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항일독립투사 김상옥 선생의 생애와 업적 글쓴이 localhi 날짜 2015.03.02 03:35

                       항일독립투사 김상옥의 생애와 업적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칼럼니스트) 신상구

   김상옥(金相玉, 1890-1923) 선생은 1890년 동대문 효제동에서 한말에 군관을 지낸 아버지 김귀현(金貴鉉)과 부인 김씨 사이의 4남매 중 2남으로 출생하였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불우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면서 한학을 수학하는 동시에 어의동보통학교를 다녔다. 8세 때부터 쳇불(체의 그물) 공장 직공으로 일했다. 14세부터는 낮에는 철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학에서 공부했다. 17세가 될 무렵 기독교에 입교하고 동대문교회 부설 신군야학교에서 주경야독에 힘썼으며 학교가 재정난으로 폐교하자 직접 동흥야학교를 설립하는 등 배움에 대한 남다른 정열을 보였다. 1910년에는 경성영어학교를 다녀 국제정세와 서양문화에 안목을 넓혔다. 23세 때인 1912년에는 남한 각지를 전전, 약행상을 하며 견문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동대문 밖 창신동에서 영덕철물상회(永德鐵物商會)를 경영하였다. 이듬해에는 정진주(鄭眞珠)와 혼인하였다.

   24세 때인 1913년에는 경북에서 채기중, 유창순, 한훈 등과 함께 비밀결사 광복단을 조직하였다. 그 후 말총모자를 창안, 생산해 보급하였다. 또한 농구·장갑·양말 등도 아울러 생산해 각 지방을 순회하면서 일본상인들에 대항하며 일화배척과 국산품장려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김상옥 선생은 3·1독립운동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기미년인 1919년 4월 1일 동대문교회 안의 영국인 피어슨여사 집에서 박노영, 윤익중, 신화수, 정설교, 전우진 등 청년동지들과 함께 혁신단(革新團)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4월 17일 각지 독립운동의 소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논설을 게재한 <혁신공보> 1호를 발행했다. 1919년 9월까지 매회 1천부씩의 지하신문을 비롯하여 임시정부후원회 취지서와 항일전단을 제작, 배포하여 독립운동의 열기를 북돋웠다. 김상옥 선생은 신문제작의 재정지원을 맡는 한편 배포책임자로 독립운동의 일선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재정적인 어려움과 일제의 인쇄시설 압수로 인해 9월에 접어들면서 신문발행은 중지되고 말았다. 또한 자신도 일경에 피체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는데 이는 선생이 40여일에 걸친 갖은 악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사실을 부인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때 이후로 선생은 평화적인 방법의 독립운동이 갖는 한계를 절감하고 무력투쟁에 의한 독립쟁취의 방안을 구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동년 12월에는 암살단을 조직해 일본 고관 및 민족반역자에 대한 응징 및 숙청을 기도하였다.

   1920년 4월에는 한훈(韓焄) · 유장렬(柳?烈) 등과 함께 전라도 지방에서 친일민족반역자 서(徐)모 외 수명을 총살하였다. 또한 오성헌병대분소(烏城憲兵隊分所)를 습격해 장총 3정과 군도(軍刀) 1개를 탈취하였다.

   1920년 8월 24일에 미국의원단이 동양 각국을 시찰하는 길에 내한한다는 소식에 접하자, 그 해 5월부터 김동순(金東淳)·윤익중(尹益重)·신화수(申華秀)·서대순(徐大淳) 등의 동지를 지휘해 환영하기 위해 나오는 총독 사이토(齋藤實) 및 일본 고관을 암살하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거사계획은 실천에 옮기기도 전에 일본경찰에게 탐지되었다. 거사 하루 전인 8월 23일에 한훈과 김동순 등 동지들이 붙잡혀 단독으로 거사를 추진했으나 여의치 않자, 10월 말 상해로 망명하였다. 11월에는 임시정부요인 김구(金九)·이시영(李始榮)·조소앙(趙素昻)·신익희(申翼熙) 등과 독립운동 거사계획에 참여하는 동시에 의열단에 입단하였다.

   1921년 7월에는 독립운동자금의 모금을 위해 한때 귀국해 충청도·전라도 등지에서 모금하여 다시 동지 장규동과 함께 상해로 들어가 한당사령부장(韓黨司令部長)을 맡게 되었다.

   1922년 11월 중순에는 상해에서 임시정부요인 이시영 · 이동휘(李東輝) · 조소앙 · 김원봉(金元鳳) 등과 의논해 일본총독 및 주요 관공서에 대한 암살·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계획을 치밀하게 세웠다.

