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문헌이 고증한 신라왕조 글쓴이 younbokhye 날짜 2010.04.30 18:15


[사진자료]경주지역 대릉원

[문헌과 고고학]신라 김씨왕조는 김씨 성으로 개명한 선비모용씨
 
법흥왕 때까지 중국 역사서에서 신라 왕의 姓을 金(김)으로 기록한 사례는 없다. 신라 왕의 姓을 金으로 적고 있기는 법흥왕을 뒤이은 진흥왕 때부터이다. 《남사(南史)》.《통지(通志)》.《태평어람(太平御覽)》 등에서는 모두 성이 '모(慕)'요 이름은 '진(秦)'이라 썼고, 《통고(通考)》에서는 《양사(梁史)》를 인용하였기 때문에 역시 똑 같다.
 
[삼국사기-신라본기 제4권 법흥왕]의 기록을 그대로 옮겨본다.
 
<법흥왕이 즉위하니 이름은 원종이다. 『책부원구란 옛 책에는 성은 募(모), 이름은 泰(태)라 했는데, 태는 삼국유사 王曆(왕력)에는 秦(진)이라 돼 있다』 지증왕의 원자로서 어머니는 연제부인이요, 왕비는 박씨, 보도부인이다. (法興王立, 諱原宗『冊府元龜, 姓募名泰, 泰, 遺事王曆作秦』, 智證王元子, 母延帝夫人, 妃朴氏 保刀夫人)>

姚思廉(요사렴)이란 당나라 학자가 쓴 梁書(양서)에는 신라 법흥왕이 즉위 8년, 서기 521년 중국 강남에 자리잡고 있는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친 사정을 기록하면서 신라 임금의 성은 「募(모)」요 이름은 「秦(진)」 이라고 적고 있다.

천마총은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조성된 무덤으로 추정된다. 밖에서 보면 높이 12.7m의 거대한 원형 봉분이고 내부는 나무 관 위로 돌을 쌓아 만든 전형적인 북방 유목민들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이다.
 
경주 황남동 고분군 일대를 정비, 정화하여 대릉원(大陵苑)이라 이름 지은 고분공원 안 서북쪽에 위치한 고분으로 원래 경주155호 분이라고 불려왔던 밑지름 47m, 높이 12.7m의 원형분(圓形墳)이다. 1973년에 발굴되었는데 무덤 내부에서 금관, 금제과대, 요패(腰佩), 팔지, 반지, 목걸이, 환두대도(換頭大刀), 금제조익형관식(金製鳥翼形冠飾)과 금제접형관식(金製蝶形冠飾), 금동모(金銅帽), 금동제경갑(金銅製脛甲) 등의 유물과 이외에도 많은 칠기와 그릇 등이 발견되었다.
 
4세기 이후 등장한 경주지역의 적석목곽분의 주인은 시베리아 샤먼문화의 원형인 신라금관이 증명하듯이 인류학자들이 세계 샤먼문화의 시원지라고 규정하고 있는 동북아 시베리아 지역의 북방 유목민족인 선비족이다. 김해.일본열도지역의 적석목곽분의 주인은 신라권력에서 소외당하고 추방당한 선비세력이다.
 
선비족은 북흉노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많은 흉노인들을 흡수하여 흉노계 선비족으로 형성되었다. 물론, 한족화된 김일제 흉노세력은 선비족이 신라에 유입되기 전 후한의 멸족을 피하여 산동지역에서 해로를 통하여 한반도 동남부 지역으로 들어와 김일제 남동생 후손 김수로는 가야를 개국하고, 김일제 후손 김알지세력은 신라세력를 형성하고 있있다. 고구려군에 쫓긴 선비족이 신라땅으로 들어와 등에 업은 세력이 김알지 세력이고 법흥왕때부터 김씨 성으로 바꾸고 김알지 후손행세를 한 셈이다. 이러한 역사적 진실을 조상의 성씨를 김씨로 바꾸고 김씨 행세를 하고 있는 모씨 후손들은 명확히 알도록 문헌적으로나 고고학적으로 증명해 주어야 한다.
 
신라 김씨왕조는 김알지세력을 등에 업고 석씨 왕조를 몰아내고 신라권력을 장악한 선비족 모씨(모용씨)다. 신라 김씨왕조의 조상은 모씨 성을 가진 선비족인 것이다. 그 결정적 근거자료들을 제시하도록 하겠다
 
김씨로 성을 바꾼 법흥왕이전의 신라 왕들은 선비족 모용씨였다!

[문헌자료]신라 김씨왕이 선비족 모용씨였다는 결정적 문헌은 있을 수 없다. 金씨왕들은 기존의 신라인들과 힘을 합쳐 새 나라를 건설하는 입장이었던 만큼 「우리는 대대로 신라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이다」는 기록을 남기는 게 정상이지 「원래는 모용 선비였는데 석씨 임금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는 기록을 남길 리 만무하다.
 
하지만 金씨왕의 기원이 모용선비임을 알게 해주는 약간의 단서는 있다. <사진8-신라 지배층의 얼굴> 신라 법흥왕에게는 두 개의 姓(성)과 이름이 있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권 법흥왕의 기록을 그대로 옮겨본다.
 
