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통틀어 20세기 최고 언어학자' 조명한 신간 '북으로 간…'
이산가족 등 한반도사 압축적으로 담겨…일본인 학자의 연구 결실
(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일한다는 뜻을 가진 한자 '勞'는 단어의 가운데에서는 '로'로 표기하지만, 맨 앞에 올 때는 '노'로 읽는다.
단어의 첫머리에 'ㄴ'이나 'ㄹ'이 올 때 발음과 표기가 변하는 두음법칙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이를 따르지 않는다. '노동'은 '로동'으로, '이론'은 '리론'으로, '역사'는 '력사'로 읽는다. 사람의 성을 표기할 때도 마찬가지다.
남북한의 언어를 논할 때 가장 이질적이라고 느껴지는 이 부분은 '로동신문'에 발표한 어느 논문에서 이론적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언어학자 김수경(1918∼2000)의 연구 성과다.
최근 국내에서 번역 출간된 '북으로 간 언어학자 김수경'(푸른역사)은 20세기 남북한을 통틀어 최고의 언어학자로 손꼽힌 '천재' 김수경의 생애를 좇은 책이다.
이타가키 류타(板垣龍太) 일본 도시샤대학 교수가 2021년 일본에서 출간한 이 책은 약 3년 만에 한국어로 나왔다.
김수경은 우리 학계에서 충분히 다뤄지지 않은 학자 중 한 명이다.
1918년 강원도 통천군에서 태어난 그는 1940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했고, 이후 도쿄제국대학 대학원에서 언어학을 공부한 뒤 경성제대 조선어학 연구실의 촉탁으로 일했다.
김수경은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그리스어, 라틴어 등 최소 10개 이상의 언어를 습득해 '언어 천재'로도 불렸다. 그에게 언어학을 가르쳤던 스승 고바야시 히데오(小林英夫)가 놀랄 정도였다.
"그의 독일어 이해력은 상당했다. 재능이기도 하겠지만, 철학과 수업에서 늘 어려운 것을 읽다 보니 내용 파악력이 꽤 날카로웠다. 제자에게 배우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두음법칙을 폐지하는 게 언어생활에 더 유익하다는 점을 형태주의 이론으로 밝혔고 '조선어 신철자법'(1948), '조선어 철자법'(1954). '조선어 문법'(1949) 등을 집필했다.
북한에서 언어와 관련한 거의 모든 분야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셈이다.
그의 가족은 전쟁의 포화 속에 엇갈려 남과 북, 서로 다른 공간에서 생활을 이어갔다. 1988년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딸 혜영 씨와 상봉하기까지 가족은 40년 가까이 떨어져 있었다.
책은 김수경의 삶과 학문 세계를 교차해 서술하며 식민시기, 해방 전후, 한국전쟁기, 분단 이후를 살아간 한 지식인의 모습을 담담히 그려낸다.
평전 형태에 가깝지만, 이타가키 교수는 이 책을 '일종의 학문사'라고 규정한다.
전문 영역의 내부를 깊숙이 들여다보면서 선행 연구를 정리하는 학설사와 달리, 학문 그 자체를 역사의 부분으로 여기고 들여다본다는 의미에서다.
"그가 걸은 길은 상아탑에서 이루어진 학문 '내부'의 이야기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었다. … 김수경의 발자취는 그러한 북한의 정치·문화사의 핵심 문제에도 근접하는 것이었다."
일본인 학자는 2010년 캐나다에서 우연히 만난 김수경의 딸로부터 '아버지가 북한에서 언어학자였다'는 말을 들은 뒤 김수경에게 관심을 갖게 됐다.
이후 국제 심포지엄을 준비하며 이어진 연구는 김수경을 재조명하는 계기가 됐고, 2021년 책으로 결실을 봤다.
한반도와 한일관계 전문가로 잘 알려진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 명예교수는 이 책에 대해 "지금까지 쓰인 적 없고 앞으로도 쓰이지 않을 작품"이라고 평을 남겼다.
고영진·임경화 옮김. 552쪽.
<참고문헌>
1. 김예나, 北 언어학 설계한 '천재'…분단 시대를 살아간 지식인, 김수경", 연합뉴스, 2024.2.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