   1923년 1월에는 조선총독이 일본제국의회에 참석하기 위한 동경행을 기회로 총살하려는 계획이었다. 임시정부에서는 안홍한(安弘翰)을 수행시켜 권총 4정과 실탄 수백발을, 그리고 대형 폭탄은 의열단에서 맡아 김한(金翰)으로부터 받기로 하고 안동현(安東縣)을 거쳐 압록강을 건너 서울에 들어오도록 하였다.

   상해를 떠나면서 농부차림으로 변장하고 밤을 틈타 압록강 철교를 건너면서 경비경관을 사살하였다. 신의주에 들어와서는 세관검문소 보초를 권총으로 머리를 때려눕히는 등 격투 끝에 국내 잠입에 성공하였다.

   서울에 와서 김한 · 대순 등 동지들과 만나 조선총독을 총살하기 위한 치밀한 거사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상해 주재 일본경찰의 통보로 일제가 경계를 강화하자 조선총독 암살거사는 시일을 끌게 되었다.

   1923년 1월 12일 밤 8시경 종로경찰서(현 장안빌딩 근처) 서편 동일당이란 간판집의 모퉁이에서 종로경찰서 서편 창문을 향해 폭탄을 투척하였다. 폭탄이 창문에 적중하여 터지는 굉음은 마치 일제의 탄압에 억눌린 민족혼을 일깨우는 우렁찬 함성과도 같았고 종로경찰서는 아비규환의 수라장이 되었다. 이 투탄으로 건물의 일부가 파손되고 행인 남자 6명과 여자 1명이 중경상을 입는 등 큰 소동이 났다. 김상옥 선생은 폭탄 투척 후 용산 삼판동(현 후암동) 소재 고봉근의 집에 몸을 감추었다. 고봉근이 그의 매부일 뿐 아니라 다음의 목표인 재등총독 주살을 위해서는 서울역에서 가까운 삼판동이 적당하였기 때문이다.

   투탄 당시만 하더라도 의거의 주인공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일본경찰도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5일이 지난 1월 17일에 일본경찰은 동대문서 한인순사 조용수의 밀고에 의해 투탄의 장본인을 알아내고 은신처를 추적하였다. 그러던 중 고봉근의 행랑방에 들어 있는 여자가 종로경찰서에 있는 친정오빠에게 밀고하는 바람에 1월 17일 새벽 3시 은신처인 매부 고봉근(高奉根)의 집이 종로경찰서 수사주임 미와(三輪和三?)에게 탐지되었다.

   종로경찰서 우메다(梅田新太?)·이마세(今瀨金太?) 두 경부 지휘 아래 20여 명의 무장경찰에게 은신처가 포위되었다.

   김상옥 선생은 은신처가 탄로나자 단신으로 두 손에 권총을 들고 총격전을 벌였다. 먼저 종로경찰서 유도사범이며 형사부장인 다무라(田村振七)를 사살하였다. 이마세·우메다 경부 등 수명에게 중상을 입힌 뒤 추격하는 일본경찰에게 사격을 가하면서 눈 덮인 남산을 거쳐 금호동에 있는 안장사(安藏寺)에 이르렀다.

   여기서 승복과 짚신을 빌려 변장하고 산을 내려왔다. 18일은 무내미(水踰里) 이모집에서 유숙하고 19일 새벽 삼엄한 일본경찰의 경계망을 피해 효제동 이혜수(李惠受)의 집에 은신하였다. 여기서 동상도 치료하면서 앞으로의 거사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1923년 1월 22일 새벽 최후 은신처마저 일본경찰에게 탐지되고 말았다. 상해로부터의 서신이 효제동으로 온 것을 전해준 전우진(全宇鎭)이 일본경찰의 수사망에 걸려들어 문초당한 끝에 은신처가 밝혀지게 되었다.

   그 날 5시반경 경기도경찰부장 우마노(馬野)가 총지휘관이 되고 보안과장 후지모토(藤本)가 부지휘관이 되어 시내 4대 경찰서에 총비상령이 내렸다. 1월 22일 새벽 5시반경 기마대와 무장경관 1,000여 명이 은신처인 이혜수의 집을 중심으로 효제동 일대를 겹겹이 포위하였다.

