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임학의 대부이자 산림녹화의 선구자인 향산 현신규 박사의 생애와 업적
향산(香山) 현신규(玄信圭)는 음력 1911년 12월 9일 평안남도 안주군에서 당시 안주군 서기로 근무하던 아버지 현도철(玄道澈, 1869. 9. 22 ~ ?)과 어머니 경주 김씨 김응선(金應善)의 딸 사이의 5남 2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현도철은 평양 지역의 유학자로, 1902년부터 1903년까지 종9품 숭령전 참봉, 1905년부터 1906년까지 평양군 향장(鄕長), 1906년부터 1908년까지 평양군 주사(主事), 1910년부터 1912년까지 안주군 서기를 역임했다. 한편, 일제 말 애국계몽운동에 관심을 가져 1907년 애국계몽운동 단체인 대한자강회평양군지회에 회원으로 가입했고, 같은 해 서우학회에도 회원으로 가입했다. 1909년에는 서북학회에 회원으로 가입했다. 경술국치 이후에는 지역 유지로 있다가 1927년 11월 안주금융조합 정상화를 위한 전형위원(銓衡委員)에 선임되었다.
그는 일본 릿쿄대학 철학과에 유학을 다녀온 맏형 현인규(玄仁圭)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철학자를 꿈꾸었다. 휘문고보 시절 우수한 성적을 유지하였고 졸업 후에는 일본 야마구치고등학교에 입학원서를 내기도 하였으나 가세가 기울어 일본 유학을 보낼 수 없었던 아버지의 지시로, 1930년 수원고등농림학교 임학과에 입학했다.
꿈이 좌절되어 1년간 방황하던 그는 일본의 사상가이자 종교가인 우치무라 칸조(內村鑑三)의 전집을 읽다가 '어떻게 하면 나의 천직을 알 수 있을까?'라는 글을 읽은 것을 계기로 임업이라는 학문에 전념하게 되었다.
수원고등농림학교에서 만나 의형제를 맺은 정희섭의 재정적 도움을 받아 1933년 수원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규슈제국대학 농학부 임학과에 진학하였고, 1936년 졸업하면서 당시 조선 유일의 임업관련 연구기관이었던 조선총독부 임업시험장에 촉탁으로 취직하였다. 1937년부터 기수(技手)로 정식 직원이 되었다. 이곳에 근무 중 50여명의 학자로 구성된 조사대의 일원으로 백두산 생태조사에 참여하였다.
1943년 규슈제국대학 대학원에 입학하여 연구하다가 1945년 태평양 전쟁의 막바지 분위기 속에 어쩔 수 없이 연구를 중단하고 귀국하여 모교인 수원농림전문학교에 조교수로 부임하였다.
해방 후 미군정청의 요청으로 임업시험장을 재건하였고, 수원농림전문학교가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으로 개편됨에 따라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이즈음 규슈대학에서 수행했던 연구 결과를 틈틈이 지도교수였던 사토 케이치(佐藤敬二) 교수에게 보냈는데, 이것이 학위논문으로 인정되어 1949년 7월 한국인 최초의 임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게 되었다.
1951년 미 정부의 전후 재건 계획에 따라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캠퍼스에 파견되어 산림유전학을 연구하였다. 1954년 4월 6일 대한민국 학술원 자연 제5분과 회원에 선출되었다.
1959년 대한민국 학술원 학술공로상을 수여받았고, 1963년부터 1965년까지 제2대 농촌진흥청장을 역임하였다. 1976년에는 5.16 민족상 학예부 본상을 수여받았다.
향산(香山) 현신규(玄信圭)는1986년 11월 21일 경기도 수원시 신풍동 자택에서 별세했다.
<참고문헌>
1. “향산(香山) 현신규(玄信圭)”, 나무위키, 2024.4.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