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류큐 멸망 보고 조선내정 간섭 시작한 淸 글쓴이 신상구 날짜 2021.05.01 18:49

                                                                          류큐 멸망 보고 조선내정 간섭 시작한 淸 

                                                                               


    《근대일본은 초기부터 유난히 해외팽창욕을 보였다. 이미 도쿠가와 막부는 1855년 아이누인들이 살던 지금의 홋카이도를 직할령으로 삼았고 메이지 정부는 이어서 일본인을 대거 이주시켰다. 그 너머 북방에도 관심을 보여 1875년에는 러시아와 사할린-쿠릴열도 교환조약을 체결하고 쿠릴열도를 손에 넣었다. 이듬해인 1876년에는 도쿄로부터 1000km나 떨어져 있는 태평양의 섬, 오가사와라제도 영유를 선언했다. 우리가 알다시피 1873년에는 정한론이 비등했고 1875년에는 운양호 사건을 일으켜 조선에도 공세적 자세를 취했다.》

     일본의 팽창에 제일 먼저 저항한 것은 사실 류큐왕국(지금의 오키나와)이었다. 15세기에 오키나와 전체를 통일한 류큐왕국은 명나라의 충실한 조공국이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후인 1609년 일본의 사쓰마번이 침공해와 조공을 요구했다. 이후 류큐는 이른바 ‘양속체제’를 외교의 기본원리로 삼아 중일 양국에 조공하면서도 내정은 자주적으로 행해온 엄연한 왕국이었다. 일본은 400년 넘게 번영해온 왕국을 먹잇감으로 삼으려고 한 것이다.

                                                               日에 병합당한 류큐, 계속 저항

동아일보

    이런 류큐인들의 저항운동은 조선 근대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청이 류큐 멸망을 보고 조선에 대한 지배를 강화한 것이다. 김옥균의 갑신정변은 이에 대한 반발이었다. 류큐인들은 자신을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국제체제의 중요한 일원으로 자리매김하고 일본의 침략에 국제적인 대응을 호소하는 전략을 택했다. 그들은 중국의 실권자 이홍장을 끌어들이기도 하고 병합당한 후에도 조선의 갑신정변이나 청불전쟁에 영향 받으면서 저항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 자그맣고 평화로운 섬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1871년 한 사건이 발생했다. 류큐 어민들이 대만에 표착했는데, 그곳 원주민들이 이들을 살해하고 만 것이다. 일본은 ‘자국민’ 살해에 보복한다며 대만에 파병했다. 이어서 1879년 마침내 500명의 병력으로 류큐왕국을 멸망시키고 국왕 상태(尙泰)를 도쿄로 잡아갔다. 그러고는 오키나와현을 설치했다. 류큐는 종주국인 청에 기대는 수밖에 없었다. 대안(對岸)에 있는 푸젠성으로, 이어서 베이징을 찾아가 “사나운 일본인들이 감히 흉포한 위세를 부리면서 쳐들어와 수백 년 된 번신(藩臣)의 종사를 멸망시켰다”며 “살아서는 일본의 속인(屬人)이 되길 원치 않고, 죽어서는 일본의 속귀(屬鬼)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간절하게 구원을 요청했다.

                                                           류큐 “日, 다음 목표는 淸” 파병요청

     그러나 청은 냉정하게도 일본과 류큐왕국을 분할해 나눠 가질 생각을 했다. 강대국에 의해 제멋대로 국토가 분단된 우리에게는 씁쓸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이어서 청불전쟁이 터져 좌종당(左宗棠)의 군대가 푸젠성까지 진주해오자 류큐인들은 이 군대가 류큐로 건너와 일본인들을 쓸어내 달라고 하소연했다. 류큐 지도자 향덕굉(向德宏)은 “전함 2, 3척을 파견하여 일본인을 문죄할 것을 간절히 바랍니다. … 천자의 군대가 국경에 다다르는 것을 보면 우리 인민은 죽음을 무릅쓰고 일본인을 남김없이 쫓아낼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만일 일본의 함선이 구원하러 온다면 일본 국내는 텅 비어 있을 것이니, 중국이 상하이 톈진 등지로부터 곧바로 출격해 무방비 상태의 일본을 공격하면 될 것”이라고 일본 본토 공격 전략까지 제시했다.

