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6년생 남이흥이라는 조선 사람이 있습니다. 조선 중기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장군이었대요. 그런데 그와 같은 세대였을 조선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 저절로 한숨이 나옵니다. 이들은 10대 소년 시절에 임진왜란(1592~1598)을 겪었고, 40대에는 이괄의 난(1624), 50대엔 정묘호란(1627), 그리고 이 모든 전란에서 살아남았다면 환갑 무렵 병자호란(1636~1637)의 참상을 겪었을 테니 말입니다. 평생을 난리 통에서 산 세대죠. ‘헬조선’이란 말이 정말 어울리는 시대는 이때였을 것입니다.
남이흥(1576~1627) 장군의 탄신제가 문화재청이 공모한 ‘국가 유산 호국선열(護國先烈·나라를 지키려 싸우다 앞서간 열사) 기념행사 지원 사업’ 중 하나로 선정됐다는 뉴스가 나왔어요. 남이흥 탄신제를 진행해 온 충남 당진시는 국가 지원을 통해 행사를 더 풍성하게 열 수 있겠다고 기대하고 있다네요. 남 장군을 따라 험난했던 조선 역사의 한 대목으로 떠나보겠습니다.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부친의 뒤를 잇다
1592년(선조 25년)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한 임진왜란이 일어났어요. 수도인 한양의 주변 도로에 피란민들이 몰려들었는데, 돌연 이들의 재물을 빼앗으려는 도적 떼가 나타났습니다. 모두 혼비백산한 상황에서 기골이 장대한 한 소년이 겁도 없이 말을 달려 앞으로 나서더니 도적을 향해 호통을 쳤어요. 도적들은 그걸 보고 놀라 달아났다고 합니다. 이 소년이 남이흥이었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1598년에 22세 청년 남이흥은 ‘무과 시험을 봐 무관이 되겠다’고 결심합니다. 나주목사(오늘날 시장과 비슷한 관직)였던 부친 남유가 당시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과 함께 적군을 격파하는 공훈을 세우고 전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전투는 바로 임진왜란의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이었습니다. 그는 ‘부친의 뒤를 잇겠다’는 생각에 글공부 대신 말타기와 활쏘기에 몰두했다고 합니다.
1602년 26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한 남이흥은 선전관, 포도대장, 구성부사, 안주목사, 평안도 병마절도사 등의 직책을 거쳤습니다. 여러 고을에서 관리들의 학정을 뿌리 뽑아 백성의 칭송을 받았고, 변방의 방비를 튼튼히 해서 임금과 조정의 찬사도 얻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이후 혼란한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공을 세운 것이죠. 1617년(광해군 9년) 진주목사로 있으면서 임진왜란 때 불탄 촉석루와 북장대를 다시 세우는 등 진주성을 중수(건축물의 낡고 헌 것을 손질해 고침)하는 업적도 세웠습니다.
‘화학전’에 ‘심리전’도… 처절한 반란 진압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났습니다. 광해군이 임금 자리에서 쫓겨나고 인조가 새 왕에 올랐습니다. 광해군의 신임을 받던 남이흥은 위험한 지경에 처했습니다. 당시 후금(나중에 청나라로 이름을 바꾸고 병자호란을 일으켜요)의 침입을 막기 위해 장만(1566~1629)이 도원수(전쟁 때 군무를 통괄하던 벼슬)에 임명됐습니다. 남이흥은 장만의 휘하로 들어가게 되고, 장만은 그의 인품과 능력을 인정해 그를 정치적 공격에서 보호해 줬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조반정 다음 해인 1624년에 또다시 커다란 변란인 ‘이괄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소규모의 반란이 아니라 나라 전체를 뒤흔든 전란이었습니다. 조선왕조 500년을 통틀어 임금이 한양 도성을 버리고 달아난 적이 네 번 있었는데,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그리고 이괄의 난이었습니다. 이괄(1587~1624)은 인조반정의 공신으로서 신임을 얻고 있었으며, 도원수 다음가는 부원수로 임명돼 북방에서 주력 부대를 이끌던 사람입니다.
최근 ‘러시아판 이괄’이라는 말이 나왔죠. 지난해 러시아에서 민간 군사 기업 바그너 그룹이 군사정변을 일으킬 때 그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을 이렇게 부르는 사람도 있던 것입니다. 이괄은 임진왜란 때 귀순한 일본인 병력인 ‘항왜’를 많이 거느리고 있었어요. 이들을 지금의 용병 같은 존재로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조정 내 권력 다툼 과정에서 반역을 꾀했다는 모반죄로 몰리자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프리고진도 최고 권력자의 측근이었고, 정예 부대인 용병을 거느린 인물이, 권력 싸움에서 밀리자 반란을 도모했다는 점에서 이괄과 비슷하죠.
그러나 프리고진이 모스크바를 위협한 데서 그쳤던 것과는 달리, 이괄은 실제로 한양 도성을 점령했습니다. 이때 반란을 진압하고자 도원수 장만의 휘하에서 무공을 세운 인물이 남이흥이었습니다. 장만이 “도성을 포위하자”는 계책을 세우자 남이흥은 정충신(1576~1636)과 함께 “지리적으로 유리한 안현(무악재)에 올라 진을 치고 위에서 적을 내려다보며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남이흥의 이 전술로 전세는 완전히 관군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갑자기 거센 돌풍이 이괄 진영 쪽으로 불자 관군은 고춧가루를 살포해 적의 시야를 차단하는 일종의 화학전을 구사했습니다. 여기에 이괄의 부장 한명련과 외모가 닮은 반란군의 군관이 전사하자 남이흥은 “역적 한명련이 죽었다! 이괄이 도망친다”고 외쳐 적의 사기를 꺾었습니다. 마침내 관군은 승리를 거뒀습니다.
구멍난 조선 북방 병력, 빈틈 공략한 후금
이괄의 난은 진압됐지만, 그 여파는 막대했습니다. 이괄의 병력 약 2만명이 궤멸됐습니다. 이괄이 지키던 북방 방어선에 구멍이 생긴 셈이었죠. 이괄의 난 이후 조정의 의심과 감시가 심해지기까지 했습니다. 북방 방어를 맡고 있던 남이흥은 군사 훈련을 제대로 시킬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1627년(인조 5년) 1월, 마침내 후금이 조선을 침공한 정묘호란이 일어났습니다. 후금의 주력 부대 3만명이 의주를 함락하고 안주를 공격하자 남이흥은 안주성에서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성이 함락될 지경에 이르자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스스로 뛰어들어 순국(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침)했습니다. 마지막까지 적에게 화약이 넘어가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남이흥은 충장(忠壯)이란 시호(죽은 뒤 공덕을 칭송해 붙인 이름)를 얻었으며, 현재 그의 무덤은 충남 당진에 있습니다.
세상이 하도 험악하다 보니 우리말의 된소리와 거센소리가 이 무렵 생겨났다고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1953년 휴전과 한미상호방위조약 이후 70년 넘게 한반도에서 평화를 누리고 있는 우리들은 대단한 축복을 받은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참고문헌>
1. 유석재, "10대 임진왜란, 40대 이괄의 난, 50대 정묘호란 겪었죠", 조선일보, 2024.3.14일자. A2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