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청산리 전투의 영웅' 김좌진 장군 글쓴이 localhi 날짜 2015.02.14 02:26

                          '청산리 전투의 영웅' 김좌진 장군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신상구(辛相龜)

                                    1. 생애와 업적

   청산리 전투의 영웅인 백야(白冶) 김좌진(金?鎭, 1889-1930) 장군은 1889년 11월 24일 충남 홍성의 부유한 명문대가인 안동김씨의 문중에서 김형규(金衡圭)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문충공 김상용(金尙容)이 장군의 11대조이며 안동 김씨 수북공파의 시조인 광현(光炫)이 장군의 10대조가 된다. 장군의 집안은 많은 재산과 노비를 소유한 부호였다.

   그러나 장군이 3세 되던 해 부친상을 당해 편모슬하에서 성장하였고, 13세 되던 해에 형 경진(景鎭)이 김덕규(金德圭)의 양자가 되어 서울로 떠난 후 실질적인 가장으로서 집안 살림을 떠맡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영민하고 공부보다는 전쟁놀이와 말타기를 좋아했다.

   김좌진 장군은 유년시절 김광호(金光浩), 김복한(金福漢)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김광호 선생과의 만남은 장군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것은 장군이 앞으로 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을 함께 할 김석범을 만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김석범은 고향인 홍성을 떠나 여러 해 동안 서울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당시 대한제국의 상황을 자세히 알고 있었고, 계몽의식을 소유한 인물이었다. 장군이 일찍이 계몽의식을 갖게 되는 데에는 그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김좌진 장군은 김복한으로부터도 사사를 받았다. 김복한은 1895년부터 1896년에 걸쳐 전개된 홍주의병의 총수였으며 을사조약 반대항쟁과 1919년 파리장서운동에 참여하는 등 전 생애를 항일운동에 바친 애국지사였다. 장군은 김복한으로부터 의리정신과 민족수호정신을 배웠으며 그것은 이후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15세 때인 1904년에는 대대로 내려오던 노복 30여 명을 모아놓고, 그들 앞에서 종문서를 불에 태우고 농사를 지어먹고 살 만한 논밭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1905년 서울로 올라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장군이 무관학교에 재학하던 시절은 대한제국이 일제의 준 식민지 상황이 되면서 국권회복운동이 전개되던 시점이었다. 당시 서울에서는 계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김좌진 장군은 계몽운동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1907년 김좌진 장군은 김항규, 김홍진 등과 함께 자진하여 상투를 잘랐다고 한다. 이는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당시 대한제국이 처한 상황을 직시하게 되었고, 국권회복운동에 전념하기 위한 의식의 변화였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서울에서 몸소 체험한 계몽운동을 홍성에서 직접 실현하기 위해 1907년 향리로 돌아와서 문중의 도움을 받아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웠다. 호명학교의 교명은 “호서지역을 밝게 한다"는 것으로 호서지역을 개명(開明)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고, 개화와 신학문에 대한 교육을 목적으로 갖고 있었다. 호명학교는 홍성지역의 젊고 유능한 학생들에게 개명과 부강을 교육하였고, 신교육을 통한 국권회복을 학생들에게 교육하였다. 학생 수는 1908년 당시 100여 명에 달할 정도의 규모였으며 1908년부터 소학과와 중등과로 나누어 가르쳤다. 또한 법률전문과를 설치하는 등 홍성지역에서 사립학교 설립을 주도할 정도였다. 김좌진 장군은 가산을 정리해 학교 운영에 충당하게 하고 90여 칸의 자기 집을 학교 교사로 제공하였다. 그리고 홍성에 대한협회와 기호흥학회의 지부를 조직해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다. 기호흥학회는 경기도와 충청도의 학문증진과 민중계몽을 위해 1908년 1월에 조직되었으며 가장 중점적으로 추진한 사업은 교육사업이었다. 홍주지회는 1909년 1월 16일에 인가를 받았는데 김좌진 장군을 비롯해 회원이 50여 명에 달하였다. 1909년에는『한성신보』이사를 역임하였다. 안창호(安昌浩)·이갑(李甲) 등과 서북학회를 세우고 산하교육기관으로 오성학교(五星學校)를 설립해 교감을 역임하였다. 청년학우회 설립에도 협력하였다. 이처럼 김좌진 장군은 경술국치 이전 교육사업과 계몽운동에 전념하면서 기울어져 가는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김좌진 장군은 1910년 일제에 의해 조선이 강점되자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주로 군자금 모집과 대한광복회활동이었다. 장군은 1910년을 전후해 이창양행(怡昌洋行)이라는 위장상점을 차려 항일운동의 근거지로 삼는 한편, 신의주에 염직회사를 차려 해외와의 연락거점으로 삼았다. 이창양행은 서울 관수동에 있었으며 의병들과의 관계로 인하여 일본경찰의 수색을 받기도 하였다. 이창양행과 염직회사는 상점으로 위장한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다.