   김상옥 선생은 이곳이 마지막 격전장이 될 것을 예감한 듯 양손에 권총을 들고 인근 5채의 가옥을 지붕을 타고 넘나들며 권총과 장총으로 무장한 1,000여 명의 일경과 신출귀몰한 접전을 벌였다. 조국독립의 염원을 담은 그의 총구는 쉴 새 없이 불을 뿜었고 일경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실로 일기당천(一騎當千)의 기세로 대한남아의 기백을 떨친 것이다. 3시간여의 치열한 전투 끝에 서대문경찰서 경부(警部) 율전청조(栗田淸造)를 비롯한 수 명의 일경을 사살하였으나 탄환이 다하였다. 이제는 항복하던가 자결하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선생은 마치 상해를 떠나올 때 동지들에게 한 약속을 지키려는 듯 마지막 탄환이 재인 권총을 머리에 대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자결 순국하였다. 당시 선생의 나이 34세였다. 오직 조국독립을 필생의 목표로 삼고 또 한시도 그 목표를 잊어 본적이 없던 의사였다. 더욱이 남들이 꺼리는 의열투쟁의 선봉에서 서서 적지화된 서울 한복판 적의 심장부와 다름없는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수백 명의 무장경찰을 우롱하며 대한 남아의 기개를 떨치다 마침내 그 고귀한 뜻을 굽히지 않고 산화한 것이다.

   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할 때 그의 몸에는 열한발의 총상이 있었다고 하니 최후의 전투가 얼마나 격렬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선생의 시신은 1923년 1월 26일 가족들과 그의 뜻을 추모하여 일경의 눈을 피해 찾아온 학생들의 호곡 속에 이문동 뒷산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10여 일 동안 일경들을 전율케 했던 열혈의사의 장례치고는 너무도 초라한 행렬이었다. 그러나 선생이 남긴 항일행적과 민족정신은 당시 한국인들의 입에서 입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고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한줄기 빛과 같이 이어져 조국광복의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화가 구본웅(具本雄)은 당시 중학생으로서 효제동 총격전의 상황을 목격하고 그의 시화첩에서 감동적인 시와 당시의 광경을 생생하게 그린 그림을 남기고 있다.

   한국 정부는 1962년 김상옥 선생의 독립투쟁의 공을 인정해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참고문헌>

1. 채근식,『무장독립운동비사』, 대한민국공보처, 1949.

2. 김창수,「김상옥 의사의 종로서 등 폭파」,『신동아(新東亞)』 1969.7월호.

3. 국가보흔처,『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 1997.

                                   <필자 신상구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아우내 단오축제』,『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997) 등 4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천안지역 상여제조업체의 현황과 과제” 등 60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태그 775

시청자 게시판

2,116개(69/106페이지)
시청자 게시판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시청자 게시판> 운영원칙을 알려드립니다. 박한 45752 2018.04.12
755 국회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위의 한심한 운영 실태 고발 localhi 1883 2015.04.06
754 국조단군봉안회 사무실 이전 소식 localhi 2453 2015.04.05
753 전병훈 저『정신철학통편』고찰 localhi 2503 2015.04.02
752 일본 식민지 근대화론의 개념과 허구성 localhi 1957 2015.03.31
751 한국사는 대륙사관에 의해 한국인 관점에서 써야 localhi 2603 2015.03.31
750 태백산 단군성전과 산멕이 신앙의 친연성 localhi 2232 2015.03.30
749 이광섭 건축사의 대전 성혈 조사연구 성과 localhi 2408 2015.03.29
748 한샘창업주 조창걸의 원대한 꿈, 한국판 브루킹스연구소 설립 localhi 3300 2015.03.27
747 동북아역사재단 또 왜 그러나 localhi 2462 2015.03.26
746 대학강단 식민사학자 퇴출의 당위성 localhi 1519 2015.03.24
745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월천리 석장승 localhi 2216 2015.03.23
744 민족사학자인 최재석 박사의 한일 관계사 연구 업적 [1] localhi 2102 2015.03.22
743 고화질 시청 시 스피커 문제 질문드립니다 [2] 상생택국 1904 2015.03.21
742 불교 대승종 일천지원(一天地院) localhi 2425 2015.03.20
741 역사문화심지회의 우리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 localhi 2484 2015.03.17
740 항일독립운동가 백포 서일의 생애와 사상 localhi 2534 2015.03.14
739 전통문화 계승과 통일운동에 헌신한 청명 임창순 선생 localhi 2202 2015.03.13
738 인터넷으로 생방송 시청하는 것과 다시보기가 안되네요. [2] hyopung 1876 2015.03.10
737 용담 정동문 선생의 단군 신앙 localhi 3309 2015.03.10
736 정약용의 유배지 강진 다산초당 localhi 2336 2015.0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