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세종시의 상징인 전월산과 임난수 장군 글쓴이 신상구 날짜 2021.02.08 02:27

                                                                         세종시의 상징인 전월산과 임난수 장군
 

▲ 임난수 장군은 날마다 전월산에 올라 멸망한 고려왕에 대한 간절한 마음으로 북쪽을 향해 절을 올렸고 전월산 정상에 있는 바위에 앉아 망국의 한을 달랬다. 사진은 상려암. 부안임씨 대종회 제공
▲ 임난수 장군은 날마다 전월산에 올라 멸망한 고려왕에 대한 간절한 마음으로 북쪽을 향해 절을 올렸고 전월산 정상에 있는 바위에 앉아 망국의 한을 달랬다. 사진은 독락정. 부안임씨 대종회 제공
   '중국 원나라가 망하고 明(명)나라가 들어섰지만 제주도는 여전히 원나라의 직할영지처럼 몽고인들이 주둔하여 대규모 말 사육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고려의 통치가 이들 몽고인들에게는 먹히질 않았다. 역사는 이들 말 사육을 하는 몽고인들을 '목호'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 몽고 목호들은 나름대로 제주도를 방어하기 위해 일본의 왜구들까지 용병으로 끌어 들여 병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이럴 때 明에서 제주도에 있는 말 3000 마리를 보내라는 요구가 떨어 졌고 고려는 화약을 받는 조건으로 이를 수락했다.

   그러나 제주도의 목호들은 이에 반발하여 주민 300명을 살해하는 등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고려는 난을 평정하기 위해 1374년 8월 최영 장군을 최고사령관으로, 임난수(林蘭秀)장군을 비장으로 하여 전라도 나주포에서 출정에 나섰다.

   군사 3만5600명에 병선 300척으로 큰 규모의 원정군이었다. 그러나 제주도 상륙부터 쉽지가 않았다. 그렇게 목호의 몽고인들 저항이 완강했다. 치열한 공방 끝에 고려군이 상륙에 성공했고 목호들은 제주도 서귀포 남쪽 범섬으로 후퇴 했다.

   범섬 역시 해안이 가파르고 해상에서는 은폐물이 없어 상륙작전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임난수 장군의 뛰어난 전략으로 적을 제압하고 추격했다.

   그 치열한 싸움 가운데 뛰어든 임난수 장군이 정신없이 칼을 휘두르는데 갑자기 숨어 있던 적이 뒤에서 나타나 임난수 장군을 칼로 내리쳤다. 순간 장군의 오른 팔이 떨어져 나갔다. 피가 쏟아져 내렸다. 장군은 부장에게 떨어진 팔을 주어 자신의 화살통에 집어넣게 한 다음 그대로 계속 싸웠다. 이를 본 고려 군사들은 크게 감동하여 함성을 지르며 적진을 완전히 초토화 시켰다. 그리고 자신의 팔을 자른 적을 잡아 투구를 벗겨 보니 몽고병이 아니라 일본 왜구임이 밝혀졌다. 많은 왜구들이 용병으로 제주도에 와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로써 제주도는 완전히 몽고의 손아귀에서 벗어 날수 있었고 고려의 통치권이 행사 될 수 있었다.

   고려 우왕은 임난수 장군의 이와같은 전공에 크게 감동하여 종 4품의 봉선대부를 제수하고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자에게 주는 자금어대까지 하사 했다.

   팔 하나를 잃은 장수로서 명예롭게 예편을 하는 것인데 다시 문관으로 등용을 한 것이다. 그러니까 문·수를 다 겸한 것이 된다.

   문관으로서도 삼사우윤에 올라 국가 전곡의 출납회계를 관장하는 중책을 수행하였으며 국가의 제사와 조정의 의전을 주관하는 봉익대부 전의시사 까지 역임하는 등 많은 활약을 했다.

   그러나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 왕위에 오르자 임난수 장군의 운명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이성계는 그를 불러 새 왕조에 참여하기를 회유하며 벼슬을 제수하려 했으나 그는 한 하늘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이를 거절하고 두문동에 은거했다. '두문불출'이라는 말이 이곳 두문동에 고려말 충신들이 이성계에 반대하여 은거한 데서 비롯되는데 임난수 장군도 그렇게 했다.

