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걸 좀 보세요. 작은 할아버지께서는 사진기를 바라보지도 못한 채 손으로 눈물을 닦고 계십니다. 감격을 주체할 수 없으셨던 것이죠.”
이종찬(88) 광복회장(전 국정원장)이 서울 여의도 광복회관에서 벽에 걸린 사진을 가리켰다. 1945년 10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이 꿈에 그리던 고국에 돌아오기 직전 중국 상하이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 가운데 화환을 목에 걸고 있는 인물이 김구(1876~1949) 임정 주석이고, 오른쪽에서 울고 있는 중절모 쓴 노인은 이종찬의 종조부로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 되는 성재 이시영(1869~1953)이다. 맨 왼쪽엔 우사 김규식의 모습도 보인다.
◇임정 요인들 앞에서 태극기 든 소년
해방 직후 귀국을 앞둔 독립운동가들의 감격이 고스란히 드러난 이 사진은 이종찬 회장이 고이 간직하고 있는 ‘보물’ 중 하나다. 김구 바로 앞에서 태극기를 들고 서 있는 소년이 바로 아홉 살 이종찬이기 때문이다. ‘새 나라의 어린이’ 이종찬은 그 격동기의 흥분과 설렘을 가득 안고 성장했다.
미수(米壽)를 맞은 이종찬 광복회장의 삶은 그대로 한국 현대사의 일부분이나 다름없다. 제5공화국 시절 여당인 민주정의당(민정당)의 원내총무와 사무총장을 지냈고, 3당 합당 이후 1992년 대선 직전 후보 자리를 놓고 김영삼과 경쟁했으며,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가 된 뒤 1997년 대선기획본부장을 맡아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에 기여했다. 이듬해 안기부장에 임명돼 1999년 국가정보원으로 개편했다. 1980~1990년대 정치사의 중심에 있었던 그는 지난해 5월 광복회장으로 선출돼 여전히 ‘현역’으로서 공직 활동을 하고 있다.
여야 어느 쪽에 있든 이 회장은 ‘말이 통하는 합리적인 사람’이라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논리적인 성향과 정치적 뚝심, 사람됨과 업무 능력이 큰 역할을 했지만 독립운동 집안이라는 점도 한몫했다. 그의 할아버지는 망국 직후 만주로 건너가 전 재산을 털어 신흥무관학교 등 항일운동 기지를 건설한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1867~1932)이었고, 이회영의 동생이 이시영이었다. 어려서 본 작은 할아버지 이시영은 “무척 인자하면서도 단호하고, 역사에 대해서 대단히 해박하셨던 분”이었다.
◇이승만은 ‘카리스마’, 김구는 ‘우람한 산’
민정당 원내대표 시절인 1983년, 그는 이시영의 서거 30주년을 맞아 동상 건립을 추진했다. 당시 동상 사진과 건립추진위원회의 명단이 적힌 대형 패널 역시 그는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여기 보시면 윤보선 전 대통령이 명예위원장을 맡으셨던 걸 알 수 있습니다. 최규하 전 대통령, 진의종 국무총리, 유치송 민한당 총재는 고문이셨죠.” 지팡이를 내려놓은 채 의자에 앉아 한 손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이 전 부통령의 동상을 서울 남산 자락에 세웠는데, 거기엔 속뜻이 있었다.
그 동상 맞은편에 1969년 건립된 백범 김구 동상이 있었던 것. “백범 동상은 팔을 높이 뻗어 ‘저 38선을 넘어 남북 협상을 하겠다’고 말하는 듯한 모습이에요. 그런데 맞은편의 성재 동상은 넌지시 손을 들고 ‘백범, 가면 안 되오! 저들에게 속는 거요, 제발 내 말을 들으시오’라고 만류하는 형상으로 만들었죠.” 이것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 표현이었고, 이시영은 정부 수립 전후로 틀어진 백범과 우남(이승만) 사이에서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 애를 썼다고 한다. 그러나 한양도성 정비 사업 때문에 이시영 동상이 원래 위치에서 조금 이전하면서 아쉽게도 이런 의미가 퇴색됐다는 것이다.
