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윤동주 시인 서거 70주년을 기념하며 글쓴이 localhi 날짜 2015.02.26 01:33
                                            윤동주 시인 서거 70주년을 기념하며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칼럼니스트) 신상구(辛相龜)  
                                                         1. 생애와 업적      
  시인 윤동주(尹東柱)는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明東村, 지금의 지린 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용정시 지신진)에서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으로 간도 이주민 3세였다.
  19세기 말,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에 기근이 심해지자 조선 사람들은 국경을 넘어 간도와 연해주 등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윤동주의 증조부인 윤재옥도 집안을 이끌고 1886년경 함경도에서 만주로 이주하였다. 윤동주의 증조부인 윤재옥은 함경북도 종서군 동풍면 상장포에 살다가 1886년 북간도 자동으로 이주하였으며 할아버지 윤하현은 밍둥춘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아버지 윤영석은 1910년 독립지사인 김약연의 누이동생 김용과 결혼하여 명동촌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는 어려서 기독교인인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고모 윤씨는 송신영에게 시집갔는데, 고모의 아들이 독립운동가이자 그의 친구였던 송몽규였다. 당숙은 윤영춘이고, 후일 가수가 되는 윤형주는 그의 6촌 재종이었다.
  1925년 명동소학교(明東小學校)에 입학하여 재학 시절 고종사촌인 송몽규 등과 함께 문예지『새 명동』을 발간하였다.
  1931년 14세에 명동소학교(明東小學校)를 졸업하고, 중국인 관립학교인 대랍자학교(大拉子學校)에 다니다 가족이 용정으로 이사하여, 용정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935년 소학교 동창인 문익환이 다니고 있는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전학하였다. 그해 10월, 숭실중학교 학생회가 간행한 학우지 숭실활천(崇實活泉) 제15호에 시 공상(空想)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신사참배 거부로 숭실중학교가 폐교되어, 문익환과 함께 용정에 있는 광명중학교로 편입하였다. 광명중에서 그는 정일권 등을 만나게 된다.
   1937년 광명중학교 졸업반일 무렵, 상급학교 진학문제를 놓고 부친(의학과 진학 희망)과 갈등하나, 조부의 개입으로 연전 문과 진학을 결정한다. 1938년 2월 17일 광명중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京城)으로 유학, 그해 4월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하숙생활을 하며 그는 저녁밤 하숙집 근처를 산책하며 시상을 떠올리고 시를 짓거나 담론을 하였다.
   1939년 연희전문 2학년 재학 중 기숙사를 나와 북아현동, 서소문 등지에서 하숙생활을 했다. 이때 그는 친구 라사행과 함께 정지용 등을 방문, 시에 관한 토론을 하며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 해『소년(少年)』지에 시를 발표하며 처음으로 원고료를 받기도 했다.
   1941년 12월 27일에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이 때에 틈틈이 썼던 시들 중 19편을 골라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내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42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교대학(立敎)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 10월 도쿄 도시샤대학(同志社) 영문학과에 편입하였다. 도시샤대학은 윤동주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 정지용이 다닌 학교로 일본 조합교회에서 경영하는 기독교계 학교였다.
  윤동주 집안은 1941년 말 '히라누마'(平沼)로 창씨 개명한 것으로 돼 있다. 일본 유학에 뜻을 둔 윤동주의 도일을 위해선 성씨를 히라누마로 창씨를 개명하게 되었다.
  윤동주의 창씨개명은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 없는 것이었다. 그의 연보에 의하면 윤동주가 전시의 학제 단축으로 3개월 앞당겨 연희전문학교 4학년을 졸업하면서 1941년 연말에 "고향 집에서 일제의 탄압과 동주의 도일 수속을 위해 성씨를 '히라누마'로 창씨했다는 것이다. 개명 후 윤동주는 매우 괴로워했다 한다.
   창씨개명계를 내기 닷새 전에 그는 창씨개명에 따른 고통과 참담한 비애를 그린 시 참회록을 썼다.
   윤동주의 창씨개명설은 해방 이후에는 알려지지 않았다가 1990년대에 와서 알려지게 되었다.