    중국의 군사 개입을 설득하는 논리가 흥미롭다. 먼저 류큐 멸망은 중화질서 전체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라는 것이었다. “일본인은 먼저 대만에서 난을 시작하고, 이어서 류큐에 학정을 행하였으며, 마침내 조선에 그 폭력을 행사(임오군란, 갑신정변을 말함)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도 또한 베트남을 침략하였습니다. … 만약 이렇게 횡행하는 것을 그냥 둔다면 … 화가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일종의 도미노 이론이다. 더 나아가 일본이 서양과 손잡고 중화질서를 공격할 것을 경고했다. “일본이 어찌 류큐만 갖고자 할 뿐이겠습니까. 그 마음은 저절로 큰 것을 찾게 될 것입니다. … 전쟁을 벌이려고 하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일본이 그 앞잡이가 될 것입니다. 프랑스가 베트남과 전쟁을 하고 있는데 일본이 이를 돕고 있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실제로 청불전쟁 당시 프랑스는 일본에 지원을 요청한 적이 있고, 1884년 갑신정변은 이 전쟁 때문에 조선 주둔 청군이 빠져나간 틈을 노려 개화파와 일본군이 일으켰으니 류큐인들의 예측이 터무니없다고만은 볼 수 없을 것이다.

                                                                        淸은 조선 갑신정변 문제에 골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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돛을 내린 채 류큐로 입항하는 류큐의 ‘진공선’. 중국으로 진공품을 싣고 떠났다 귀환할 때는 중국 상품을 싣고 먼 이국으로 출항하는 무역을 했다. 오키나와현립박물관미술관 소장


     그러나 청은 바다 건너 류큐까지 군대를 파병할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조선에서는 임오군란·갑신정변까지 터진 상태였다. 류큐인들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던 차에 갑신정변 문제를 매듭짓기 위해 톈진에서 이홍장과 이토 히로부미가 마주 앉았다. 류큐인들은 이를 마지막 기회로 여겼다. 청으로 몰려가 “듣건대 베트남은 포위가 풀리고 프랑스는 강화를 요구했다고 하며, 조선의 일로 일본 사신이 이미 베이징에 와 있다고 합니다. … 지금 일본 사신이 베이징에 와서 조선의 일을 논할 때 류큐의 일도 함께 논의해 달라”고 호소했다. 그들은 조선과의 형평성 문제를 거론했다. 류큐도 조선과 같이 충실하게 조공을 해왔는데 어째서 “조선에 일이 있을 때는 두 번씩이나 병력을 파견하여 난을 진정(임오군란·갑신정변 때 청군이 파병된 것을 말함)시켜 줬으면서 류큐는 돌아보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처절한 외교전이었지만 이들의 소망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베이징에서 구원운동을 하던 류큐인 임세공(林世功)은 이홍장과의 면담을 요구하며 자살했다.

                                                            조선에 군대보낸 淸, 총독 행세

    류큐의 멸망에 바짝 긴장한 것은 청이었다. 류큐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같은 조공국인 조선에 미칠 악영향 때문이었다. 게다가 조선은 일본 바로 옆에 있지 않은가. 이로 인해 청의 조선정책은 크게 선회한다. 원래 조공관계란 간접적인 지배에 불과했으나, 이때부터 직접적으로 내정간섭을 시작한 것이다. 임오군란·갑신정변 때 병자호란 후 처음으로 군대가 들어왔고, 위안스카이는 서울에 주재하며 마치 총독처럼 행세했다. 류큐 병합은 우리 근대사에도 큰 영향을 끼친 것이다. 
                                                                                      <참고문헌>
    1. 박훈, " 류큐 멸망 보고 조선내정 간섭 시작한 淸[박훈 한일 역사의 갈림길]", 동아일보, 2021.4.30일자. A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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