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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 덕혜옹주 일기장 중에서
1989년 4월21일.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가 낙선재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76세 때였다.
1912년 5월25일. 덕수궁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순종과 의친왕, 영친왕 등 세 아들을 둔 고종에게 환갑이 되던 해에 늦둥이 딸이 태어난 것이다.
덕혜옹주는 1907년 일제의 압력으로 강제 퇴위당한 후 실의의 나날을 보내던 고종에게 큰 위안이 됐다. 고종은 자신을 쏙 빼닮은 덕혜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덕혜를 처소인 함녕전으로 데려와 함께 지내고 덕수궁의 준명당에 유치원을 만들어 주며 애지중지했다.
그러나 역사의 격랑은 망국의 옹주에게 만만치 않은 운명을 예고하고 있었다.
부모 잃은 뒤 일본 강제 유학… 가혹한 운명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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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가 겨우 8세이던 해인 1919년 1월21일 갑자기 고종이 승하했다. 일제는 고종의 삼년상이 끝나자마자 그에게 일본 유학을 강요했다.
1925년 3월28일. 14세의 어린 소녀는 정든 궁궐을 떠나 일본이라는 낯선 이국땅에 발을 디뎌야 했다. 덕혜는 오빠 영친왕과 그 부인 이방자 여사가 살던 집에 도착했다.
덕혜는 아오야마에 있는 여자학습원을 다녔다. 그는 말이 없고 급우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했다. 또 고종의 독살설로 독살의 두려움이 있던 그는 학교 갈 때 항상 보온병에 물을 가지고 다녔다.
이 무렵 덕혜를 더욱 슬프게 한 것은 1926년 오빠 순종의 죽음과 1929년 생모인 귀인 양씨의 사망이었다. 그는 이국땅에서 말 그대로 고아가 된 것이다.
덕혜는 18세에 불면증과 신경쇠약 증세를 보인 후 조현병 진단을 받았다.
일본인과의 강제 결혼… 다시 악화된 덕혜의 조현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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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5월8일. 덕혜는 일제의 강요로 일본인과 정략결혼을 했다. 남편인 소 다케유키는 대마도 백작가문의 양자로 동경대 영문학과를 다닌 엘리트 학자이자 시인이었다.
결혼 후 1년이 지나 둘 사이에 딸 정혜(마사에)가 태어났다. 그러나 행복한 결혼 생활도 그에겐 버거웠다. 점점 심해지는 병세에 소 다케유키는 1946년 그를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결국 덕혜와 소 다케유키는 합의 이혼했다. 하나뿐인 딸 정혜는 1956년 결혼 뒤 유서만 남긴 채 실종됐다가 일본 남알프스 산악지대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나라를 빼앗긴 데다 부모와 남편, 자식까지 잃은 덕혜옹주는 혼자가 됐다. 망국의 옹주에게 다가온 인간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가혹한 운명은 결국 정신병원 재입원으로 이어졌다.
시대의 비극에 휩쓸린 희생양… 고국 땅에서 눈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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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 이후 덕혜는 조현병을 앓고 있음에도 자신이 살던 고국의 궁궐로 돌아가길 원했다. 그러나 황실의 존재에 정치적 부담을 느낀 이승만 정부는 그의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1961년 11월 박정희 정부가 그의 귀국을 허락했고 1962년 1월26일 마침내 귀국할 수 있었다.
38년 만에 고국 땅을 밟았지만 영민하고 총명했던 덕혜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정신질환과 중풍으로 눈에 초점을 잃은 모습만 남았을 뿐이었다.
귀국 후 덕혜는 7년 동안 병원에서 지냈다. 그는 치료 후 창경궁 낙선재와 연결됐던 수강재에서 생활하다가 1989년 4월21일 파란 많았던 삶을 뒤로 하고 눈을 감았다.
불운의 삶을 살았던 덕혜옹주. 그가 남긴 일기 속 삐뚤삐뚤한 낙서는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