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熱河日記)'는 조선 후기 실학자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ㆍ1737∼1805)이 청나라에 다녀와 쓴 기행문이다.
손자 박주수가 그린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 초상
연암이 정조4년(1780년) 6월24일부터 10월27일까지 중국을 여행한 것을 소개하는 이 작품은 일기와 함께 「호질(虎叱)」,「허생전(許生傳)」등 한문 단편소설을 비롯해 다양한 글을 포함하고 있다.
연암은 당시 청 건륭제의 70세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로 청의 수도인 연경(燕京ㆍ베이징)에 간 8촌형 박명원(朴明源)을 수행하며 중국을 여행했다.
경치나 풍물을 단순히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당시 중국의 신문물(新文物)과 실학사상을 소개한 열하일기는 책이 완성되기도 전에 선비들이 돌려 가며 읽었을 정도로 화제와 충격을 몰고 온 문제작이었다.
주류 기득권층의 무능과 탐욕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풍자한 데다 정통 고문의 틀을 이탈한 개성적 문체도 파격과 도발 그 자체였기 때문에 보수파의 반발을 사 1783년 이래 1세기 동안 금서(禁書)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반체제 지식인의 해외 견문을 담은 `불온 이념서적'이었던 셈이다.
필사본 26권 10책으로 남아 있는 한문 원작은 20세기 초부터 여러차례 활자본으로 공간(公刊)됐으며 민족문화추진회, 이가원씨 등의 현대 우리말 번역본도 여럿 나왔고, 북한에서 1950년대에 출간됐던 리상호씨 번역본도 국내에서 구할 수 있다.
“아, 슬프다! 한나라 낙랑군이 있었던 평양은 지금 평양이 아니라 요동의 평양이었다. 그런데도 한사군을 압록강 안으로 몰아넣어 조선의 강토가 줄어들었도다.”
연암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 제1권 도강록의 한 구절이다. 240년 전의 글이다. 북한 평양을 낙랑군이라고 못 박은 지금 강단 사학계와 평행이론이 느껴진다. 연암의 북경 여행길은 탄식으로 시작된다. 연암이 44세 때인 1780년(정조4) 6월 24일(음력) 때였다. 청 건륭제의 70세 생일 축하사절단으로 중국에 가는 팔촌 형 박명원을 따라 연암은 6개월간 6천 리 여정에 나섰다. 사행길 하루하루가 연암에겐 문화적 충격이었다. 연암의 <열하일기>는 명나라에 대한 의리와 중화사상으로 꽉 막힌 조선 사회에 일대 선풍을 일으켰다.
조선은 건국 이래 명과 청에 수많은 사신을 보냈다. 특히 명나라가 망하고, 조선 후기가 되면서 중국 방문은 더욱 활발해졌다. 1637년부터 1894년 청일전쟁까지 조선이 청에 보낸 연행사는 모두 507회였고, 청이 조선에 보낸 칙사(勅使)는 169회다. 조선이 세 번 사신을 보내면, 청나라는 1회 사신을 보냈다는 얘기다. 이에 비해 일본 통신사의 파견은 1428년(세종 10년)을 시작으로 왜란 전까지는 5회, 전쟁 후 1607부터 1811년(순조 11년) 마지막 사행에 이르기까지 총 12차에 그친다.
북경행, 즉 연행(燕行)은 18세기 이후 조선 지식인들의 세계 인식과 사유의 영역이 확장되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 우물 안 개구리 신세였던 조선에게 새로운 사상과 문물을 흡입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특히 연행을 통한 선진 문물 체험은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같은 북학파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북학파들은 청나라를 오랑캐로 멸시하는 편견에서 벗어나 새롭게 인식할 것을 촉구했다. 더 나아가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얕볼 게 아니라 그들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학파들에게 연행은 실학적 면모를 형성하는 자각의 기회로 작용했고, 비로소 참다운 실학자로 성장하는 디딤돌을 마련했다. 명과 청나라로 떠난 사신은 대개 두어 달 가량을 베이징에 체류했다. 베이징의 풍물 하나하나가 새로운 볼거리였다. 귀국한 다음에는 연행 중에 접한 다양한 체험을 기록에 남겼다. 보통은 기행문, 연행록이라고 하는데 유독 연암 박지원만 <열하일기>라고 이름 붙였다. 그 이유는 이렇다. 연암 자체가 공식 사신이 아니었다. 또 열하 방문은 예정 일정에 없었다. 열하는 청 강희제(재위 1661~1722) 이래, 역대 황제들이 거처했던 ‘여름철 피서용’ 별궁 소재지. 지금 헤베이성 북부 청더시에 속해 있다. 베이징에서 약 250km 떨어진 난하 지류인 무열하 서안에 위치한다. ‘열하’라는 명칭은 ‘겨울에도 강물이 얼지 않는다’라는 데서 유래했다.
