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봉 강백년의 삶과 문학
선량을 뽑는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를 한 달여 앞두고 청렴결백한 청백리 의 표상 설봉 강백년의 삶과 그와 연관 된 문화유적을 산책하면서 공직자로 서 삶을 성찰해보고자 한다.
강백년은 회덕의 자운골(현 대전시 대덕구 석봉동)에서 강주의 둘째 아들 로 1603년(선조 36)에 탄생했으며 자 는 숙구이고 호는 설봉, 한계, 청월헌 이며 시호는 문정이다. 1627년(인조 5) 문과에 급제하고 1646년(인조 24) 중 시에 장원해 동부승지를 제수받아 당 상관에 올랐다. 그 후 외직으로는 충 청, 강원, 황해, 경기 등 4도의 관찰사 를 역임했고 내직으로는 대사간, 대사 헌, 대사성 등 청요직에 여러 차례 봉 직하면서 직언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1660년(현종 1) 예조참판 동부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도승지, 예조판서, 예문관제학 등에 오랫동안 재직하면 서 뛰어난 글솜씨로 관각문학을 대표 하는 문한(文翰)으로 이름을 날렸다.
또 “강백년은 처음 벼슬길에 나온 이후 두려워하고 삼감이 특별히 심하 여 일찍이 남의 과실을 논박하지 아니 하였고 자신을 단속하여 청렴하고 검 소하였으며 그 한고가 가난한 선비와 같았다.”(‘조선왕조실록’ 숙종조) 그 만큼 설봉은 관직 수행 능력이 뛰어나 고 청렴과 근검, 인의 등의 덕목을 두 루 겸비하여 백성들과 동료들에게 존 경과 신망이 두터웠다. 그래서 1673년 (현종 14) 71세에 조선 시대 관리들의 명예의 전당이라 할 수 있는 기로소에 들었으며 1681년(숙종 7) 79세에 졸해 임금이 하사한 사패지 공주 의당면 도 신리에 묘소를 마련했고 1695년(숙종 21) 청백리에 선발됐다.
청춘에 곱던 양자(樣子) 임으로야 다 늙거다/ 이제 임이 보면 날인 줄 알 으실까?/ 아무나 내 형용 그려다가 님 의 손데 드리고자(강백년, ‘청춘에 곱 던 양자’
시조 전문) 이 시조는 1646년(인조 24) 소현세 자의 빈이었던 강빈옥사의 부당함을 상소하다가 삭직을 당하고 2년이 지난 후 대사간에 있으면서 강빈의 신원을 다시 상소했다가 청풍군수로 좌천되 면서 지은 것이다. 자신의 부귀영화보 다는 바르고 진실함을 위해 직언을 하 고 쫓겨나서도 임금을 그리워하는 충 신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복사꽃과 봄날의 물결이며, 눈 속 의 달과 차가운 물가에 이를 것 같으 면 시원하고 온화하며 조용하고 재미 있는 흥취가 얕지 않을 것이니, 네 계 절의 아름다운 경치를 오직 너와 더불 어 즐기니 갈매기야말로 참으로 한가 롭고 늙은이 역시 한가롭다. 갈매기는 욕심이 없고 늙은이 또한 욕심이 없으 니, 갈매기는 사람에게 구할 것이 없고 늙은이 역시 구할 것이 없다. 갈매기는 스스로 그 즐거움을 즐기고 늙은이 역 시 그 즐거움을 즐기니, 곧 사람과 물 건이 같은 것이고, 물건과 사람이 같은 것이다. (강백년, ‘구우설(鷗友說)’ 설 봉집 권 23.)
이 글에서는 구우옹과 갈매기 사이 의 물심일여, 물아일체의 경지를 통해 도가적 무심허욕과 성리학의 격물치 지의 정신을 잘 읽어낼 수 있다. 작품 속 구우옹은 평생을 청렴하고 강직하 게 살면서 학문과 인품이 고매하고 문 장과 덕망이 뛰어났던 설봉 자신이 모 습이라 할 수 있다.
◆ 신탄진 석봉동→공주, 그리고 묘 소와 사우
진주 강씨는 설봉의 고조부인 동지 공 강문한이 15세기 중반에 아산에서 회덕의 한절구지(현 대전시 대덕구 석 봉동)로 이사 한 후 강학년, 강백년, 강 절 등 많은 인물을 배출하며 신탄진 석 봉동 일대에서 번성하였다. 그래서 우 암 송시열은 ‘회덕향안’을 중수하면서 회덕 관아를 중심으로 남쪽에는 은진 송씨가, 북쪽에는 진주 강씨가 많이 산 다고 ‘남송북강’이라 하였다.
그러나 설봉은 공직 생활을 하면서 공주와 인연을 맺고 퇴임 후 공주 의당 면 도신리로 낙향해 거기에서 터를 잡 고 살다가 유택을 마련하고 영면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설봉은 1637년(인조 15)에 충청도 사로 부임하여 공주 감영에서 관찰사 를 보좌했고 1653년(효종 4)에는 충청 도 관찰사로 공주에서 청렴결백한 애 민 정치를 실천하며 충청도에서 대동 법을 처음 시행했다. 그리고 병자호란 후 폐허가 된 갑사를 증축하고 공산성 안에 있던 감영 건물을 봉황산 아래로 이전시켰다.
