가지고 새긴 어떤 것이 보인다. 이러한 것은 선도 수행하는 모습이라고 정교수는 보았다. 특히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은 소리를 내서 수행하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고 했다.
정 교수는 이날 신상이 보여주는 반가부좌 자세는 우리민족에게서만 나타나는 좌법이라고 일갈했다. 중국 문화가 결코 아니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러면서 남송시기 공자 상을 만든 사례를 증거로 제시했다. 당시 백록동 서원을 만들면서 공자 상을 만들어 안치하려고 했다. 그런데 공자가 반가부좌 자세를 튼 모습으로 만들었다. 이에 주자는 이것은 중국 전통좌법이 아닌데 어떻게 이민족의 좌법으로 상을 만들었냐며 꾸짖었다고 한다. 정 교수는 이 사례를 보더라도 중국은 반가부좌 자세가 원래 없었다고 단언했다. 그런데 요서지역 발해문명을 발굴하면서 이제는 반가부좌법도 중국 것이라고 선언했다며 씁쓸해 했다. 방청객에서도 어처구니없다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날 정교수는 세 명의 여신이 서로 꼭 껴안고 있는 소조상도 소개했다. 그는 이 신상을 1기 3기라고 하며 하느님, 삼신, 마고삼신이라고 해석했다. 이 신상은 중국 조양시 덕보 박물관에서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항공대학교 우실하 교수도 이 신상과 같은 다른 삼신상을 여러 강연에서 소개한 바 있다. 우 교수는 중국에서는 이 신상을 풍년을 기원하며 춤을 추는 여신으로 본다고 소개했다. 마고삼신이라는 개념으로 해석하는 우리 눈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나체상태라는 점에서 원시성, 시원성을 띄고 있다. 이 여삼신상은 한단고기에 흔히 등장하는 삼신일체 하나님을 형상화 한 것이라고도 풀이된다. 하나이면서 셋이고 셋이면서 하나인 개념으로 흔히 회자된다. 3.1절도 이러한 사상에서 나왔다는 것은 우리 철학사상을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는 상식으로 통할 정도다.
이어 정 교수는 중국은 발해문명을 해석할 문헌이 하나도 없는 반면에 우리는 이렇게 발해문명을 얼마든지 풀어 줄 수 있는 문헌사료가 넘치고 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강단주류학계는 이런 선도 사료를 위서니 조작되었다느니 하며 내팽개치고 외면하고 있다면서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주류학계가 하는 짓이 바보 같은 것 아니냐” 면서 강단주류학계가 보이는 행태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에 방청객에서도 정 교수의 분노에 호응했다. 이날 정 교수는 강연을 쉬지 않고 2시간을 이어갔다. 시간이 부족해서 다 하지 못할 정도로 열정으로 가득했다.
다만 몇 가지는 의문을 남겼다. 정 교수는 선도에서 말하는 인간상을 말하면서 생각과 마음이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생각과 마음이라는 것은 불교에서도 이미 상식으로 통하듯이 분리할 수 없는 한 덩어리다. 동전의 양면이다. 그래서 생각의 다발이 마음이라고 한다. 생각이 곧 마음이라는 뜻이다.
또 선도와 무당=굿을 전혀 다른 것으로 보았다. 무당=굿은 샤머니즘으로써 인류역사가 전개된 이래 한 공동체를 이끄는 우두머리이고 중심이었고 정신세계를 담당했다. 샤머니즘이 인류신앙과 종교의 원천이고 뿌리라고 한다. 샤머니즘을 연구하는 세계 학자들의 이구동성이다. 선도도 이 무당에서 나왔다는 말이다. 더구나 포박자를 보면 중국시조, 황제黃帝가 청구에 이르러 풍산을 지나 자부선생을 뵙고 삼황내문을 받았는데 만신을 부렸다고 한다. 여기서 만신을 부렸다는 것은 전형적인 무당을 말한다. 지금도 무당을 만신이라고 한다. 만 가지 신과 접하는 존재가 무당이다. 그런데 자부선생은 선인의 대표 격이다. 선도를 하는 선인이라는 소리다. 그에게서 수련한 중국시조 황제가 무당이라는 소리는 자부선생도 무당이었다는 말이다.
또한 한단고기 삼성기전을 보면 한웅천왕이 마지막으로 약을 먹고 선인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신명神命을 부렸다고 한다. 신명을 부렸다는 말도 신을 부렸다는 것이고 이는 접신했다는 말도 된다. 불교에서 석가무니 부처라고 한다. 여기서 ‘무니’는 접신했다는 말이다. 불교도 선도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사실은 그 비조가 접신한 무당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규원사화에서는 한웅천왕을 호국백두악 태백선인이라고 한다. 이런 태백선인이 신명을 부린다는 것은 그가 무당도 된다는 소리다.
수운 최제우가 밝힌 동학도 하느님 신과 대화하고 주문을 외우는 등 무속 냄새가 분명히 나는데 정 교수는 동학을 선도로 보기도 했다. 더구나 상고시기 한반도는 물론 만주, 요령지역에서 발굴되는 무구巫具다. 청동거울, 청동방울, 청동검이다. 대체적으로 이 무구는 한 덩어리로 발견된다. 지금도 무당들은 죽을 때 이런 무구를 땅에 묻는다. 나중에 영험한 입문무당이 캐내는데 업이라고 한다. 지금도 무당은 이 세 개 무구를 중심으로 굿을 한다. 상징하는 바는 이미 알려진 것과 대송소이하다. 그런데 정 교수는 이것이 무당과 상관없는 선도에서 쓰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또 ‘홍익인간’은 홍익과 인간으로 분리될 수 없는 한 덩어리로 역사에 등장한다. 떼어 낼 수 없는 성질이다. ‘홍익인간’ 사상이라고 흔히 말한다. 그런데 정 교수는 ‘홍익’만 따로 분리해서 사용하는 것이 자주 눈에 띠었다. ‘홍익’사상, ‘홍익’정신이 한 사례다. 이는 정 교수가 속한 단체의 특정인 이론을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을 받는다.
이런 점을 제외하면 이날 강연은 중국이 자신들의 뿌리라고 주장하는 발해문명이 사실은 우리 것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뒤풀이에서도 정 교수의 열강을 찬탄하는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질문도 쉴틈없이 이어졌다. 사납게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이날 강연장은 방청객으로 거의 꽉 찼다. 이날 이민화 이사장은 인사말을 통해서 정 교수가 발굴해낸 선도사상과 발해문명과의 연계성은 지금까지 누구도 해내지 못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가장 정교하고 완성도가 높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정교수를 강사로 초빙했다고 소감을 피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