이 회장은 “나처럼 우남과 백범 두 분을 모두 만나본 사람은 이제 거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본 이승만은 대단한 카리스마를 지닌 현명한 인물이었고, 김구는 크고 우람한 산 앞에 선 기분을 느끼게 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그는 최근의 이승만 재평가 움직임에 대해 “좋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백범을 폄훼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마지막 단계를 제외하고 두 분은 항상 나라를 위해 협력했습니다. 두 분 모두 우파의 소중한 자산인데 한 분을 낮춰서는 안 될 일이죠.” 이승만기념관을 세우더라도 이승만의 ‘공(功) 8, 과(過) 2′ 중에서 ‘2′를 놓치면 곤란하다고 했다.
◇전두환을 설득, 김재규에게 ‘월남 포로’를 묻다
이 회장은 5공 전반기의 ‘실세’였다. 그는 이렇게 털어놨다. “나는 하나회도 뭣도 아니었어요. (5공에 참여했던 건) 쓰라린 역사의 한 토막이었습니다.”
경기고와 육사를 졸업하고 소령으로 예편한 그는 1979년 10·26 사태 때 중앙정보부(중정) 부국장이었다. 대통령을 저격한 범인이 김재규 중정부장이라는 걸 듣고 ‘아, 월남!’이라며 경악했다고 한다. 1975년 월남(남베트남) 패망 뒤 베트남 감옥에 갇혀 있던 이대용 공사 등 한국인 3명의 구출 시도가 무산될 판이었기 때문이다. 이종찬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찾아가 ‘김재규를 면회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잘못하면 그들이 북한으로 끌려갈 수도 있습니다!” 이종찬과 만난 김재규 입에서 뜻밖의 얘기가 나왔다. “사실은… 이스라엘의 모사드가 중간에 개입돼 있소.” 공작의 전모를 파악한 이종찬의 노력에 힘입어 세 한국인은 풀려날 수 있었다.
전두환은 이때 이종찬의 빈틈없는 일 처리에 감탄한 것 같았다. 1980년 4월 전두환이 중정부장 서리에 취임하면서 이종찬은 중정 총무국장으로 승진했다. 이 회장은 인터뷰 중 ‘대외비(對外秘)’라는 도장이 찍힌 옛 문서 하나를 기자에게 내밀었다. 처음으로 공개한다는 당시 전두환의 취임사로, 이종찬이 원안을 쓴 글이었다. ‘부장직을 역임했던 인사 중에는 현재 국외에서 매국적 작태를 서슴지 않고 있는 자(김형욱), 자국의 국가원수를 시해함으로써 대역죄를 범한 자(김재규)등이 있음으로써…'라며 서슬 퍼런 엄포를 놓은 취임사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란의 사바크(팔레비 시대의 국가치안정보국)가 되지 말고 이스라엘의 모사드가 되자”는 말도 있었다. 정보기관이 국내 정치에 개입하는 잘못된 풍토를 일신하고 정보 수집이라는 본연의 업무로 돌아가자는 이종찬의 염원이 반영됐던 것이다. “하지만 다음 해 중정이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로 바뀌고 난 뒤 다시 옛날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참 속상한 일이죠.”
민정당 창당 업무를 맡는 등 중용(重用)된 이종찬은 야당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의견을 수렴하려 애썼다. “지금 여야 관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그 결과 야당 돌풍이 불던 1985년 12대 총선에서도 서울 종로·중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학원안정법을 반대하다 원내총무직을 내놓고 ‘실세’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는 “전두환에게 충성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일했을 뿐”이라고 했다.
정치 인생 중 가장 보람된 일에 대해 이 회장은 “1997년 15대 대선에서 이겨 첫 수평적 정권 교체를 이뤄낸 것”이라고 했다. 1992년 대선 직후 정계 은퇴를 선언한 김대중이 갑자기 만나자고 해서 가 봤더니 ‘당신이 YS를 아느냐? 반드시 보복을 할 테니 빨리 해외로 나가는 게 좋겠다’고 권했다. 깜짝 놀라 부랴부랴 비행기를 탄 뒤에 영국에서 다시 DJ와 만났는데, 이것이 인연이 돼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에 기여하고 대선을 총괄했다.
이 회장은 “나는 집을 짓거나 새롭게 바꾸는 전문가”라고 했다. 지금까지 민정당, 국민회의, 국정원을 창립하거나 조직 쇄신을 하는 일을 줄곧 맡아 왔다는 것이다. 취임 10개월이 된 광복회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바로 세웠고, 대한민국에서 제일 앞서가는 기관이 되도록 쇄신하는 중”이라고 했다.
<참고문헌>
1. 유석재, "나의 현대사 보물 44, 광복회장 이종찬", 조선일보, 2024.3.19일자. ㅁ18a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