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금동대항로 발굴 30년을 경축하여
1500년 잠에서 깨어난 백제 예술의 극치이자 정수, 국보 중의 국보로 꼽히는 ‘금동대향로’가 12일 발굴 30주년을 맞는다. 1000년이 넘는 시간 진흙 속에 묻혀 있었음에도 흠집 하나, 녹 하나 없던 금동대향로는 완벽한 정형성과 뛰어난 예술성으로, 또 백제 장인의 예술혼과 기술력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발굴 30주년을 기념해 국립부여박물관은 2024년 2월 12일까지 특별전 ‘백제 금동대향로 3.0-향을 사르다’를 연다.
1. 1500년 잠을 깨다
금동대향로가 오랜 잠에서 깨어난건 우연한 기회에서 비롯됐다. 1990년대 초 부여 왕릉원(충남 부여 능산
리 고분군)을 찾는 관광객이 늘자 부여군 등은 주변에 주차장 조성을 위해 정비 작업에 착수했다.
1992년 12월 4일부터 이듬해 1월 7일까지 이뤄진 시굴 조사에서 건물 주춧돌 일부와 기와, 토기 조각 등이 나왔지만 결정적인 유물·유구는 나오지 않아 예정대로 공사가 진행될 형편이었다. 당시 국립부여박물관장이었던 신광섭 전 백제문화제재단 대표이사가 제대로 발굴해야 한다고 강하게 요청했고 1993년 10월 국립부여박물관을 중심으로 한 2차 조사가 이뤄졌다. 그 결과 금속품과 유리구슬 등을 만든 것으로 추정하는 공방 터에 있던 타원형 아궁이에서 뚜껑과 몸체가 분리된 향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우여곡절 끝에 발견된 향로는 세간의 관심을 크게 받았다. 약 10일 간의 긴급 보존 처리를 마친 뒤 그해 12
월 22일 열린 현장 설명회 이후 ‘백제의 예술혼’, ‘동북아 최고 걸작’ 등의 수식어가 붙었다. 학계에서는 백제 문화의 정수가 담긴 유물, 볼수록 신비한 작품이라는 평가까지 나왔고 1994년 4월 19일 국립중앙박물관에 향로가 전시되자 약 2주 동안 국내외에서 6만 8000여 명이 박물관을 찾았을 정도다.
2. 용이 연꽃 봉오리를 물다
금동대향로는 높이 61.8㎝, 무게 11.8㎏의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작(大作)이다. 앞발을 치켜든 용 한 마리가 막 피어날 듯한 연꽃 봉오리를 물고 있는 듯한 형상이다.
향로의 뚜껑은 중첩된 형태의 산악으로 묘사됐고 그 위에는 날개를 활짝 편 채 정면을 응시하는 한 마리의 봉황이 보주 위에 서 있다. 봉황 아래에는 5명의 악사가 각각 금과 완함, 동고, 종적, 소 등의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이 실감 나게 표현됐다.
향로의 뚜껑에 장식된 박산은 불로장생의 신선들이 살고 있다는 삼신산을 상징적으로 표현했고 신선을 상징하는 듯한 각종 인물, 동물 산수를 비롯해 상상의 동물도 등장한다.
반구형 대접모양을 한 몸체는 3단의 연판을 배치했다. 각 연판 안으로 물고 기와 신조, 신수 등을 한 마리씩 도드라지게 부조했고 그 아래에는 용틀임하는 용이 떠받치고 있다.
금동대향로는 중국 한나라 때 유행한 ‘박산향로’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견해가 많으나 섬세한 공예 기술과 조형성, 창의성은 비슷한 사례를 찾기 어렵다. 이 향로는 중국 한 대 이후의 박산향로의 전통과 도상을 계승하면서도 오랜 시차를 두고 백제에서 출현하면서 시대적인 변화와 백제적인 요소가 더욱 가미됐다.
천상계를 의미하는 정상에는 양을 대표하는 봉황을 두고 그 아래 뚜껑에는 지상의 동물과 인물상(신선), 그 밑 몸체에는 연꽃을 중심으로 수중생물이나 물과 관련된 동물, 제일 아래쪽에는 음을 대표하는 용을 배치한 것으로 음양사상을 기본으로 한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또 전체형상이 용의 입에서 나온 기운으로 연꽃봉오리가 만들어지며 이 연꽃봉오리 속에서 모든 도상이 형성되는 것이 불교의 연화화생을 의미하며 이것을 연화장 세계 또는 수미산으로 보는 견해도 제시된 바 있다.
아울러 금동대향로가 출토된 절터가 일반적인 수행 사찰이 아니고 백제왕실에서 제사를 지낼 때 사용됐다는 점에서 백제 왕실의 사상관이 담겼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1. 조길상, "1500년 잠에서 깨어난 백제 예술의 극치", 금강일보, 2-23.12.12일자. 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