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사를 연구할 때 인지할 것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동북방지역은 한국으로 유라시아와 아메리카 문명과 역사의 뿌리라는 인식이 중요하다.몽골인들도 생김새나 유전학적으로도 유라시아에서는 동쪽으로 갈수록 뚜렷해지는 것이 그것이다.그러니 한민족이 서방에서 이동해 왔다느니 하는 민족비하적인 역사논리를 전개해서는 안 된다.고대 한국인들이 서진하여 중동.유럽문명을 건설한 것이지 유럽인들이 동진해서 한국문명을 건설한 것은 아니다.
그리스.이집트.인더스 문명 등 서명문명의 뿌리라는 슈메르인들의 실체가 초기유적지(아모르)에서 출토된 편두형의 몽골인종이라는 것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슈메르는 소머리라는 말이다.소토템족이 한국말기에 중동까지 이주해서 한국문명을 건설했다는 의미가 되며, 한국문명은 상당히 개방적이고 모성적이고 민주적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소토템족은 어디서 온 것일까? 결국 뿌리를 찾아가면 소토템족은 농경지역으로 세계인구밀도가 최대인 한반도말고는 없다.고인돌이 많다는 것은 그 만큼 인구밀도가 높다는 의미다.한반도 토기.돌검.무덤양식이 바로 유라시아 토기.검.무덤의 원형이다. 기독교사상과 에덴동산설화는 모두 슈메르인들의 사유체계다.따라서 기독교사상은 한국사상의 줄기에 불과하며,4강이 흐르는 에덴동산 또한 압록강.두만강.송화강.토문강의 젖줄이 되는 백두산지역이 될 수 밖에 없다.
단군조선이 보살피고 길렀던 초원세력
2세기 초원의 주인은 흉노족에서 선비족으로 바뀐다.선비족은 단석괴를 중심으로 통합을 이루고 한나라와 연합하여 초원에서 흉노족을 몰아내고 주인자리를 차지한다.서진한 잔존흉노세력이 5세기 유럽에 나타나니 이들이 바로 훈족이다. 흉노.선비.거란.몽골은 사실 이름만 다를 뿐 초원세력이기 때문에 혈통이나 문화나 무덤양식이나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흉노.선비.거란.몽골의 뿌리는 본래 만주지역의 숙신족이다. 숙신족의 갈래가 유라시아와 아메리카 이주하여 서양인들이 부르는 몽골족이 된 것이다. 몽골은 말갈에서 온 말이다. 우리가 보통 국사에서 배운 흑수말갈족이 그것이다. 말갈족은 고구려를 이어 대진국을 개국한 주역들이기도 하다.
고로 흉노.선비.거란.몽골은 고대에 만주지역을 떠나 유목.수렵생활을 하던 숙신족의 후손들이라 할 수 있다. 애네들이 그러한 혈통적 뿌리를 알아야 하는데, 소수가 3국 시대에 한반도로 들어와 우리가남이가하면서 아직까지 패거리 독점문화를 형성하고 있으니 혼을 내서 바로 잡아 주어야 할 것이다.
만주와 한반도는 혈통적으로 올라가면 먼 조상의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성스러운 땅에서 오랑캐짓이나 하려면 호되게 혼을 내서 바로 잡아 줘야 한다.단군조선시대에도 초원세력은 단군의 동생이나 친척들이 족장으로 보내져 가르쳤다.
4-5세기 초원문화, 한반도로 들어 오다
경주.김해지역에서 출토된 초원문화 유물들은
현재 유럽 사학자들이 유라시아 초원문화를
연구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유럽 사학자들은
유럽에 출현한 초원세력이 한반도에서 이동해
오지 않았나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건 오류다.