   얼마 후 그는 고향인 전라도 부안으로 가기로 하고 두문동을 떠나 남으로 가다가 지금의 세종시 전월산 아래 터를 잡고 정착하였고 부안 林(임)씨의 시조가 되어 이 일대에 林씨의 집성촌을 이루며 번창했다.

   임난수 장군은 날마다 전월산에 올라 멸망한 고려왕에 대한 간절한 마음으로 북쪽을 향해 절을 올렸고 전월산 정상에 있는 바위에 앉아 망국의 한을 달랬다. 그래서 절을 올리던 봉우리를 부왕봉, 그 바위를 상려암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일편단심 고려에 충신으로 고고하게 살던 장군은 1407년 66세로 파란만장의 생을 마감했다.

   지금 세종시 금강변에 있는 독락정은 차남인 임목이 1437년 양양도호부사를 마치고 낙향하여 건립한 것인데 매년 부안 林씨 전서공파 대종회(회장 임헌옥) 주최로 '독락문화재'를 열어 장군의 뜨거웠던 충성심을 기리고 있다.

   그리고 전월산은 세종시를 행정수도로 지정할 때 그 '배후 산'으로 중심이 되어 주었다. 세종시의 상징이 된 것이다.

                                                                                       <참고문헌>

    1. 변평섭, "두 임금 섬기지 않은 명장의 충심 오롯이 품은 곳", 충청투데이, 2020.3.6일자. 13면.



시청자 게시판

2,114개(10/106페이지)
시청자 게시판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시청자 게시판> 운영원칙을 알려드립니다. 박한 45327 2018.04.12
1933 블랙홀 100년 만에, 이론에서 실재가 되다 사진 신상구 265 2022.07.18
1932 인촌 김성수선생 통합 리더십, 대한민국 건국 계기 만들어 사진 신상구 484 2022.07.18
1931 김진표 국회의장, '제74주년 제헌절' 경축사 전문 신상구 301 2022.07.18
1930 103세 철학자 김형석 교수가 꼽은 늙지 않는 세가지 방법 신상구 376 2022.07.16
1929 세계화 시대 저물면 대한민국은 몹시 큰 피해자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사진 신상구 254 2022.07.16
1928 신선이 노는 복되고 신성한 땅, 경주 낭산 사진 신상구 304 2022.07.15
1927 대전은 스토리의 보고 신상구 280 2022.07.14
1926 가짜 뉴스를 만들어서라도 가지고 싶었던 권력 사진 신상구 299 2022.07.13
1925 대전의 역사 이야기와 도시 정체성 사진 신상구 252 2022.07.13
1924 윤동주·장인환 등 독립유공자 156명 호적 생긴다 신상구 284 2022.07.12
1923 中도 원조 주장 못 펴는 '고려 인삼'의 원천 기술 사진 신상구 286 2022.07.10
1922 사또를 고소하는 자는 곤장 100대에 처한다 사진 신상구 327 2022.07.09
1921 국가 수학등급 최상위 승격, 필즈상 수상, 올해는 한국 수학의 해 사진 신상구 473 2022.07.09
1920 국학박사 신상구,『충남연구』통권9호에 학술논문「아산지역 상여연구」게재 사진 신상구 347 2022.07.09
1919 천부경은 우리 얼을 담은 최고의 경전 신상구 632 2022.07.02
1918 한국효문화진흥원, 사단법인 한국시조협회와 하계효문화포럼 개최 사진 신상구 397 2022.07.01
1917 한반도 비파형동검 분포 사진 신상구 522 2022.07.01
1916 백제의 ‘익산 천도론’ 비밀의 열쇠 수부 사진 신상구 329 2022.06.30
1915 세종의 정치 배신한 세종의 인재들 사진 신상구 431 2022.06.29
1914 소정 정훈 선생 유품 개인 소장자 대전문학관에 기증해야 사진 신상구 399 2022.0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