임금이 평생을 청렴함과 직언으로 살아온 설봉의 공과 덕을 높이 평가하고 낙향해 공주 도리미에 터를 잡은 설봉에게 늙어서나마 편안히 여생을 보 내라 하면서 도리미의 뒷산에 올라가 눈에 보이는 모든 토지를 하사했다. 이러한 연유로 설봉의 묘소가 이곳에 마련되었고 이곳이 진주 강씨 설봉공파의 세거지가 되어 집성촌을 이뤘다고 한다. 또 다른 설은 설봉이 충청감사로 왔을 때 이곳을 직접 둘러보고 묫자리 를 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유언에 따라 이곳에 묘가 조성되고 이후로 후손들이 정착하면서 집성촌이 됐다고 한다. 설봉의 묘소와 사우를 찾아가려 면 마을 입구에 있는 용유담과 토월정 을 먼저 거쳐야 한다.
전설 속의 용들이 내려와 놀았다는 용유담은 설봉의 묘소가 용의 머리에 해당하는 용두라 하여 그 앞쪽에 반드 시 연못이 있어야 한다는 풍수설에 따 라 조성했다고 한다. 하늘에서 보면 마 치 사랑의 화살을 맞은 심장(하트) 모 양을 하고 있어 이곳에서 연인들이 소 원을 빌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전한 다. 그리고 동네 어르신들의 쉼터 역할 을 하는 마을 입구에는 수령 360여 년 이 된 아름드리 느티나무 두 그루와 그 사이에 있는 토월정이 멋스러움을 자 랑하며 청렴한 선비를 모시는 역사와 전통을 지닌 마을의 품격을 보여준다.
토월정에서 마을 안쪽으로 걸다 보 면, 진주강씨설봉공파종친회관 청백 재가 나타나고 바로 뒤편에 설봉 강백 년의 업적을 기리고 후세에 보전하기 위해 그의 시호를 따서 건립한 문정사 가 있다. 문정사 삼문의 현판은 물기문 (勿欺門)인데, 여기의 ‘물기’는 ‘남을 속이지 말고, 해하지 말며, 올곧게 살 라’는 뜻으로 선대의 가훈을 이어받아 새긴 것이다. 설봉이 청백리 생활을 한 기본 정신이 아니었는가 한다.
강백년 묘소는 문정사 뒤편에 있으 며 강백년의 묘소 옆에 종친들 가족 묘소가 있다. 또 강백년의 묘소 입구 에는 신도비가 있는데 이것은 1705년 (숙종 31) 그에게 나라에서 문정의 시 호를 내린 것을 기념하여 임상원이 짓 고 조상우가 썼으며 상단의 전서는 그 의 아들 강선이 쓴 것이다. 참고로 어 려서부터 설봉을 사모하며 상관으로 모셨다는 임상원은 이 신도비문 이외 에도 묘비문, 묘갈명, 제문. 설봉의 생 애가 담긴 행장 등을 지어 구구절절 설 봉에 대한 존경과 흠모를 나타냈다. 묘소 앞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니 풍 수에 문외한인 필자가 보아도 낮은 산 줄기와 대교천에 둘러싸여 있는 마을 풍경이 왠지 맑고 깨끗하며 따뜻하고 평화롭기 그지없다. 설봉 강백년도 이 런 점에 반해 묫자리를 여기에 정하지 않았나 싶다.
◆ 기암서원의 유래와 보성 오씨와 의 관계
기암서원은 1699년(숙종 25)에 청백 리 강백년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으 로 본래는 청주 오근장(현 청원군 오 창면 기암리)에 세웠으나 1871년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됐다. 이후 1984년 에 보성 오씨와 청원의 유림이 뜻을 모 아 현재의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갈산 3길 15에 다시 복원했다.
최초로 기암서원이 세워진 기암리 는 강백년 할머니의 친정이 있던 곳으 로 설봉은 병자호란 전에 신병으로 이 곳에 와서 경전을 탐독하고 문하생을 육성한 인연이 있다. 진외가인 보성 오 씨는 문의 일대의 세족으로 크게 번창 한 집안이고 외손인 강백년의 학덕과 청렴한 정신을 높이 여기고 그를 기리 면서 후손들 강론의 장으로 삼기 위해 서원을 세운 것이다. 그리고 1706년(숙 종 3)에 강백년의 진외조인 오몽룡의 증손자이며 청렴한 학자로 진주목사 를 지낸 금암 오숙을 이곳 기암서원에 추배하였다. 기암서원 주변에는 기암 서원비와 기암서원 강당, 보성오씨천 (阡)비, 갈산사, 기암서원헌성비, 기암 서원중건사적비, 경산오익환선생유허 비, 척토효자문, 척토오정근선생효자 문복원비 등이 있어 청렴 교육과 충효 교육의 도장 역할을 하고 있다. 이밖에 도 설봉 강백년은 청백리의 표상이며 공직자의 사표로서, 정암 조광조와 퇴 계 이황의 호에서 한자씩 발췌해 이름 을 지은 온양의 정퇴서원에서도 배향 하고 있다.
<참고문헌>
1. 방경태, "재물 탐하지 않던 청빈한 삶 ... 청렴 공직자 표상으로", 금강일보, 2024.3.12일자. 1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