   1942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 대학(立?大?)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6개월 후에 중퇴하여 교토시 도시샤 대학 문학부로 전학하였다. 그러나 그는 불령선인으로 지목되어 일본경찰의 감시를 당하고 있었다.
   1943년 7월 14일, 귀향길에 오르기 전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교토의 카모가와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이듬해 교토 지방 재판소에서 2년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44년 3월 31일 교토지방재판소 제1 형사부 이시이 히라오 재판장 명의로 된 판결문은 징역 2년형을 선고하면서 “윤동주는 어릴 적부터 민족학교 교육을 받고 사상적 문화적으로 심독했으며 친구 감화 등에 의해 대단한 민족의식을 갖고 내선(일본과 조선)의 차별 문제에 대하여 깊은 원망의 뜻을 품고 있었고, 조선 독립의 야망을 실현시키려 하는 망동을 했다.”라고 적혀 있다. 교토지방 재판소에서 송몽규와 함께 치안유지법 제5조 위반죄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뒤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시신은 가족들에게 인도되어 그 해 3월 장례식을 치룬 후 간도 용정에 유해가 묻혔다. 당시 그의 나이 27세였다.
   그가 죽고 10일 뒤에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 가지러오라' 는 전보가 고향집에 배달되었다. 부친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이 시신을 인수, 수습하러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런데 뒤늦게 '동주 위독하니 보석할 수 있음. 만일 사망시에는 시체를 가져가거나 아니면 큐슈제대(九州帝大) 의학부에 해부용으로 제공할 것임. 속답 바람' 이라는 우편 통지서가 고향집에 배달되었다. 후일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는 이를 두고 "사망 전보보다 10일이나 늦게 온 이것을 본 집안 사람들의 원통함은 이를 갈고도 남음이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옥중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맞았다는 주장 등 그의 죽음은 일제 말기에 있었던 생체실험에 의한 것이라는 의문이 수차례 제기되었다.
  1947년 2월 정지용의 소개로 경향신문에 유작이 처음 소개되고 함께 추도회가 거행되었다.
  1948년 1월, 윤동주의 유작 31편과 정지용의 서문으로 이루어진 유고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정음사에서 간행하였다. 이후 1962년 3월부터 독립유공자를 대량으로 발굴 포상할 때, 그에게도 건국공로훈장 서훈이 신청되었으나 유족들이 사양하였다. 1990년 8월 15일에야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85년에는 그의 시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윤동주문학상이 한국문인협회에의해 제정되었다.
                                                  2. 윤동주 서거 70주년 기념행사
   윤동주는 27세에 옥사했지만, 116편의 시를 남겼다. 서시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명시로 교과서에 게재되어 지금도 국민들에게 널리 애송되고 있다.
   윤동주는 정지용의 시집을 읽고 나서야 명시를 쓸 수 있었다. 그래서 운동주는 정지용 시 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볼 수가 있다.   
   윤동주 시인은 민족적 저항시인, 강인한 의지와 부드러운 서정을 지닌 시인으로 평가되며, ‘일제말기 독립의식을 고취한 애국적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시는 생활에서 우러나오는 내용을 서정적으로 표현하였으며, 인간과 우주에 대한 깊은 사색,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와 진실한 자기성찰의 의식이 담겨 있다.
   그래서 그런지 윤동주 서거 70주년 기념행사는 한국은 물론 중국, 일본, 미국에서 개최되어 명시의 위력이 대단함을 실증해 주고 있다.
