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오산과 오판 부른 희망적 사고가 초래한 재앙, 한국전쟁 글쓴이 신상구 날짜 2021.03.19 01:30

   소련이 붕괴된 후 과거 자료들이 공개되면서 한국전쟁의 발발과 관련된 많은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의문이 풀리지 않고 있다. 맥아더 사령부는 왜 북한이 남침할 수 있는 전력을 갖추지 못했다고 판단했을까? 스탈린과 김일성은 왜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을까? 스탈린이 남침 직후 유엔의 소련군 대표에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참석하지 않도록 지시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맥아더 장군은 왜 중국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며, 참전하더라도 소규모에 그칠 것이라고 예측했을까? 왜 정전협상 과정을 2년이나 끌어야 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의 중심엔 지도자들의 오산과 오판이 자리 잡고 있다. 맥아더 사령부는 중국 혁명에 참여했던 한국인들이 1949년 말 북한으로 귀국하면서 북한의 전력이 증강됐다는 점을 간과했다.
   스탈린과 김일성은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지역인 중국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으로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기에, 한국처럼 전략적 우선순위가 떨어지는 지역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미국은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즉시 개입했다. 중국 혁명과 소련의 핵개발이 미국에는 큰 위기로 다가왔고, 이로 인해 미국의 냉전 전략이 경제·심리적 봉쇄정책에서 적극적인 군사적 개입 정책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알지 못했다.
   스탈린은 유엔 안보리에서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음으로써 미국 주도로 조직된 유엔군이 한반도에 파병된다면, 미국을 유럽이 아닌 아시아에 잡아둘 수 있으며, 그 결과 유럽에서 소련에 더 유리한 국면이 조성될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큰 반발 없이 독일과 일본의 재무장화를 할 수 있었다.
   맥아더 사령부는 1949년 혁명에 성공한 중국이 그 이듬해 이웃 국가의 전쟁에 개입하지 못할 것으로 예측했다. 만약 참전하더라도 그 규모가 체면치레에 그칠 것으로 판단했다. 또한 1945~1949년 중국의 북부 지역과 만주의 추운 산악지대에서 전투경험을 갖고 있었던 중국군의 전투 역량을 과소평가했다. 미군의 방어선은 무너졌고, 맥아더는 해임됐다.
  정전협정 과정에서 북한에 치명적 타격을 입힌다면, 북한이 재기할 수 없을 것이며 상당한 양보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봤다. 그 결과 정전협상에 2년이 걸렸고, 북한에 대한 엄청난 폭격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북한의 주요 시설은 지하화되고, 주요 인물들은 압록강 너무 만주로 대피한 상황이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자료들에는 지도자들의 오산과 오판이 곳곳에서 관찰되고 있다. 그 배후에는 ‘희망적 사고’(wishful thinking)가 자리잡고 있었다. 상대방이 내가 예측한대로 움직일 것이고, 따라서 내가 수립한 전략이 성공할 것이라는 믿음이다.
   더 심각한 사실은 오산과 오판에 의한 희망적 사고가 부정적 효과를 초래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할 경우 재앙이 반복될 수 있다는 점이다. 미국은 정전협상 과정에서 이뤄진 북한에 대한 폭격이 상당한 효과를 냈다고 오판했다. 이 전략을 1969년에서 1973년까지 닉슨 행정부가 베트남 평화협정을 위한 회담 기간 재현했다. 북베트남뿐만 아니라 호찌민 루트가 있었던 라오스와 캄보디아에 대한 폭격을 강화했다. 그러나 미국은 어떤 성과도 보지 못했다. 오히려 남베트남의 게릴라가 평화협정의 당사자로 참여하고, 캄보디아에 대한 폭격은 크메르루주의 힘을 강화하여 킬링필드라는 결과를 초래하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희망적 사고가 반드시 부정적 효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희망적 사고를 갖고 미래를 전망할 때 조직 구성원들로 하여금 조직원으로서의 정체성을 갖도록 할 수 있다. 문제는 희망적 사고가 부정적 효과를 낼 때 나타난다. 특히 한국전쟁의 경우는 희망적 사고가 큰 재앙을 초래했던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미국의 정책 변화를 읽지 못했다.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은 북한과 중국의 군사력을 과소평가했다. 전쟁 전략이 상대방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도 잘못된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과 상대방에 대한 잘못된 평가는 희망적 사고를 갖도록 했으며, 궁극적으로 더 큰 비용을 지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야기했다. 남베트남이 대한민국처럼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닉슨 행정부의 생각은 남베트남 정부를 잘못 파악한 것이었다. 그 결과는 남베트남 정부의 몰락이었다.