<법흥왕이 즉위하니 이름은 원종이다. 『책부원구란 옛 책에는 성은 募(모), 이름은 泰(태)라 했는데, 태는 삼국유사 王曆(왕력)에는 秦(진)이라 돼 있다』 지증왕의 원자로서 어머니는 연제부인이요, 왕비는 박씨, 보도부인이다. (法興王立, 諱原宗『冊府元龜, 姓募名泰, 泰, 遺事王曆作秦』, 智證王元子, 母延帝夫人, 妃朴氏 保刀夫人)>
 
姚思廉(요사렴)이란 당나라 학자가 쓴 梁書(양서)에는 신라 법흥왕이 즉위 8년, 서기 521년 중국 강남에 자리잡고 있는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친 사정을 기록하면서 신라 임금의 성은 「募(모)」요 이름은 「秦(진)」 이라고 적고 있다.
 
그 뒤 이연수란 당나라 학자가 편찬한 南史(남사)란 역사책에는 법흥왕의 성을 「募(모)」 이름을 「泰(태)」로 기록하고 있다. 秦과 泰는 글자 모양이 비슷하기 때문에 梁書(양서)의 기록을 南史(남사)에서 옮겨 적다 오기한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중국역사서 通典(통전)에는 법흥왕의 성명을 「慕秦」으로 적고 있다.
 
1988년 경북 울진군 봉평리에서 발견된 「봉평 신라비」는 법흥왕 즉위 11년, 서기 524년에 세운 비석이다. 여기서는 법흥왕을 「牟卽智(모즉지)」로 적고 있으니 牟는 성이요 卽은 이름 智는 존칭이다. <사진9-봉평신라비>
 
봉평 신라비에는 모두 35명의 이름이 나오는데, 임금 모즉지를 비롯해 葛文王(갈문왕:신라 왕족) 牟心智(모심지), 비문을 적은 牟珍斯利公(모진사리공), 비문을 조각한 牟利智(모리지) 등 4명의 이름이 「牟」로 시작되고 있다. 그렇다면 「牟」를 姓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姓을 쓰지 않고 이름만 기록했다면 이렇게 여러 사람이 같은 글자로 시작할 리 없다.
 
봉평 신라비의 법흥왕 성명 「牟卽(모즉)」은 중국 역사서의 慕秦≒募秦(모진)과 비교할 때 글자 모양은 다르지만 발음은 「모(MO)」로 동일하다. 삼국시대의 경우 인명이나 지명을 표기할 때 발음이 같거나 비슷한 한자가 넘나들면서 쓰이는 경우가 흔하다.
 
한 예로 가야를 加耶, 伽倻 또는 加羅(가라), 駕洛(가락) 등으로 다양하게 기록하고 있다.
 
중국 역사서의 慕秦과 봉평 신라비의 牟卽 또한 이런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결국 중국 역사서와 봉평 신라비가 공통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봉평 신라비를 세운 524년까지는 법흥왕이 「미스터 김(Mr. KIM)」이 아니라 「미스터 모(Mr. MO)」였다는 사실이다.
 
또 법흥왕은 지증왕의 큰 아들로서 신라 金씨 왕조의 뚜렷한 자손이니, 결국 법흥왕 이전까지의 신라 金씨 왕들의 姓이 상식과는 달리 「모(MO)」였다고 믿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법흥왕 때까지 중국 역사서에서 신라 왕의 姓을 金(김)으로 기록한 사례는 없다. 신라 왕의 姓을 金으로 적고 있기는 법흥왕을 뒤이은 진흥왕 때부터이다.

《만주원류고》 권4, 부족4에는 신라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양서(梁書)》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을 소개하고 있다.
" ......그 나라(신라)는 백제의 동남쪽에 있다. 동쪽은 대해에 가까이 있고 남과 북은 고구려와 백제와 접해 있다. 위(魏)나라 때에는 신로(新盧)라고 하고, 송(宋)나라 때는 신라(新羅) 혹은 사로(斯盧)라고 하였는데 나라가 작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외국에 사신을 통하지 못하다가 보통(普通) 2년(521)에 이름이 "모진(募秦)"이라는 왕이 처음으로 백제의 사신을 따라가서 방물을 바치도록 하였다."(졸저, 《만주원류고》, 152쪽 참조)
 
이 책의 편자들은 여기의 모진(慕秦)에 관하여 안어의 형식으로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고 있다.
"생각건대, 《남사(南史)》.《통지(通志)》.《태평어람(太平御覽)》 등에서는 모두 성이 '모(慕)'요 이름은 '진(秦)'이라 썼고, 《통고(通考)》에서는 《양사(梁史)》를 인용하였기 때문에 역시 똑 같다. 또한 성씨가 바뀐 이유가 무엇인지 모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법흥왕의 이름은 "원종(原宗)이요, 지증왕의 원자(元子)"라고 하였다. 그리고 원종에 대해 주석하기를 "《책부원구(冊府元龜)》에서는 성이 모(慕)요, 이름이 태(泰)라 한다"라고 하였다.(《삼국사기》, 권제4)
 
진흥왕이 在位(재위) 25년(서기 564년) 北齊(북제)에 사신을 보냈을 때 중국 역사서 北齊書(북제서)는 신라왕의 성명을 「金眞興(김진흥)」으로 적고 있다. 중국 史書에서 신라 왕의 姓을 金씨로 기록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또 隨書(수서)에서 「수나라 문제 14년(서기 594년, 신라 진평왕 16년) 신라왕 金眞平(김진평)이 사신을 보냈다」고 기록하는 등 564년 이후에는 신라 왕의 姓을 金으로 분명히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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