   연세대학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사랑받는 시인인 윤동주 동문의 시정신과 문학적 업적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하여 2000년 11월 27일 윤동주 기념사업회를 조직하였다. 윤동주 기념 사업회는 윤동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각종 사업을 실시함과 더불어 한국인의 문학정신을 일깨우기 위한 노력도 계속적으로 이루어 나가고 있다. 윤동주 시 문학상, 윤동주 기념강좌 및 시 암송대회, 윤동주 기념관의 유지 관리, 윤동주 기념사업 기금 모금 및 관리, 기타 각종 계획을 수립하고 실시해 나가고 있다. 연세대는 2013년 캠퍼스 내의 핀슨홀을 윤동주 기념관으로 개편하고 ‘윤동주 기념사업회’를 설립하였다. 설립목적은 시인 윤동주가 1938년 봄부터 1941년 겨울까지 삶을 아파하며 스스로를 담금질한 삶의 터전이었으며, 그 의 생애에서 가장 의미 있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연세대학교 신촌 캠퍼스 경내에는 윤동주 시비가 세워져 있다. 윤동주가 떠난 지 반백년이 넘었지만, 그 시대가 주는 절망 속에서 그의 영혼의 내면에 자리한 기독교적 가치관과 나라사랑이 그의 저항의 원동력이었으며 그의 삶의 궤적이요, 지표였다. 이를 기리기 위하여 연세대학교는 한국인이 제일 사랑하는 시인인 윤동주 동문의 기독교 정신과 민족사랑 정신을 되새기어 그의 문학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한국 시문학을 부흥시키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연세대학교 윤동주 기념사업회는 오늘 신촌캠퍼스 루스채플에서 추모식과 시·산문 창작대회 시상식, 추모 공연을 진행한다. 연희전문학교 시절 윤동주 선생은 많은 시작을 하였다. 그리고 대학로 브로드웨이아트홀 3관 구비너스홀에서는 2015.2.24일부터 3.29일까지 윤동주 시인 서거 70주년기념 연극 "별헤는밤"이 공연될 예정이다.
   중국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에서 활동하는 조선족 문인들도 윤동주 탄신 97주년 행사를 열었다. 이들은 윤동주 시인의 민족정신을 기리고 작품 세계를 조명하는 한편 그 업적을 후대에 알리고 승계할 목적으로 사단법인 ‘용정윤동주연구회’도 만들었다. 이 연구회는 앞으로도 민족의 시성을 기리고 민족정신을 고양하는 일에 앞장서며, 문화총서 '룡두레' 제1편을 출간할 예정이다. 3월에는 윤동주의 혼이 서린 '영국더기'에 사무실을 내고, 5월에는 윤동주를 위한 청소년 인물 전기를 펴낸다는 계획도 세워놓았다. 뿐만 아니라 중국 지린성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 룽징(龍井)중학교에 윤동주 시인의 조각상이 세워졌다.
   연합뉴스 도쿄특파원 조준형 기자의 보도에 의하면, 윤동주 시인이 1942년 일본 유학 때에 8개월간 다녔던 도쿄의 릿쿄대학에서는 지난 2월 22일 윤동주 시인의 70주기 추모 예배가 열렸다. 400여 참석자들은 스물 여덟 나이에 조국 해방을 불과 6개월 앞두고 일본 형무소에서 옥사한 윤 시인의 삶을 애도했다. 윤동주 시인의 대표작인 서시에 곡을 붙인 노래도 울려 퍼졌다. 또 참석자들은 윤 시인이 남긴 시들을 한국어와 일본어로 낭독하며 식민지 청년의 고뇌를 되새겼다.
   재미한인 청년 밴드 '눈 오는 지도'(snowing map)는 미국과 국내에서 서거 70주년 기념 공연을 지난 2월 14일(현지시간) 보스턴한인교회에서 시작하여 뉴욕(16일)과 로스앤젤레스(22일)를 거쳐 서울(27일)에서 대미를 장식할 예정이라고 한다.
   윤동주 시인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일평생 독립운동가로 시인으로 위대한 삶을 살아 청사에 길이 빛나고 있다. 그리하여 앞으로도 윤동주 시인을 기리는 추모행사는 국내외에서 계속 이어질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참고 문헌>
  1. 송우혜,『윤동주평전』, 서정시학, 2014.5.20.
  2. 조규성, “민족적 저항 시인 윤동주 선생 서거 70주년 추모”, 종교문화칼럼, 2015.
2.19.
  3. “윤동주”, 위키백과, 2015.2.23.
  4. “도쿄서 윤동주 70주기 추모행사 열려”, 연합뉴스 도쿄특파원 조준형 TV 제보, 2015.2.2.
                                                      < 필자 신상구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아우내 단오축제』,『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997) 등 4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천안지역 상여제조업체의 현황과 과제” 등 60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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