   유사한 사례는 반공포로 석방 사건에서도 잘 드러난다. 지금까지 반공포로 석방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이끌어낸 ‘쾌거’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한국 정부가 정전협정에 반대하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반공포로 석방 이전인 1953년 5월 30일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는 친서를 통해 한국과의 상호방위조약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유엔군사령관의 승인을 받지 않은 채 반공포로를 석방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포로 석방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양보를 받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아무것도 양보할 의사가 없었다. 오히려 미국이 아니면 무너졌을 대한민국이 미국의 정책에 정면 대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승만 제거 계획이 나온 것도 이러한 인식 속에서 가능했다. 단지 한국군이 단독으로 북진하는 ‘재앙’이 발생하지 않도록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유엔군사령관 겸 주한미군사령관이 장악하는 대신 한국군의 유지비를 미국이 부담하도록 한 한·미 합의의사록이라는 안전판을 만들었다. 한·미 상호방위조약은 1953년 가조인되었지만, 한·미 합의의사록이 체결된 1954년에야 발효되었다. 그리고 1972년 주한미국 대사였던 하비브는 한·미 간에 가장 갈등이 심했던 사건 세 개를 예로 들면서 그 첫 번째로 반공포로 석방 사건을 상기하였다. 한·미 간의 신뢰에 큰 부정적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또 다른 희망적 사고는 1969년의 닉슨 독트린이 한국에는 적용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닉슨 독트린을 통해 미국은 아시아에서 미군의 철수를 선언했다. 당시 한국 정부나 전문가들, 그리고 한국의 언론들은 한국군이 베트남에 파병되어 있는 상황에서 한국은 예외가 될 것으로 판단했다. 1969년 8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닉슨과 박정희가 만났을 때 주한미군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한국의 언론들은 한국이 닉슨 독트린의 유일한 예외지역이 될 것이라고 대서특필했다.
   완전한 희망적 사고였다. 당시 한국 정부와 전문가들은 미국이 처했던 절박한 사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달러화의 금 태환을 포기할 정도로 경제상황이 악화되어 있었고, 이로 인해 1964년부터 공을 들였던 베트남마저 포기해야 했다. 1971년 주한미군 7사단이 철수하였고, 닉슨 대통령은 1975년까지 주한미지상군의 완전 철수를 계획하라고 지시하였다. 그 결과 미국의 주한미군 감축 정책은 물론 닉슨 행정부의 보호무역 정책에 적절히 대처할 수 없었다.
   희망적 사고는 북한에 대한 정책에서도 드러난다.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합의, 1992년 한반도에 있는 미군 핵무기의 완전 철수는 한반도의 평화체제를 이끌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1993년 북한이 핵확산조약으로부터 탈퇴하면서 북핵 위기가 발생했다. 또한 경제위기와 김일성의 사망으로 북한이 제2의 고난의 행군을 하면서 북한 붕괴를 예측한 전문가들이 많았지만, 북한은 지금까지 버티고 있다. 유엔의 경제제재가 계속되면서 북한은 사회 경제적으로 어려워졌고, 많은 탈북자들이 발생하고 있지만 북한 정권이 붕괴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북한 붕괴의 희망적 사고가 계속되는 동안 북한은 핵과 미사일을 개발, 한반도와 동북아에 가장 큰 위협이 되고 있다. 상대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미국에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서 미국 정부의 정책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쏟아져나오고 있다. 그러나 지피지기(知彼知己) 없이 희망적 사고에 근거한 내용이어선 안 된다. 미국·중국·일본·북한의 상황뿐만 아니라 한국이 처해 있는 현실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에 바탕해서 다양한 전략과 옵션을 준비해야 한다. 이런 토대 위에 플랜 B를 준비해야 한다. 근거 없는 희망적 사고가 초래한 ‘비용’을 또다시 치러서는 안 될 것이다.
                                                                                             <참고문헌>  
   1. 박태균, "한국전쟁, 미.소의 희망적 사고가 초래한 재앙", 중앙일보, 2021.3.18일자.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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