   김좌진 장군은 일제강점 후 국내에서 독립운동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1911년에 북간도에 독립군사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자금조달 차 돈의동(敦義洞)에 사는 족질 김종근(金鍾根)을 찾아간 것이 원인이 되어, 2년 6개월간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서대문형무소 수감은 김좌진 장군에게 또 다른 인연을 제공하였다. 바로 서대문형무소 수감 중 이후 대동단에서 활동하게 되는 전협과 최익환을 만난 것이 그것이다. 최익환은 만주 망명자금 마련 사건과 관련해 7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이었고, 전협도 3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 중이었다. 전협과 최익환은 이미 의기투합에 만주에서 활동하기로 결의하고 각자 활동하던 중 서대문형무소에서 다시 만난 상황이었고, 김좌진 장군도 이때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했던 것이다. 김좌진 장군과 전협은 서대문형무소 수감 중 결의형제를 맺었다고 하며, 최익환과는 만주로 망명하기 전까지 함께 활동하였는데 그 계기가 바로 서대문형무소 수감 중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김좌진 장군은 1913년 9월 출감하였으며 홍성으로 돌아와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다시 홍성헌병대에서 10개월 수감되기도 하였다. 홍성헌병대에서 풀려난 후에는 1910년대 국내 독립운동단체 중 가장 규모가 크고 활동범위가 넓었던 대한광복회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대한광복회는 만주에 부사령을 상주시켜 국내조직과의 연계를 통해 독립군을 양성하는 책임을 맡겼는데 초기에는 이진룡이 부사령에 임명되었고, 이진룡이 피체된 후에는 김좌진 장군이 그 책임을 맡아 파견되었다. 김좌진 장군은 만주로 파견되기 이전 국내에서 광복회를 혁신 강화하는 모임에 참여하는 한편 평안도, 황해도지부원들과 함께 활동하기도 하였다. 또한 1915년 길림광복회를 조직하는 모임에도 참석하였다. 이처럼 김좌진 장군은 만주로 파견되기 전 대한광복회 내에서 많은 활동을 했는데, 주로 군자금 모집이었다. 김좌진 장군은 1915년 11월 최익환과 함께 경북지역에서 군자금모집을 추진하다가 피체되기도 하였다.

   1916년 노백린(盧伯麟)·신현대(申鉉大) 등과 함께 박상진(朴尙鎭)·채기중(蔡基中) 등이 결성한 광복단에 가담해 격렬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17년 대한광복회의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었으나, 예심에서 면소판정으로 석방되었다. 1918년 일본의 감시를 피해 만주로 건너가서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했다. 그 무렵 대한광복회 조직이 와해되면서 체포 위기에 처했으나 만주에 있어 체포는 면했다. 그 해 12월 3·1독립선언에 전주곡이 되는 무오(戊午)독립선언서에 민족지도자 39명 중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그리고 서일(徐一)을 중심으로 한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에 가담해 군사 책임을 맡고, 군정부를 조직하여 본거지를 왕칭현(汪淸縣)에 두고 5분단(分團) 70여 개의 지회를 설치한 뒤 광복운동을 위한 기반을 조성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권고를 받아들여 군정부를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하고, 총사령관이 되어 독립군 편성에 주력하였다. 우선 독립군 양성을 위해 왕청현 십리평(汪淸縣十里坪) 산곡에 사관연성소를 설치하고 스스로 소장이 되어 독립군을 엄격하게 훈련시키면서 무기 입수에 전력하였다. 김좌진 장군은 신흥무관학교의 도움으로 교관과 각종교재를 도움을 받았다. 이범석, 김규식 등이 교관을 맡아 엄격한 군기와 규율 속에서 역사학, 군사학, 병기사용법, 부대지휘법 등을 교육하였으며 특히 민족정신 함양을 위해 역사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1920년 9월 제1회 사관연성소 졸업생 298명을 배출시키고, 1,600명 규모의 항일독립군을 양성했다.