1780년 8월 1일 연암 일행은 여느 조선 사절과 같이 중국 연행의 최종 목적지인 베이징에 도착했다. 그러나 황제는 5월 22일부터 베이징을 떠나 열하의 피서산장에서 머물고 있던 터였다. 연암은 베이징에서 동북쪽 열하까지 다시 5일 동안 밤낮없이 달린다. 일정이 촉박해 탓에 이때 고생담은 <열하일기>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 등에 생생하게 실려 있다. 급거 열하로 가는 길에서 조선 사절단은 사방을 가득 메운 수레와 노새·말·낙타 등의 방울 소리, 벌판을 울리는 채찍 소리에 압도당한다. ‘진공(進貢)’이라고 쓴 누런 깃발을 꽂은 채, 황제에게 바칠 공물을 싣고 가는 행렬이었다. 당시 청나라의 국력은 최전성기에 달했다. 아시아 대륙의 모든 나라가 참례하러 왔다. 진상품들은 가히 움직이는 백화점이었다. 천하만국의 기이한 새와 괴상한 짐승들도 많았다. 호랑이와 표범은 물론 곰과 여우, 순록 등은 이루 다 헤아일 수 없을 정도였다. 낙타, 타조, 러시아 개, 코끼리 등을 비롯해 옥으로 만든 기물과 보물, 산호 같은 진귀한 공물도 구경할 수 있었다.
<열하일기>중 「만국진공기」 부분뿐만 아니라 다른 연행사가 남긴 기록을 살펴보면, 조선에서 보기 어려운 칠면조 등 이국적 동물을 보는 것이 주요한 체험의 하나로 꼽혔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연암은 학문적 탐구심은 물론 남다른 관찰력과 세상을 보는 통찰력이 뛰어났다. 1792(정조 16년) 경남 함양군 안의 현감으로 부임하러 가던 중 경상감사의 부탁을 받고 살인사건 4건을 다시 조사하기도 했다. 연암은 ‘조선판 CSI’ 이자, 명탐정 역할로 명쾌하게 해결했다. <열하일기>에서도 여행 중에 접한 다양한 동물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연암은 황제의 천추절 행사를 앞두고 여러 기이한 동물과 함께 부인 옷을 입고 치장한 원숭이 한 마리가 수레를 타고 가는 것을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
조선 시대에는 성리학 사상이 지배적이던 시기였다. 다른 소설에 비해 <서유기>의 존재가 크게 알려지지 못한 편이다. 게다가 국가 정책상 민심을 어지럽히는 책으로 기피되었다. 연암 역시 <서유기>를 읽어본 흔적은 없는 것 같다. 아마 연암이 진작 <서유기>를 읽어보았다면, 열하에서 본 원숭이 ‘산도’와 ‘금고리로 이마를 동여매고’ 수레를 끈 마부를 어떻게 달리 표현했을지 궁금하다. <열하일기>는 완본이 나오기도 전에 9종의 필사본이 돌 정도로 당시 대중들 사이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1792년 정조는 사회가 혼란스러운 이유 중 하나로 당시 유행하던 소설체 문장을 거론하며, 그 근원에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있다고 지목한다. 이른바 ‘문체반정’이다. <열하일기>는 당대 인기 베스트셀러에서 한순간에 불온서적으로 낙인찍혔다.
<참고문헌>
1. 임화섭, "금서목록 올랐던 `열하일기", 연합뉴스, 2006.2.22일자.
2. 박승규, "열하로 간 박지원... 서유기 일기도 전에 손오공 만났네", 충남일기, 2021.3.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