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논쟁거리-한4군 문제과 낙랑
1.낙랑군 문제에 대한 견해들
《삼국사기》를 비롯하여 고려-조선시대의 학자들은 낙랑군의 위치를 평양 일대로 비정하였다. 박지원 등의 일부 실학자들은 낙랑군의 위치를 요동 지역으로 비정하기도 하였다. 일제시대 이후 평양 일대에서 봉니(封泥)·한식(漢式) 무덤 등 낙랑 관련 유물들이 대량으로 발굴됨으로써 조선사편수회에서 활동한 이병도 제자들로 구성되된 남한의 식민사관론자들은 한4군과 낙랑군의 위치는 평양시 대동강 남안의 낙랑토성 일대임이 확증되었다. 2009년에는 평양에서 출토된 목간(2005년 출토)을 분석하여 낙랑군 소속 25개 현의 인구 규모와 정확한 위치 등을 판독·연구한 결과가 발표되었다.
그러나,북한의 견해는 한4군은 요동지역에 존재했다고 주장하고 있고, 일제하 민족사학자 신채호와 일부 민족사학자 및 재야사학자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한4군과 낙랑군은 요서일대에 존재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리지린을 비롯한 북한 학자들과 대한민국의 윤내현 등의 일부 학자들은 낙랑을 지금의 요하 서쪽이라고 주장하며, 박영규 등의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낙랑의 위치를 북경 서쪽의 화북 지방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에 대해서 대한민국 사학계는 고고학적인 증거를 무시한 채 문헌사료의 취합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으로써 사실이 아니라고 비판하며 인정하지 않는다.
2.[한단고기][삼국사기][사기] 등 문헌들이 증언하는 한4군과 낙랑
[한단고기]는 47대 마지막 고열가단군이후 요서지역의 낙랑태수 최숭이 바다를 건너 마한의 왕검성에 최씨 낙랑국을 개국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낙랑국왕 최리가 옥저에 나들이 나온 호동왕자를 보고 데리고 와 낙랑공주와 결혼을 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왕망의 신라를 무너뜨리고 한나라를 재건한 후한 광무제가 고구려를 공격하기위해 바다를 건너 최리 낙랑국지역인 패수이남지역을 차지하고 낙랑군을 설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구당서][신당서]에는 고구려 수도 장안(평양)은 한나라의 옛 낙랑군의 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일제시대 이후 평양 일대에서 봉니(封泥)·한식(漢式) 무덤 등 낙랑 관련 유물들이 대량으로 발굴되었고, 2009년에는 평양에서 출토된 목간(2005년 출토)을 분석하여 한나라 조정에 보내는 낙랑군 소속 25개 현의 인구 규모와 정확한 위치 등을 판독·연구한 결과가 발표되었다. 한4군과 관련한 한나라 한무제의 사가인 사마천의 [사기]에는 한4군을 설치했다는 기록자체가 없다. 오히려 위만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한나라 장수들이 참수를 당했다는 기록과 내부분열로 위만조선이 망하자, 한나라와 손잡고 내부분열을 조장하고 위만조선을 무너뜨린 조선인들에게 땅을 분봉하는 기록이 있다.[한단고기]에는 위만조선이 내부분열로 망한 BC108년에 한나라군대가 북부여를 쳐 들어오자 고열가의 직계후손인 고두막이 의병 5천을 모아서 물리치고 부여의 옛 도읍지까지 회복하여 동명이라고 정했다는 기록이 있다.
3.한4군의 허구및 낙랑문제 정리
종합정리하면, 한나라 한무제와 관련되는 한4군은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소위 낙랑.진번.임둔.현도는 번조선 영역에 해당하는 요서지역에 존재한 번조선의 제후국들이다. 따라서 한나라가 설치했다는 한4군은 한반도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당시 기록인 사마천의 [사기]에도 한4군이라는 용어는 기록되어 있지 않는 배경이다. 위만조선은 내부분열로 망했지 한나라의 침략으로 망하지 않았다. 따라서 한나라편에서 내부분열을 조장하여 나라라를 망치게 한 조선인들에게 한나라가 공로로 땅을 분봉했다면 한4군이 될 수 없다. 그냥 조선 4군이 맞다.
->낙랑군은 최숭이 마한 왕검성으로 오기 전에 원래 위치인 난하유역의 낙랑에 있었던 번조선 제후국이다. 낙랑국왕 최숭이 마한(단군3조선 중 마조선=한반도=왕검성은 평양) 수도로 가게 된 것은 해모수 단군의 설득으로 군사통제권을 가지고 단군3조선을 중앙에서 통치했던 진조선 5가 공화제가 해체되면서 마조선도 마지막 왕 맹남을 끝으로 막을 내리자, 낙랑왕 최숭이 북한 평양의 대동강 부근에 막대한 재물을 갖고 와서 낙랑국의 새 도읍지로 삼은 것이다.
그리고, 북한 평양지역에는 단군조선 말기에 번조선 영역인 요서지역에서 최숭이 재물을 가지고 서해바다를 건너 평양에 최씨 낙랑국을 세웠다고 했으니 북한 평양지역 곳곳에서 발굴되는 낙랑지역의 비파 청동검과 무덤들이 이를 증명한다. 또한 한나라의 무덤이나 유적유물,인구조사목간이 발굴되었으니 역시 후한의 낙랑군이다.
△ 평양에서 출토된 중국 후한 공문서 목간. 1993년 중국 장쑤성 롄윈강에서 발견된 기원전 10년께의 한나라 묘에서 나온 것으로 당시 관할지 면적,호구,인구 증감 등을 담고 있어 이번에 출토된 낙랑목간의 원형을 짐작케하는 후한 광무제 유물이다.이것은 고구려 대무신왕때 광무제가 바다를 건너 낙랑군을 설치했다는 <삼국사기>기록과 일치하는 고고학적 사료로 식민사관의 중국 요서지역과 관련한 한4군과 무관하며, 일부 재야사학자들도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을 증명한다 하겠다.
따라서 한4군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말아야 하며, 소위 한4군의 실체는 요서지역의 단군조선 제후국으로 이해되야 하며, 북한 평양지역의 낙랑은 요서지역에서 건너온 번조선유민 최숭이 개국한 최씨 낙랑국과 고구려을 공격하기위해 바다건너 최리 낙랑국 지역을 차지하여 설치한 후한의 낙랑군의 공존성을 인지할 때 북한 평양지역에서 발굴되는 수 많은 낙랑의 유적유물들이 이해될 수 있다.[윤복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