   1920년 10월 일본군 대부대가 독립군 토벌을 목적으로 만주로 출병하자 소속 독립군을 백두산으로 이동시키던 도중 청산리(靑山里)에서 일본군과 만나 전투가 시작되었다. 10월 21일 청산리 백운평전투를 시작으로 같은 달 26일 고동하전투를 끝으로 청산리전투가 전개되었으며,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洪範圖) 장군 휘하 부대가 서로 합동작전을 벌인 끝에 일본군 3,300여명을 섬멸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대한군정서의 서일 총재가 임시정부에 보고한 보고서를 보면, 김좌진 부하 600명과 홍범도의 부하 300여 명이 일본군 1300여 명을 격살했다고 한다. 특히 김좌진 장군 휘하의 북로군정서군은 백운평전투, 천수평전투, 어랑촌전투 등에서 큰 전승을 거두어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끄는 데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대한군정서군이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은 전술전략이 뛰어났고, 훈련이 잘 된 부대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총기 약 800정, 기관총 4정, 수류탄 약 2,000개, 박격포 2문을 갖추고 있어 무장이 구비된 정예부대였기 때문이었다. 청산리전투의 승리는 일본군의 간도출병을 저지시켰고, 항일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 후 항일독립군은 북진을 하여 그 해 말에 러시아와 인접한 북만주 밀산(密山)에 도착하였다. 김좌진 장군은 국민회군의 안무(安武), 도독부군의 최진동(崔振東) 등과 연합하고 대한독립군단을 결성, 부총재에 취임하였다. 일본군의 격렬한 보복작전의 전개로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自由市)로 이동하다가 이듬해 헤이허(黑河) 사변으로 타격을 받고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김좌진 장군은 만주에서 흩어진 동지들을 재결합해 대기하다가, 1925년 3월 김혁(金赫)과 신민부(新民府)를 창설하고 군사부위원장 및 총사령관이 되었다. 또한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세워 부교장으로서 정예사관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 때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무위원으로 임명했으나, 취임하지 않고 독립군 양성에만 전념하였다.

   1927년 많은 간부가 일제에 붙잡히자, 신민부를 재정비해 중앙집행위원장으로서 신민부를 통솔하였다. 1929년 신민부의 후신으로 한국총연합회(韓國總聯合會)가 결성되자, 주석으로 취임하여 재 만주 동포의 교육과 민생문제에 주력하였다.

   1930년 1월 24일 중동철도선 산시역(山市驛) 앞 자택에서 200m 거리에 있는 정미소에서 공산주의자 박상실(朴尙實)의 흉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김좌진 장군의 시신은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안장되었다가 1957년에 장군의 선산인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 산 50번지로 이장되었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을 받았다. 그리고 그의 묘소는 1989년 12월 29일 기념물 제73호로 지정되었다

   김좌진 장군과 함께 청산리 전투를 이끌었던 이범석 장군(초대 국무총리)은 “태산과 같은 위엄을 가진 진정한 영웅호걸이었다”고 회고했다.

                                   2. 역사적 교훈

   백야 김좌진 장군은 충남 홍성의 부유한 명문대가에서 태어나 일생을 편안하고 안락하게 

잘 살 수 있었지만, 일제 강점기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받친 애국지사이다.

   김좌진 장군은 진취적인 개화사상가로 대대로 내려오던 노복 30여 명의 종문서를 불에 태우고 논밭을 골고루 나누어 주어 봉건적인 반상제도를 혁파하고 자유민주주의를 몸소 실천한 선각자이다.

   김좌진 장군은 교육의 중요성을 일찍이 인식하고 호명학교, 오성학교, 성동사관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함으로써 조국의 독립와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래서 그런지 2015년 2월 12일 대전일보 창간 65주년을 맞이하여 조사한 충청권의 역사적 인물 중에서 김좌진 장군은 이순신(49.3%), 유관순(19.3%)에 이어 3위(7.7%)를 차지했다. 그리고 4위는 윤봉길(6.6%), 5위는 송시열(3.8%), 6위는 한용운(3.3%), 7위는 신채호(2.8%), 8위는 김정희(0.40%), 9위는 이상재(0.1%)가 차지했다.  

   우리가 김좌진 장군의 생애에서 본받아야할 교훈으로는 인간존중의 정신, 애국심, 유비무환의 정신 등을 들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 김좌진 장군은 일평생 소아를 버리고 대아를 위해 목숨을 밭친 위대한 인물이다.

   김좌진 장군의 훌륭한 유지는 후손인 김두한-김을동-송일국으로 계속 이어져 받들어지고 있어 대한민국의 자주 독립과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참고문헌>

  1. 박영석,「백야 김좌진 장군 연구」, 국사편찬위원회,『국사관논총』 제51집, 1994.6.

  2. 송충원·성희제, “대전일보 지령 2만호, 대전일보 창간 65주년 기념 여론조사”, 대전일보, 2015.2.12일자.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1994),『아우내 단오축제』(1998),『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997) 등 4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지역 상여제작업의 현황과 과제”, "천안지역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등 60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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