베일에 싸인 신라 김씨왕조의 실체를 밝히다
▲ 로마문화권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보물 제635호 황금 장식 보검(계림호14호 고분출토).이런 모양의 황금보검은 해외에도 유례가 드문데,카자흐스탄의 보로로에 지역에서 출토된 칼과 지나국의 신장(新疆)위구르자치주에 있는 키질 제69굴의 벽화에 그려진 무사의 칼이 가장 비슷하다.모두 실크로드의 중간기착지라고 할 수 있는 중앙아시아 지역이다.이 황금보검이 신라자체적으로 제작했나 아니면 수입했나하는 논쟁이 있었으나, 현재는 로마문화권에서 제작주문하여 수입한 것으로 정리되고 있다.보검을 자세히 보면 테두리와 내부가 수많은 금 알갱이로 장식되어 있는데, 바로 그리스 로마 양식인 누금 기법이다.이 황금보검의 원형은 트라키아에서도 출토되었다.트라키아는 375년부터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촉발한 훈족,즉 흉노의 근거지다.
▲ 황남대총 출토 유물-로마에서 수입한 유리잔-당시 신라가 해로를 통하여 로마와 교역했음을 증명하는 유물이다 ▲ 신라가 울진지역을 신라영토로 삼는다는 울진봉평신라비(蔚珍鳳坪新羅碑, 경북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 91) 돌비석에 새겨진 글의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 김해 대성동에서 출토된 선비족의 구리솥-동복(좌),경주 금령총에서 출토된 선비 기마상(우)
이 돌비석의 발견으로 울진지역이 삼국시대 신라의 영토였음이 밝혀졌으며,법흥왕 11년, 서기 524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고 있다.
▲ 경주지역의 적석목곽분의 주인은 2세기 이후 흉노족을 흡수하고 초원의 주인이 된 선비족
▲ 일본무사들의 머리모양은 사실 북방 선비족의 풍습에서 나온 머리모양이다. '황비홍'이 하고 나온 머리모양도 모두 북방 초원세력의 머리모양이다.지나문헌에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 흔들거리는 신라금관 -모용선비족장들도 흔들리는 관을 썼다
그러나, 신라를 개국하고 가야를 지배한 실질적인 세력은 4세기 기마군대를 앞세우고 동해안을 따라 들어온 모용선비족입니다. 모용선비족이 바로 김알지 성씨로 개명하고 신라왕조의 주인이 된 실체들입니다. 따라서 신라와 가야는 모용선비족의 나라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에 사학계의 논쟁과 연구를 제안합니다.
신라 김씨왕조의 주인을 보통 김알지세력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기존 인식과 전혀 다르다를 알아야 합니다. 신라 법흥왕은 모진에서 김원종으로 성과 이름을 개명한 왕입니다. 이는 [삼국사기][만주원류고][양서]에서 모두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컨대,요사렴(姚思廉)요사렴)이란 당나라 학자가 쓴 [梁書(양서)]에는 신라 법흥왕이 즉위 8년, 서기 521년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친 사정을 기록하면서 신라 임금의 성은 「募(모)」요 이름은 「秦(진)」 이라고 적고 있다. 그 뒤 이연수란 당나라 학자가 편찬한 [南史(남사)]란 역사책에는 법흥왕의 성을 「募(모)」 이름을 「泰(태)」로 기록하고 있다. 秦과 泰는 글자 모양이 비슷하기 때문에 梁書(양서)의 기록을 南史(남사)에서 옮겨 적다 오기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 다른 지나사서 [通典(통전)]에는 법흥왕의 성명을 「慕秦」으로 적고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성과 이름하나 구분못해서 모진이라고 기록했겠는가!
법흥왕이 김씨로 개명한 이후 모용선비출신의 왕들은 김씨가 되었으며, 신라 문무왕은 자신의 비문에 김일제 후손이라고 기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모용선비족이 조상을 바꾸었다면 왜?
그것은 고구려가 모용선비족의 공격으로 인하여 받은 당한 수모와 고통을 이해해야 비로소 인식될 수 있습니다. 신라왕조가 모용선비족임을 고구려가 알게 된다면 고구려가 신라를 가만 둘리도 없고, 신라의 구원요청을 절대 들어줄 리도 없습니다.자신의 할아버지 고국원왕이 선비족의 침략을 통하여 당한 수모와 치욕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광개토태왕이 그러한 사실을 안다면 절대 <왜>의 침략으로부터 신라를 구원할 수도 없는 일이며, 오히려 초토화시켜야 할 적국에 불과하기 때문이였을 것입니다.
