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에 쓰는 관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분과 권위를 상징하는 역할을 했으며 멀리서도 재질과 형태 등으로 신분을 곧 바로 알았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발견 된 우리나라 금관은 총 8개인데 그 중에서 6개는 신라 금관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 모두가 5.6세기 때 신라고분에서 출토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발굴 된 금관총 금관은 높이가 44.4cm ( 드림포함 ) 입니다.
1960년 도굴꾼이 경찰에 잡혀 대가야 때 조성된 경북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 도굴 해 장물업자에 의해 이병철 회장님에게 갔다고 이야기했지만 학자들은 가야의 기술이 이런 기물을 만든지 못한다고 생각되어 신라초기 금관이라고 주장한 사람들도 많았지만, 1977년 계명대 박물관이 지산동 고분군 중 45호 고분을 발굴하면서 자연히 가야금관이라고 밝혀졌습니다.
이유는 호암 미술관에 가지고 있는 부속품 귀걸이와 45호에서 나온 귀걸이가 쌍둥이처럼 닮아 있어 45호에서 도굴 된것이라고 추정하였다고 합니다.
금관이 나온 고령 지산동 고분군은 가야연맹의 하나인 대가야 지배층이 묻힌 무덤군이며 현재까지 무덤이 700여기가 확인 되었습니다. 그리고 높은 구릉위에 커다란 고분군이 밀집해 있는 것이 아마도 대가야의 전성기를 보여 주며, 45호 고분은 봉토 지름이 23m에 달하고. 순장인이 14명의 흔적이 있답니다. 45호 바로 옆 44호는 37명의 순장의 흔적이 있는데, 대부분 순장자들은 노예나 하인들이라고 하니 지금 생각하면 끔직하고 미개한 사람들이라 생각하지만 그 시대에는 사후세계도 분명 존재한다는 '계세사상' 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45호 고분의 주인은 임금이나 왕비가 아닐까 추정하네요.
신라는 6세기 초 거대한 고분과 순장문화가 사라졌지만 가야는 여전히 종전장례 풍습을 고수하다가 500년 넘게 번창하던 가야는 562년에 신라에 멸망했다 합니다.
신라에 멸망한 이유는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결과라고 하니 지금이나 옛날이나 우두머리가 영리하고 총명해야겠다는 결론이 납니다.
단군신화에서 환웅이 하늘에서 지상에 내려올때 '신단수' 나무 아래 인것도 그렇고 마을어귀 나무앞에 돌무덤 쌓아 비는 ' 서낭당'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서양의 크리스마스 트리도 나무가 나쁜 기운을 물리쳐 주는 신비한 힘이 있다는 믿음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1. 이병호, "순장자 14명과 함께 묻힌 금관...대가야의 최전성기 상징", 조선일보, 2021.12.2일자. A2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