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노는 2세기 이후 초원에서 사라지고 없음...잔존세력이 5세기 유럽에 나타난 훈족
박혁거세는 흉노족이 아니라, 부여유민세력..시기적으로도 흉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
박혁거세가 왕에 오르자 거서간이라 칭한 건 아버지가 부여서쪽의 국경을 담당한 왕이였다는 의미가 됨.어머니 파소는 부여공주라고 기록됨(한단고기)...[삼국사기]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태어난 아이로 신화적으로 기록됨..박혁거세세력은 옥저를 거쳐 경주로 들어와 진조선유민세력의 추대를 받아 13세에 왕에 추대됨..그리고 사로국이라 칭하고 진조선유민들의 도읍지 서라벌(경주)을 도읍지로 삼음
김일제후예들인 흉노세력은 신나라가 망한 후에 산동지역에서 배타고 한반도로 들어온 세력.이미 한족화된 흉노인들로 김일제 남동생의 후손인 김수로세력은 가야의 왕족이 되고, 김일제 후손인 김알지 세력은 사로국의 세력이 됨. 신나라 화폐들이 한반도에서 발견된 것은 당시 해상무역의 흔적이고,이주했다는 증거임.
4-5세기 고구려와 전쟁 중에 이탈한, 모용을 시조로 삼는 선비기마족(전연군대)이 경주지역으로 들어와 사로국을 무너뜨리고 김알지세력과 연합하여 신라를 개국함.왕족은 선비족이고 귀족은 김알지세력이라 할 수 있음.즉 성골은 모용선비족이고 진골은 김알지세력이라 할 수 있음. 법흥왕 이름이 모진으로 모용과 성씨가 같음. 법흥왕때부터 김씨로 개명하여 김원종이 됨. 신라왕조가 김씨라는 것은 진흥왕때부터 기록되기 시자함.
[삼국사기]는 신라사관 김부식이 편집한 기록으로 신라을 우월하게 보는 신라사관이기 때문에 고구려를 비하시킬 수 밖에 없음. 신라에 고구려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다는 중원고구려비문내용이나 경주에서 발견된, 광개토태왕에게 제사지내는 청동그릇이 당시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명확히 증명해 주는 객관적인 고고학적 사료라 할 수 있음.당시 신라는 고구려의 제후국에 불과했음.
그래서 축소 및 과대포장으로 왜곡.날조시키려는 식민사관이나 지나사관이나 신라사관이 모두 문제라는 것임..역사학이란 객관적 연구가 아니라, 자국이기주의와 집단이기주의를 목적으로 역사논리를 내세운다면 그건 역사학이라 할 수가 없음.
부정할 수 없는 광개토태왕비문은 다음과 같이 역사적 사실을 증언한다
"영락 9년(399) 기해년에 백잔이 맹서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이에] 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 때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차 성지(城池)를 부수고 노객으로 하여금 왜의 민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이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사신을 보내면서 [고구려측의] 계책을 [알려주어] 돌아가서 고하게 하였다.
10년(400) 경자년에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군이] 남거성(男居城)을 거쳐 신라성(新羅城)에 이르니, 그 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고구려군이]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안라인수병(安羅人戌兵) 신라성 성(新羅城 城) ’하였고,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옛적에는 신라 매금(寐錦)이 몸소 고구려에 와서 보고를 하며 청명(廳命)을 한 일이 없었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대에 이르러 [이번의 원정으로 신라를 도와 왜구를 격퇴하니] 신라 매금이 하여 [스스로 와서] 조공하였다."
[고증자료]광개토태왕 당시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
경주 호우총에서 출토된 광개토태왕 제사용 청동그릇-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 명확히 표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서기 400년 신라의 요청으로 광개토왕이 내려보낸 5만의 군대가 가야와 왜의 연합군을 궤멸시키고, 신라의 수도 금성에 주둔군을 남겼다. 망국의 위기를 벗어난 신라의 왕과 그 일행이 직접 평양에 이르러 고구려왕에게 조공을 바친 것은 물론이다. 광개토태왕이 세상을 떠난 1년 뒤 그 왕릉에서 크게 제사를 지내고 이를 기념하여 제작한 청동 그릇이 신라 중상급 귀족의 무덤인 경주 호우총에서 나온 것이 당시의 국제정치 상황을 증언한다.
고구려 석비-중원 고구려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