조선말 강증산 선생은 뼈다구(조상)를 바꾸면 후손이 망한다고 했습니다. 신라 법흥왕이전까지 신라왕족은 모두 모씨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라가 김씨왕조라는 인식은 진흥왕시대부터입니다. 법흥왕은 자신의 이름을 모진에서 김원종으로 개명했다고 [삼국사기][양서-신라전][만주원류고]에서는 공통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경북 울진군에서 발견된 법흥왕봉토비문에도 수 많은 모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라 법흥왕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법령을 공포하고 불교를 공인하는 등 나라의 기반을 다지는 신라개혁에 앞장서게 됩니다. 순장의 인원도 사람에서 모형으로 대체하도록 국법으로 명시한 것은 아마도 초원문화를 포기하고 농경문화를 선택한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4-5세기 경주.김해.일본열도의 적석목곽분의 주인은 바로 선비족입니다. 선비족 중에서도 모용선비족에 해당된다 할 것입니다.
선비족의 혈통적 뿌리를 추적한다면 만주지역의 숙신(말갈=몽골)족의 갈래로 흑룡강.송화강지역에서 어로생활하다 초원지역으로 이주하여 고구려 광개토태왕이 정벌한 거란족의 주거지역이였던 사이무렌강 지역에서 유목생활을 하였습니다. 선비족을 대통합하여 초원을 지배했던 단석괴가 죽자 다시 분열하여 지나 북부지역으로 이주하여 용병생활을 하다가 북위.토욕혼(탁발선비족).전연(모용선비족) 등 선비국가들을 지나대륙에 건설하게 됩니다.
대홍안령 지역을 조상의 고향으로 두고 있는 탁발선비족의 나라-북위의 경우 북위황제의 어머니의 나라이기도 한 고구려를 상국으로 섬기며, 수.당나라를 낳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고구려가 기른 북위에서 나온 새끼나라 수나라.당나라가 9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고구려에 도전하다가 나라가 망하고 처참하게 패배하고 항복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선비족 중에서 모용선비족과 고구려는 악연이였습니다. 왜냐하면 모용선비족의 나라 전연이 중원을 공격하기 위해 후방지원을 할 지도 모를 고구려를 먼저 선제공격하여 고국원왕의 황후와 태후를 인질로 데리고 가고, 미천왕의 무덤까지 도굴하여 시신까지 파헤쳐 갔기 때문입니다. 고구려가 모용선비족에게 처참하게 당할 수 밖에 없었던 배경에는 당시 모용선비족 공격에 대응했던 고구려의 전술이 치명적으로 빗겨 나가는 바람에 당했던 고구려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사건이였습니다.
▲ 고구려와 전연(모용선비족)과의 전쟁과정에서 이주한 모용선비족의 기마군대 이주로
즉, 당시 고구려 고국원왕은 모용선비족이 험한 남쪽루르를 타지 않고 편한 북쪽루트를 공격루트로 이용할 줄 알고 동생 고무를 사령관으로 삼아 4만을 선비족이 진입하기 좋은 북쪽루트를 지키게 했고,고국원왕 자신은 1-2만의 군대로 남쪽루트를 지켰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상을 깨고 모용선비족 전연은 험한 남쪽루트로 5만의 대군을 집결시켜 공격해 들어왔습니다.그야말로 속수무책 고국원왕은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대신 전연 모용황의 동생이 이끈 1-2만의 군대는 고국원왕의 동생이 이끄는 고구려 4만의 군대에 패하여 쫓기던 중에 뿔뿔히 흩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그 모용선비군대의 일부가 고구려북부노선에서 패하여 일부가 동해안을 따라 경주.김해지역으로 들어와서 사로국을 무너뜨리고 신라를 개국하고 무덤들을 남기니 경주지역의 적석목곽분입니다.[윤복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